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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제발 좀 망하세요 (123)화 (123/130)

123화

* * *

라이오넬은 어둠 속을 걷고 있었다. 발이 땅을 디딜 때마다 등 뒤에서 낙하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는 뒤를 돌아봤다.

지나온 자리에 사람들이 발자국처럼 누워 있었다. 라이오넬은 저를 향해 있는 얼굴 하나를 보았다.

“아…….”

과거의 어느 날. 그가 지키지 못했던 부하의 얼굴이었다.

라이오넬은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났다.

그가 딛고 있던 자리로 무언가가 빠르게 추락했다. 땅에 부딪혀 움직임을 잃고 나서야, 아무렇게나 흐트러뜨린 팔다리와 초점 없는 눈동자가 보였다.

‘타티아손.’

이건 꿈이다.

자각하는 순간 팔이 무거워졌다. 라이오넬은 반사적으로 품 안의 것을 끌어안으며 주저앉았다.

고개를 서서히 내렸다.

죽은 듯 몸을 늘어트린 채 안겨 있는 사람은, 넬리였다.

“헉!”

그는 폐가 조여드는 고통에 발작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황급히 옆자리를 더듬어 봤지만 텅 비어 있었다.

‘넬리.’

홀린 사람처럼 맨발로 성큼성큼 걸으면서도 넬리에 관한 생각뿐이었다.

그녀가 종일 무엇을 했는지, 뭘 먹고 누굴 만났는지 강박적으로 되짚었다. 그러나 그가 대답할 수 있는 건 퇴근 전까지의 일이 전부였다.

넬리에 대해 모르는 게 생기자 라이오넬은 견딜 수 없이 두려웠다.

배신과 죽음은 그가 모르는 곳이 숨어 있다가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그의 일상을 덮쳐 무너트렸다.

‘이번에는 그렇게 두지 않아.’

그는 무작정 넬리의 방으로 갔다. 거칠게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라이오넬은 참을 수 없어 문을 벌컥 열었다.

여린 녹색의 눈과 마주하고 나서야 라이오넬은 숨통이 트이는 것만 같았다. 그가 떨리는 숨을 내뱉자 넬리가 어색하게 웃었다.

“라이오넬. 아직 안 잤어요?”

그는 천천히 다가가 제 연인을 끌어안았다. 꿈속에서와 달리 온기가 느껴졌다.

“깼어.”

넬리가 꼬물꼬물 움직여 라이오넬과 자신의 몸 사이로 팔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위로 쑥 뻗어 라이오넬의 이마를 쓸어 넘겼다.

“나쁜 꿈 꿨구나? 땀도 엄청 많이 났어요.”

그러고는 다시 손을 빼내 라이오넬에게 둘렀다.

허리 부근에서 손바닥을 쓱쓱 문대는 느낌이 났다. 그의 옷에 손을 닦고 있는 것이었다.

라이오넬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고개를 든 넬리가 마주 웃었다. 맑은 진동이 맞닿은 피부에 번지며 부정적인 감정을 뒤덮었다.

라이오넬이 편안한 숨을 내쉬었다.

넬리는 라이오넬의 가슴에 볼을 기댔다.

거칠게 뛰던 그의 심장이 원래의 속도를 되찾자마자, 그녀가 기다렸다는 듯 몸을 떼고 라이오넬의 양 볼을 콱 움켜잡았다.

“이것 봐. 무슨 일 있었죠? 빨리 말해요. 혼자 앓지 말고!”

라이오넬은 입을 다물었다. 제 집착이 얼마나 숨 막히고 소름이 끼치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다.

속을 전부 보이면 넬리는 분명 진저리를 치며 떠날 것이다.

“곧 괜찮아질 거야.”

그래. 지금은 낯설고 호의적이지 않은 사람들이 성에 있어서 증세가 심해진 것뿐이다.

넬리에게 굳이 제 이기적인 욕망을 알리지 않아도 주변을 정리하고 나면 곧 나아질 것이다.

