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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제발 좀 망하세요 (124)화 (124/130)

124화

“보고 받았어. 시킨 게 있어서.”

라이오넬이 일을 시키면 아레트는 보통 끝나자마자 보고한다. 호위했던 걸 보고하러 온 모양이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그게 이렇게 오래 걸릴 일인가? 그냥 나가서 끊임없는 수다와 맛집 탐방을 다닌 게 다인데.

그걸 내가 술 한잔하고 성으로 돌아올 때까지 말하고 있었다니.

내가 어디서 누구와 무슨 말을 했는지 일일이 보고하려는 게 아니고서야…….

‘그거구나!’

아레트의 임무는 단순한 호위가 아니었다.

“나 감시했어요?”

“…….”

저 침묵은 긍정이다. 긍정은 하지만 말해 주진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나온다면 나에게도 다 방법이 있지!

음흉한 웃음이 나올 것 같아 입을 막고 고개를 숙였다.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고개를 들자 라이오넬이 인상을 쓰고 있는 게 보였다.

그는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나에게 다가왔다.

여기서 잡히면 밤새 함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내 계획이 전부 물거품이 된다.

나는 그의 손을 턱 막고 뒤로 물러났다. 그가 충격받은 얼굴로 그 자리에서 굳었다.

“넬리.”

듣기 좋게 거친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그의 눈에 불안과 죄책감이 동시에 깃들었다.

“저 화난 거 아니에요! 할 일이 생각나서 방에 가 보려고요. 우리 내일 만나요!”

빠르게 다가가 그의 볼에 입을 쪽 맞추고 잡히기 전에 방을 빠져나왔다.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책상에서 종이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내가 궁전에서 앓고 있을 때 라이오넬과 가장 많이 만났을 법한 사람한테 편지를 썼다.

[아델하르트에게. 나 아플 때 무슨 일 있었어요? 라이오넬이 이상해졌는데 이유를 모르겠네.

추신. 고용주님. 프레르를 주세요. 손에 피 한 방울 안 묻히겠습니다.]

겸사겸사 프레르도 언급하고 나니 완벽한 편지가 되었다.

라이오넬 상태로 봐서는 내가 보내는 편지까지 다 열어 볼 것 같았다.

프레르라면 몰래 편지를 보내는 방법을 알고 있겠지? 유능한 첩자였으니까!

과묵한 당나귀에게 바칠 뇌물 하나를 챙겨 마구간으로 갔다. 홍당무를 내미니 꽈당이가 으적으적 씹고 내게 등을 내주었다.

“꽈당아. 목초지로 가자.”

다그닥 다그닥. 발굽이 땅을 두드리는 소리가 제법 듣기 좋았다.

마음이 편안해져 늘어지게 하품을 하는데 갑자기 꽈당이가 귀를 쫑긋거렸다.

그러더니 내가 이유를 물어보기도 전에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으악!”

몸을 납작 엎드리며 꽈당이를 끌어안았다.

“꽈당아 갑자기 왜 이래! 너 점잖은 당나귀잖아!”

다급하게 소리쳐도 꽈당이는 멈추지 않았다.

혹시 누가 따라오는 건가 싶어 뒤를 돌아봤다. 주변이 어두운 데다가 바람까지 매서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목초지에 도착하자마자 꽈당이의 등에서 내렸다.

미친 것처럼 날뛰던 꽈당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한가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꽈당아. 갑자기 왜 그런 거야?”

“…….”

꽈당이는 내가 말을 걸든 말든 뒤돌아 친구들이 있는 울타리로 갔다.

역시 과묵한 당나귀. 차가운 당나귀.

나는 꽈당이를 쳐다보다가 주변을 한 번 둘러본 뒤 오두막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맹한 목소리가 들렸다.

“있어요.”

문을 열고 들어가자 프레르가 침대에 늘어져 있는 게 보였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코앞에 편지를 들이밀었다.

