127화
고개를 천천히 돌려 라이오넬을 봤다.
대수롭지 않은 표정이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내가 자주 착용하게 될 거라고 했잖아.’
그게 가보라고는 말해 준 적 없잖아요!
이걸, 이걸 어쩐담? 아무도 안 볼 때 조용히 풀어서 라이오넬 목에 걸어 줄까?
그를 보며 슬그머니 목덜미로 손을 올리려다가 저지당했다. 라이오넬은 내 어깨를 감싸고 자연스럽게 손을 미끄러트려 반쯤 올라간 내 팔을 내렸다.
나는 입술을 최대한 움직이지 않으며 그에게 속삭였다.
“미리 말해 줬어야죠.”
“도망갈 것 같아서.”
맞다. 뒤도 안 돌아보고 갔을 것이다.
그냥 무도회도 아니고 가신과 친척들이 모두 모이는 자리였다. 그런 자리에 가보를 걸고 오는 건 결혼할 거라고 광고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일을 상의도, 언질도 없이 벌이다니.
‘심지어 아직 청혼도 못 받았는데!’
툭 튀어나오려는 입술에 힘을 주고 라이오넬에게 팔짱을 꼈다.
성큼성큼 테라스를 향해 걷자 귀족들이 물결처럼 갈라지며 길을 터 주었다. 아무래도 얌전히 끌려오고 있는 라이오넬 덕분인 것 같았다.
당황스러웠지만 꿋꿋하게 걸어 테라스 문을 벌컥 열었다.
안으로 들어가 커튼을 닫고 뒤로 돌았다.
“라이오……!”
말끝이 그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부드러운 입술이 내 입술을 머금었다.
반사적으로 눈을 감고 라이오넬에게 팔을 두르려다가 번뜩 정신이 들었다.
볼을 감싼 커다란 손을 떼어 냈다.
입에 닿는 감촉이 좋아 잠깐 망설였지만 마음을 다잡고 라이오넬의 가슴을 밀었다.
눈앞에 입술이 유난히 붉고 반짝거렸다. 민망한 반짝거림이었다. 소매로 그의 입술을 벅벅 닦아 주고 허리에 팔을 올렸다.
“라이오넬!”
라이오넬이 바짝 다가왔다.
명필가의 한 획처럼 짙고 깔끔한 눈썹 밑으로 보석처럼 빛나는 눈동자가 보였다. 무심한 눈꼬리에서는 애정이 가득 담기다 못해 뚝, 뚝, 흐르고 있었다.
‘안 돼. 정신 바짝 차리자. 이건 따끔하게 말해야 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의 뒤로 커다란 보름달이 보였다.
그 빛처럼 은은하게 떠오른 미소를 보자 그가 철천지원수라도 용서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미모가 너무 열심히 일하잖아.’
냉철하고 금욕적인 얼굴로 저런 눈빛을 하는데 어떻게 화가 안 풀리고 배기겠어!
그의 미모가 사람이었다면 아마 과로사로 죽었을 것이다. 아니야. 그래도 단호하게 말해야지. 이건 연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다,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세요.”
생각보다 맥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심지어 말머리는 바들바들 떨리기까지 했다.
수치스러워 얼굴을 감싸는데 라이오넬이 그대로 나를 끌어안았다.
“넬리. 나는 데본더스가 그대를 건들지 않았다면 폐하께 인정받을 때까지 그냥 내버려 뒀을 거야.”
“알아요.”
실제로 죽기 전에는 데본더스가 매년 깐족거리러 왔으니까.
“그러니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것들에게 보여 줄 생각이었어.”
나를 지키기 위해 그런 거구나. 데본더스 같은 사람들이 또 있을까 봐.
“미리 말 좀 해 줘요. 그래야 당황을 안 하죠!”
라이오넬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화해의 의미로 마주 안아 주고 같이 테라스 밖으로 나왔다.
그 뒤로 무도회는 지나치게 평화로웠다.