라이오넬은 넬리에게 입을 맞추며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

* * *

“어딜 간다고?”

라이오넬이 고개를 들어서 나와 리지를 봤다.

눈동자가 오늘따라 더 붉어 보였다. 겁을 먹었는지 리지가 슬쩍 내 뒤로 숨었다.

“뎀스요.”

“같이 가지.”

리지는 분명 내 뒤에 있는데 하얗게 질린 얼굴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가 내 등에 얼굴을 대고 마구 고개를 저었다.

나도 친구들끼리 노는 데에 애인을 데려갈 생각은 없었기에 걱정하지 말라는 듯 손을 뒤로 뻗어 리지를 토닥였다.

리지가 빼꼼 내 옆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순간 라이오넬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걸 본 리지가 숨을 헉 들이켜며 다시 내 뒤로 숨었다.

“메리랑 소피까지 껴서 넷이서만 놀 거예요.”

“…….”

“참고로 내가 갑자기 안 보이면 라이오넬이 걱정할까 봐 말해 주러 온 거예요!”

그렇다. 이건 통보다! 퇴근 이후의 시간은 어떻게 하든 내 마음이니까.

라이오넬이 고집을 부리면 이번에야말로 그가 대답할 때까지 그의 불안에 대해 캐물으려고 했다.

그러나 라이오넬은 고개를 숙여 다시 서류를 보았다.

“마차를 써도 좋아.”

“……그냥 보내 주게요?”

라이오넬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친구들과 놀러 가는 데에 내 허락을 구할 필요는 없지.”

어제 온몸으로 위로해 준 게 효과가 있었나 보다!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려는데 리지가 갑자기 훅 뛰쳐나왔다.

“친구 아니에요!”

“……리지?”

나랑 친구라는 게 무서운 상사에게 소리칠 만큼 싫은 일인가? 충격받은 얼굴로 그녀를 봤다. 하지만 정작 라이오넬은 덤덤했다.

“추종자로 정정하지.”

“감사합니다!”

……뭐가 감사한 건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말아야지.

대충 우정 비슷한 감정일 테니 친구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럼 저는 나갔다 올게요. 라이오넬 너무 일만 하지 말고 밥도 챙겨 먹어요.”

라이오넬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다지 믿음직스럽지는 않았다. 집사님께 라이오넬이 저녁을 거르지 못하게 해 달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정원에서 우리를 기다리던 메리와 소피를 만나 마차를 타고 뎀스로 향했다.

같이 밥을 먹고 돌아다니면서도 신기하게 이야기가 끊이질 않았다.

특히 나랑 리지는 말이 많아 계속 떠들었는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리지가 조용해졌다. 그리고 드물게 뒤를 돌아보기도 했다.

“리지 왜 그래? 뭐 있어?”

“아니요. 그냥, 누가 따라오는 것 같아서요.”

리지가 겁먹은 기색으로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메리의 얼굴은 아예 새하얗게 질렸다. 소피가 메리와 나를 안쪽으로 걷게 하며 사람이 많은 커피 하우스로 들어갔다.

그리고 중앙에 자리를 잡은 뒤 리지에게 물었다.

“자세히 말해 봐.”

“그냥 기분 탓일 수도 있는데, 자꾸 시선 같은 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말을 하다 말고 리지가 어느 방향을 쳐다보았다. 우리는 다 같이 리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커피 하우스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아레트를 발견했다.

‘이거, 뭔가 싸한데. 라이오넬이 우리 감시하라고 보낸 거 아니야?’

요즘 신경이 날카로우니 의심병이 도졌을 수도 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아레트를 쳐다보았다.

그러다 시야 끄트머리에서 뭔가 휙휙 움직이는 게 보여 고개를 돌렸다. 리지가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레트 님!”

높게 치켜든 손을 재빨리 끌어 내렸지만 아레트는 이미 우리 쪽으로 오고 있었다.