“자.”

“이게 뭐예요?”

“편지.”

프레르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편지를 받아 바로 펼쳤다.

“열어 보면 어떡해!”

“저한테 주신 거 아니에요? 아니네요.”

아델하르트의 이름을 봤는지 프레르가 혼자 질문에 대답하고 편지를 접었다.

“라이오넬한테 안 들키게 편지 보내고 답장도 받을 수 있을까?”

“암호로 바꾸면 돼요.”

“어떻게 바꾸는 건데?”

진짜 궁금해서 물어본 것뿐인데 프레르의 몽롱한 눈이 가늘어졌다.

“공작님이 보냈어요? 암호 체계를 알아 오라고?”

“프레르도 여기 사람이 다 되었구나.”

대뜸 친구를 의심하다니. 그래. 알터우드 영지 사람이면 의심병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지.

역시 아델하르트에게 돌려보내기엔 너무 가족 같다.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프레르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나는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좋아 좋아.”

프레르가 고개를 젓고 자리에서 일어나 종이를 준비했다.

“제가 내용을 봐야 하는데 괜찮아요?”

“음. 어쩔 수 없지. 그런데 답장은 보여 주기 좀 그런데.”

“그럼 그건 제가 알아서 할게요.”

“응. 고마워!”

프레르 옆에 앉자 그가 받아쓰기하는데 옆자리가 신경 쓰이는 아이처럼 비틀어 종이를 가렸다.

좀 치사하다 싶었지만 나는 부탁하는 처지니 어쩔 수 없지.

차라리 편하게 쓰도록 자리를 비켜 주자 싶어 일어났다.

“잘 부탁할게. 나는 라이오넬이 알아차리기 전에 돌아가 봐야겠다.”

“같이 온 거 아니었어요?”

“응?”

프레르가 고개를 기울이며 문을 열었다. 하지만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가 밖을 둘러보다 뒤통수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이상하다. 인기척이 들린 것 같았는데.”

“뭐야. 무섭게!”

나는 다시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편지 다 쓰고 나 좀 데려다주면 안 될까?”

“음…….”

슬쩍 문을 본 프레르가 다시 의자에 앉았다.

“더 늦기 전에 돌아가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그래?”

“네. 기사들이 순찰할 시간이니까 안전할 거예요.”

“그럼 나는 갈게. 답장 오면 말해 줘.”

“가세요.”

프레르가 늘어지게 대답하며 다시 몸을 비틀어 종이를 가렸다.

그가 괜찮다고 했지만 걱정되는 것은 어쩔 수 없어 주위를 경계하며 밖으로 나왔다.

휘두르지도 못하는 주먹을 꽉 쥐어 가슴께까지 들고 이리저리 휙휙 둘러봤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프레르의 말대로 안전한 것 같아 몸을 펴고 편하게 걸었다.

꽈당이를 데려와 성으로 돌아갔다.

* * *

넬리가 돌아가자마자 다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프레르는 넬리가 준 편지를 불태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자 붉은 안광이 보였다.

라이오넬이 안으로 들어오며 후드를 벗었다.

“역시 감이 좋군.”

“문 옆에서 대놓고 엿듣는데 모를 수가요.”

라이오넬이 주위를 훑었다. 그의 시선이 방 한쪽에 전시해 놓은 무기에 닿자 프레르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붉은 눈동자가 그에게 닿았다가 탁자 위에 있는 종이에 닿았다.

한때 넬리의 편지였던 것이었다. 지금은 글자 부분만 동그랗게 타 내용을 확인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라이오넬은 불탄 부분을 빤히 보았다. 그리 크지 않은데 글자가 보이지 않는 걸 보면 장문의 편지는 아니었던 것 같았다.

“뭐라고 쓰여 있었지?”

“공작님 걱정하던데요. 자기 아플 때 무슨 일 있었냐고.”

“그게 다였나?”