공작을 테라스로 끌고 들어가는 내 모습이 너무 박력 넘쳤었는지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다.
고용해도 될 만한 인성을 가진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보기도 전에 무도회는 끝이 났다.
그래도 나 빼고는 모두 일을 잘했는지 명단이 제법 길었다.
“각하. 중복되는 이름을 추려서 가져왔습니다.”
라이오넬이 레반스가 건넨 서류를 눈으로 쭉 훑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명단에 있는 사람들만 남기고 전부 돌려보내.”
“알겠습니다.”
“남은 사람들은 모아서 상황을 설명하고 원한다면 행정관 시험을 보게 하도록.”
“예, 각하.”
레반스가 자리로 돌아갔다. 라이오넬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가 싶더니 리지를 보았다.
“리지.”
옆에서 ‘헉!’ 하고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라이오넬이 리지를 업무 보조라고 부르지 않고 이름으로 부른 건 처음이었다.
놀란 눈을 하고 라이오넬과 리지를 번갈아 보는데 그가 입을 열었다.
“너도 행정관이 되는 게 좋겠군. 업무 보조로 있긴 아까우니.”
“제, 제가요?”
라이오넬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 실수가 줄어야 한다. 할 수 있겠나?”
“네!”
리지가 두 손을 불끈 쥐었다. 동시에 그녀가 들고 있던 펜이 또각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리지가 펜촉을 하도 꽂아 대 엉망이 된 벽을 보았다.
다행히 레반스가 리지의 펜을 금속이 아닌 것으로 바꾼 지 오래였기에 벽이 상하거나 누군가가 표적이 되는 일은 없었다.
* * *
하지만 다짐과 달리 리지는 그날도 펜 3개를 분질러 먹고 컵 두 개를 깨트렸으며 중요한 서류 하나를 불태웠다.
아무래도 실수를 줄이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릴 듯했다.
인사에 관한 것은 항상 레반스가 맡았기에 이번 시험도 그가 진행했다. 합격한 인원이 생각보다 많아 모아 놓고 교육을 해야 할 지경이었다.
그때, 당혹스러운 일이 한 번 더 일어났다.
“응?”
집무실에 들어섰는데 리지와 레반스가 보이지 않았다. 책상도 두 개밖에 없었다.
하나는 라이오넬 것이 분명한데 다른 하나는 누구 것인가?
‘내 거겠지 뭐!’
심지어 책상은 마주 보고 있었다.
라이오넬의 얼굴을 구경하는 건 좋지만 일을 할 땐 너무 반짝여서 방해되는데.
“리지랑 레반스는요?”
“1층 동쪽 회랑 전체를 업무용으로 쓰기로 했어. 그래서 그쪽으로 자리를 옮겼지.”
“그럼 저는요?”
“그대는 나와 있어야지.”
누가 봐도 나랑 단둘이 있으려고 리지와 레반스를 쫓아낸 모양새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앞으로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수도에 있는 중개업자에게 온 편지였다.
여왕님께서 하사하신 조그만 집을 거액에 매입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으니, 팔 생각이 있으면 답장을 보내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 편지를 옆에서 보던 라이오넬이 은근히 나를 부추겼다.
“노후에 쓸 집은 노후에 짓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이런 가격을 제시하는 사람은 드무니 지금은 파는 게 좋겠군.”
내 유토피아를 누구한테 넘기라는 거야!
편지를 톡 건드는 손가락이 얄미워 콱 깨물어 버렸다. 아프라고 한 짓인데 이상하게 라이오넬의 눈에 불이 붙었다.
나는 팔을 가슴 앞에서 엑스자로 교차해 내 어깨를 감쌌다.
“안 돼요! 이, 일해야 하잖아요.”
라이오넬이 조용히 벽시계를 가리켰다. 마침 퇴근 시간이 지나 있었다.
그가 내 허리를 끌어 무릎 위에 마주 보는 자세로 앉혔다. 허락을 구하는 얼굴로 올려다보자 당할 재간이 없었다.