남은 자리는 리지와 나 사이의, 풍성한 레이스로 장식된 꽃분홍색 소파뿐이었다.

내심 그가 돌아가길 바랐다. 하지만 아레트는 전혀 거리끼지 않고 나풀거리는 소파에 앉았다.

“어떻게 알았어?”

아레트가 리지에게 물었다. 누가 따라오는 것 같다는 리지의 말의 ‘누가’가 아레트였나 보다.

그는 유령 같기로 유명했기 때문에 메리와 소피도 놀란 얼굴로 리지를 보았다.

그러나 리지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지 고개를 기울일 뿐이었다. 그녀를 빤히 보던 아레트가 불쑥 손을 뻗었다.

그리고 리지의 어깨와 팔뚝을 이리저리 주물렀다.

나는 깜짝 놀라 아레트의 손등을 찰싹찰싹 때렸다.

“뭐 하는 거예요!”

메리가 리지를 끌어안고 아레트를 노려봤다. 순식간에 네 사람의 경계 어린 시선…… 은 아니구나.

리지를 제외한 세 사람의 경계 어린 시선을 받게 되었지만 아레트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아래로 늘어진 리지의 손을 들어 매만지기 시작했다.

아레트를 퇴치하려는데 리지가 얼굴을 붉히고 수줍게 고개를 숙였다. 메리가 혼란스러운 눈으로 리지를 놓아주었다.

그녀는 나와 소피에게 눈빛으로 말했다.

‘이거 분위기가 아무래도, 그렇죠?’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를 비켜 줘야 하나 고민하는데 아레트가 리지의 손을 잡은 채로 입을 열었다.

“훌륭해.”

“……뭐가요?”

“근골격.”

이건 또 무슨 말이야. 리지 너는 왜 부끄러워하는 거야!

메리가 리지의 손을 아레트의 손아귀에서 빼내며 물었다.

“그런데 기사단장님. 여긴 어쩐 일이신가요?”

“…….”

난 저 침묵의 의미를 안다. 잠깐이나마 리지를 보러 왔나 고민했는데 아무래도 라이오넬이 보낸 게 맞는 모양이다.

“혹시 라이오넬이 날 감시하라고 했어요?”

아레트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대신 소피가 부정했다.

“설마요. 넬리 님을 왜 감시해요?”

“저번에도 감시했었잖아요. 로만이 첩자로 발각되고 난 뒤에요.”

“네? 아니에요. 저희가 받은 건 몰래 호위하라는 명령이었어요.”

그럼 오늘도 호위하라고 보낸 건가? 아레트를 보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괜히 오해했네! 민망해 헛기침하자 소피가 대놓고 제안했다.

“단장님. 이렇게 된 거 그냥 같이 다니시죠. 그게 호위하기 편할 겁니다.”

“응.”

그 뒤로 아레트는 우리와 동행했다. 그리고 대체로 리지 근처에 있었다.

그러면서 리지가 물건을 구경하다가 부수려 할 때마다 물건을 훌륭하게 구출하고 있었다.

덕분에 우리는 편안하게 돌아다니다가 영지로 돌아왔다.

“넬리 님. 선술집에서 맥주 한잔할까요?”

소피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아레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아레트도 마시고 들어가요.”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멍하니 텅 빈 자리를 보고 있는데 리지가 말했다.

“방금 성 쪽으로 가셨어요.”

급한 일이라도 있나? 고개를 잠깐 기울였다가 술을 한 잔 마시고 성으로 돌아갔다.

라이오넬에게 어떻게 놀았는지 말하고 싶었다. 겸사겸사 무사히 돌아왔다는 것도 알려 주려고 그의 방으로 향했다.

노크하려는데 안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잠깐 기다릴까, 하다가 그대로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들리던 소리가 뚝 끊겼다. 이내 문이 열리고 안에서 아레트가 나왔다.

나는 안으로 들어서며 라이오넬에게 물었다.

“무슨 이야기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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