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제발 좀 망하세요 (125)화 (125/130)

125화

데본더스가 죽고 난 뒤, 그에게 붙었던 사람들은 언제 목에 칼이 들어올지 몰라 두려워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 와중에 라이오넬이 가문 사람들을 전부 불러들였다.

자신에게 호의적이었던 아레트와 레반스의 가문만 빼고.

데본더스가 있을 때도 라이오넬이 두려워 직접 나서지 못하던 자들이었다. 그가 죽었으니 라이오넬과 마주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지금 온 사람들은 죽어도 상관없거나 가문에서 소외된 사람들이겠네.’

적의 적은 아군이라고, 라이오넬이 의도한 대로라면 그를 적대하던 가신이나 친척들의 가문에서도 쓸 만한 사람을 건질 수 있었다.

레반스와 아레트의 가문 사람들도 없으니 두 사람의 안목도 쓸 수 있고 말이다.

고개를 끄덕이는데 라이오넬이 다시 물었다.

“질문.”

이번엔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라이오넬은 잠시 기다리다가 다시 명령했다.

“해산해.”

그의 말이 끝나자 사람들이 우르르 빠져나갔다. 집무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전부 제 책상으로 돌아갔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주민이 늘어나서 그런지 허가해 줄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하나씩 검토하고 있는데 이상하게 오른쪽 뺨이 따가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아니나 다를까 라이오넬이 나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왜요?’

입 모양으로 물었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리지와 레반스를 한 번 훑더니 왼쪽 눈썹을 까딱였다.

뭐야. 왜 갑자기 두 사람을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거람?

라이오넬은 고개를 젓고 나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일어나서 다가가자 그가 책상에 곱게 누워 있는 서류를 톡톡 두드렸다.

“이 부분 설명을 들어야겠는데.”

책상을 빙 둘러가 라이오넬 옆에 섰다. 허리를 숙여 그가 가리킨 종이를 들여다봤다.

“어? 이건…….”

그냥 래브런 상단이 알터우드 공작령에 와인 창고를 짓는 걸 허가해 달라는 내용인데.

설명할 게 있나? 요리 보고 조리 봐도 없는 것 같았다.

“래브런 상단이 와인 창고를 짓고 싶대요.”

“최대한 자세히.”

이제 제일 자세한 건데!

고개를 기울이자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느낌이 났다. 라이오넬이 구불거리는 갈색 머리카락으로 장난치고 있었다.

귀여운 동물로 심신 안정하는 것을 알려 준 이후로 은근히 나를 동물 취급하는 것 같다.

‘이러다간 애인이 아니라 애완동물이 되겠어.’

빨리 라이오넬의 불안을 잠재워야겠다. 그에게 내 정수리를 내어 주며 언제쯤 아델하르트의 편지가 도착할지 가늠해 보았다.

일주일이 다 되어 가니 아마 얼마 안 있어 도착할…….

“주인님. 아델하르트 왕자님이 방문하셨습니다.”

답장이 올 줄 알았는데 본인이 왔다.

저렇게 대놓고 오면 라이오넬에 관한 이야기는 어떻게 해 주려고 그런담? 설마 말 안 해 주려고 그러나?

아델하르트는 라이오넬의 친구니까 그럴 수도 있다.

흔들리는 눈으로 문을 보고 있는데 아델하르트가 안으로 들어왔다.

“라이오넬. 바쁜가 봐?”

“별로. 영지까진 무슨 일이지?”

“엘링에 관한 건데.”

“자리를 옮기지.”

라이오넬이 문을 향해 가다가 뒤돌아 나에게 따라오라고 눈짓했다.

쪼르르 그에게 가려는데 아델하르트가 라이오넬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넬리는 일해야지.”

그러면서 나한테 눈을 찡긋거렸다.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따라오지 말라는 것 같았다.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라이오넬이 아델하르트의 팔을 걷어 냈다.

“내 곁에서 영지 사정을 파악하는 것도 일이야.”

아델하르트는 굴하지 않고 라이오넬의 어깨에 다시 팔을 걸치고는 그에게 뭐라고 속삭였다.

라이오넬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는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나를 보았다.

“다녀올 테니 일하고 있어.”

“아니면 꽈당이 얼굴이라도 보고 오든지.”

아델하르트가 말을 덧붙였다. 저건 꽈당이에게 뭔가 맡겨 놨다는 뜻일까?

고개를 비장하게 끄덕이자 그가 크게 웃음을 터트리며 몸을 돌렸다. 라이오넬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아델하르트를 따라갔다.

나는 두 사람의 발소리가 멀어지자마자 움직였다.

“레반스. 저 꽈당이한테 다녀올게요. 리지, 갔다 올게.”

대답을 뒤로하고 바쁘게 걸어 마구간으로 향했다.

꽈당이는 근처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빠르게 다가가 꽈당이에게 뭔가 숨겨져 있나 확인해 봤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아델하르트는 사람 헷갈리게 왜 그런 소리를 한 거야.’

팔짱을 끼고 괜한 마구간만 노려보는데 누군가 뒤에서 내 한쪽 어깨를 붙잡았다.

“넬리. 뭐 해요?”

“프레르! 아델하르트가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해서 뭐 좀 찾고 있었어.”

“아항.”

그가 작게 감탄하고 품을 뒤적이더니 종이 한 장을 꺼냈다.

“혹시 이건가? 전해 주라던데.”

나는 활짝 웃으며 곱게 접힌 종이를 받아 들었다.

거기에는 내가 기절해 있는 동안 라이오넬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쓰여 있었다.

‘이래서 그랬구나.’