왜 라이오넬의 미모는 퇴근을 안 하는 걸까. 한숨을 쉰다는 게 모르고 고개를 끄덕여 버렸다.
집무실이 침실이 될 정도로 뒹굴고 나서야 문득 의문이 들었다.
‘이래도 되나?’
당연히 안 되지.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왜 자꾸 심해지는 거야!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그간의 행적을 되짚다가 처음 라이오넬이 왜 이런 상태가 되었는지 들었을 때를 떠올렸다.
나는 금세 문제점을 깨달았다. 라이오넬을 괜찮게 만들겠다는 그것부터가 문제였다.
‘망해라! 했을 때 잘되었으니, 괜찮아져라! 했을 때는 안 괜찮아지지.’
좋아. 다시 해 보자. 이번엔 라이오넬의 불안감을 극대화할 방법을 생각해 보는 거야.
“넬리. 나에게 집중해야지.”
……잠시 뒤에 생각해 보자.
* * *
나는 라이오넬이 잠든 것을 보고 침대에 기대앉았다.
계획을 짜려면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데 그가 깨어 있을 때는 도무지 시간이 나지 않았다.
혼자는커녕 다른 생각조차 못 하게 만들곤 했다.
‘자고 있으니까 잠깐 나갔다 와도 되겠지?’
조심스럽게 방을 빠져나왔다. 정원으로 내려가는데 평상복 차림의 메리와 마주쳤다.
“메리! 어디 가요?”
“며칠 뒤에 고향에 내려갔다 올 거라서 선물을 좀 사려고요. 넬리 님은요?”
“저는 그냥 산책이요.”
메리가 힐끗 내 뒤를 보았다.
“오늘은 공작님이 안 보이시네요.”
“낮잠 자고 있어요.”
메리가 고개를 끄덕이고 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녀 옆에서 나란히 걸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대부분 그녀의 고향과 가족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듣기만 해도 따뜻하고 평화로워지는 것 같았다.
“기회가 되면 저도 가 보고 싶어요!”
“저도 놀러 오시라고 하고 싶었는데, 공작님이 허락 안 하실 게 분명해서 말씀 안 드렸어요.”
그 말에 눈앞이 밝아지는 것 같았다.
찾았다. 라이오넬의 불안을 극대화할 방법!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획을 짠 뒤, 가장 중요한 대목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흐흐흐흐흐.”
“오늘 흐흐흐는 평소보다 기네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메리가 뿌듯하고 흐뭇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주소 남기면 놀러 갈게요.”
“정말요?”
나는 고개를 크게 흔들고 붙잡은 메리의 손도 크게 흔들었다.
“저는 들어가 볼게요. 조심히 다녀와요, 메리.”
그녀에게 인사하고 우당탕 계단을 올라갔다. 그리고 집무실로 달려가는데 문이 벌컥 열리는 게 보였다.
밖으로 뛰쳐나온 라이오넬이 고개를 홱 돌렸다. 그가 성난 걸음으로 성큼 다가왔다.
눈빛이 맛이 갔잖아! 나도 모르게 뒤로 주춤 물러나자 라이오넬이 그 자리에 멈춰 깊게 숨을 내쉬며 손으로 제 얼굴을 문질렀다.
“그대를, 어쩌면 좋을까.”
낮은 목소리가 갈라지고 뚝뚝 끊겼다.
“함께 있을수록 불안해. 넬리, 너를 잃으면 내가 얼마나 무너질지 상상조차 할 수 없어서.”
그는 고개를 숙이고 손바닥에 얼굴을 묻은 채 굳어 있었다.
나는 그를 토닥이고 조심스럽게 끌어 다시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자마자 달려들려는 그를 양손으로 막았다.
달래고 함께 있는 것의 효과는 잠깐뿐이다. 라이오넬의 집착은 점점 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우리 둘 다를 위해서라도 지금은 강경책을 쓸 때였다.
나는 죽기 전부터 바라 온 숙원을 꺼내 들었다.
“저 휴가 보내 주세요. 한 달 동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