“저를 영지에 남게 해 달라는 듯한 말도 있었어요.”

“다른 건?”

프레르가 고개를 저었다. 딱 불탄 부분 정도 되는, 적당한 양의 진술이었다.

라이오넬은 프레르가 쓰던 편지를 벽난로에 던져 넣었다.

“앞 내용은 빼고 뒤 내용만 보내도록.”

“네.”

“……고분고분하군.”

“공작님 이야기하는 거잖아요. 본인이 싫다는데 쓰는 건 예의가 아니죠.”

프레르의 말에 진위를 확인하기라도 하듯, 라이오넬은 그를 빤히 보았다. 그러다 고개를 끄덕이고 오두막을 나갔다.

프레르는 말발굽 소리가 멀어지길 기다리다가 다시 의자에 앉았다.

‘넬리가 왜 걱정하는지 알겠네.’

넬리를 믿지 못할 때도 이 정도로 감시가 삼엄하진 않았다.

그는 고민하다가 펜을 들었다. 이 상태로 두어선 안 된다.

계속 신경 써야 하니 감시하는 사람도 심적으로 지치게 된다. 그리고 감시당하는 사람은 피가 마른다.

자신이 감시당한다는 것을 모르면 괜찮겠지만 넬리는 눈치가 빠른 편이니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공작님은 무섭지만, 친구가 먼저지.’

프레르는 여차하면 아델하르트에게로 돌아갈 생각으로 앞 내용을 넣고 뒤 내용을 뺐다.

라이오넬의 요구와 정반대의 편지가 완성된 순간이었다.

* * *

답장을 기다리는 동안 가신과 친척들이 전부 도착했다.

몇백 개나 되는 성의 방은 이제 별관과 탑까지 꽉 차서 남은 방이 없을 정도였다.

라이오넬은 집사님에게 무도회 준비를 하라고 말하고 우리를 불러들였다.

나와 리지. 메리를 포함한 오래되고 믿을 만한 하녀와 하인들. 집사님과 아레트, 레반스, 기사 몇 명을 비롯한 20명 남짓한 인원이 집무실로 모였다.

기사와 사용인들이 열과 행을 맞춰 서는 것을 보고 대충 따라 서자 라이오넬이 맨 앞에 서서 입을 열었다.

“영지를 운영할 인원이 턱없이 부족한 건 그대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예! 알고 있습니다!”

기사들 쪽에서 우렁찬 대답이 들렸다. 나는 리지와 함께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성에 모인 자 중에는 데본더스의 수하였던 자도 있다. 그러나 알력 다툼과 관심이 없어 몰랐거나 관련 없는 자들도 있지.”

진지하게 듣고 있는데 라이오넬이 나를 보고 슬쩍 미소 지었다.

내가 미소를 돌려주자 그가 조금 편안해진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너희는 그들을 지켜보고, 쓸 만한 자들의 명단을 작성해 내게 보고하도록. 데본더스에게 가담했던 가문의 사람도 상관없다.”

나는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라이오넬이 말해 보라고 눈짓했다.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없으면 어떡해요?”

사실 나는 다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소문에 어두워 몰랐다면 할 말이 없지만 알고도 데본더스의 만행을 눈감아 줬다면 그건 방관 아닌가?

목소리가 저절로 불퉁하게 나갔지만 라이오넬의 눈빛에는 애정만이 가득했다.

나는 괜히 부끄러워 목을 가다듬었다.

라이오넬이 다시 모인 사람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쓸 만한 자가 없으면 빈 종이를 내. 단, 비밀스럽게 진행하도록. 다른 질문 있나?”

“아레트와 저는 가문의 사람이 있어서 편파적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너희 가문은 부르지 않았다.”

나는 슬쩍 두 사람의 얼굴에 서운한 기색이 있나 보았다. 다 살피기도 전에 라이오넬이 설명을 덧붙였다.

“그래야 숙청하기 위해 부른 것처럼 보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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