내가 쓰러졌는데 나에 관한 질문에 아무런 답을 못해서 충격받았다니. 가만히 편지만 내려다보고 있자 프레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아요?”

“응?”

“공작님 집착하는 거, 보이는 것보다 심할 수도 있어요.”

안다. 죽기 전의 라이오넬은 내가 한숨 쉬는 횟수까지 보고 받았을걸!

나는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갑자기 왜 저런 말을 하지?

“혹시 편지 읽어 봤어?”

“아니요. 그런 건 아닌데…….”

프레르가 뒤통수를 긁적였다.

“어쨌든, 힘들거나 무슨 일 생기면 도와 달라고 하세요.”

안 그래도 불안해하는 사람인데 그럴 수는 없다.

“난 괜찮아!”

정말이다. 이래 봬도 나는 회귀하기 전, 극도로 예민해진 라이오넬의 숨 막히는 의심병을 경험해 봤던 사람이다.

심지어 그때는 애인도 아니고 직장 상사였다.

그런데 지금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하나뿐인 연인이다.

게다가 배신할까 봐 감시하는 게 아니라 날 잃을까 봐 무서워서 그런다는데. 이 정도면 애교지!

아예 불안함을 느끼지도 못하도록 꼭 붙어 있어야겠다.

“흐흐흐.”

오랜만에 시원하게 음침한 미소를 터트렸다.

프레르는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얼굴로 고개를 설레설레 젓더니 인사도 없이 돌아갔다.

나는 꽈당이의 갈기를 몇 번 쓰다듬어 주고 편지를 품에 넣은 뒤, 집무실로 돌아왔다.

라이오넬은 나보다 조금 늦게 들어왔다.

나는 리지와 레반스가 퇴근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라이오넬에게 물었다.

“프레르는 어떻게 됐어요?”

“머물기로 했어.”

“정말요? 잘됐다! 언제까지 있어요?”

“아델하르트가 왕이 될 때까지. 내가 그에게 힘이 되어 주는 조건으로.”

그거 괜찮은 건가? 또 위험해지는 건 아니겠지?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자 그가 나를 끌어당겨 머리카락에 입을 맞췄다.

“위험한 일은 안 해. 내가 위험하면 그대도 위험하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

정말, 은근히 부끄러운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니까!

그의 가슴에 이마를 콩 부딪친 채로 가만히 있었다. 라이오넬이 나를 품에 안으며 등을 느리게 쓸어내렸다.

“그리고 이제 우리를 해할 만한 사람도 없으니, 안심해도 좋아.”

그건 꼭 라이오넬,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 같았다.

* * *

그 뒤로 나는 라이오넬 옆에 찰싹 붙어 다녔다.

정말 화장실 가는 시간 빼고는 항상 곁에 있었다. 방을 구분하는 것도 의미가 없어졌다.

라이오넬 방의 침대가 더 넓고 쾌적했기에 나는 거의 그의 방에서 살다시피 했다. 시간이 나면 함께 뒹굴기 일쑤였다.

나를 신경 써서 감시해야 할 필요가 없어져서인지 그도 빠르게 안정을 찾아갔다.

거의 매일 밤 꾸던 악몽도 이제는 꾸지 않는 것 같았다.

평온하게 잠든 그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곧 떨어져 있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러면 메리, 소피, 리지랑 또 놀러 가야지. 저번에도 재미있었으니까, 이번에도 재미있을 거야.’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출근 준비를 하는데 옆구리와 팔뚝 사이로 라이오넬의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즐거워 보이는군. 무슨 생각 중이었지?”

“뎀스에 놀러 갔을 때요.”

조여드는 그의 손을 밑으로 내리고 짓눌린 리본 모양을 정리했다.

무의식중에 고개를 들었는데 거울 속의 라이오넬과 눈이 마주쳤다.

붉은 눈동자가 빛나고 있었다. 또렷한 빛은 아니었다. 닫힌 문틈 사이로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 것처럼 흐린 빛이었다.

‘……괜찮아지고 있는 거 맞겠지?’

올가미처럼 몸을 옥죄는 팔을 보며 잠시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냥 기우가 아니었음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 *

그동안 내 복수가 수포가 된 건 하늘이 도운 덕이라고 생각했다.

엄한 라이오넬이 내 복수에 해코지당하지 않도록 말이다.

전부 내 착각이었다.

‘사실 ‘흐흐흐’는 마법의 주문이 아닐까?’

계획을 전부 실패하게 만드는 마법의 주문 말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라이오넬의 안색이 이렇게 나빠질 수 있을 리 없었다.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데!

‘분명 나보다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는데 왜 3일은 못 잔 사람처럼 보이는 걸까?’

라이오넬의 얼굴이니 위태롭고 위험한 미인처럼 보이는 거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죽은 지 이틀이 지났다고 해도 믿을 만한 몰골이었다.

‘이러다 송장 치우겠네!’

나는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밤을 기다렸다.

역시나 라이오넬이 먼저 잠에 빠져들었다.

그가 진짜 잠들었는지 궁금해 눈앞에 손을 흔들어 보고 높고 모양 좋은 코끝도 앙 깨물어 보았다.

그는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그대로 조금 더 버티다가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했다.

그러다 진짜로 깜빡 잠이 들었다. 다행히 눈을 떴을 때, 주변은 어두웠다. 아직 라이오넬이 자고 있을 시간이었다.

‘라이오넬은 잘 자고 있겠지?’

뻑뻑한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들자 시야에 어둠에 잠긴 붉은 빛이 아른거렸다.

라이오넬의 눈동자였다.

그가 눈을 깜빡이지조차 않은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