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 * *
라이오넬에게 안겨 있다가 일찍 잠든 덕인지 꼭두새벽에 눈을 떴다.
침대 옆자리가 비어 고개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라이오넬은 이미 일어나 서류를 보고 있었다.
“잘 잤어요?”
다가가 뒤에서 목을 끌어안자 그가 고개를 틀어 내 팔뚝에 입을 맞췄다.
“덕분에.”
활짝 웃고 옆에 앉았다. 라이오넬 앞에 쌓아 놓은 서류를 조금 뒤적거리다가 같이 아침을 먹었다.
그러고 난 후에도 출근까지는 시간이 조금 남아 있었다.
뭘 할까 고민하다가 문득 어제 만나지 못한 프레르가 생각났다. 저녁엔 라이오넬하고 보내고 싶으니까 프레르는 아침에 만나고 와야지.
자리에서 일어나자 라이오넬이 고개를 들었다. 아침부터 어딜 가냐는 눈빛이었다.
“프레르에게 다녀오려고요.”
라이오넬이 잠깐 시계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어제 붙잡은 건 단순한 잠 투정이었나 보다.
그와 짧게 인사를 나누고 내 방으로 돌아와 나갈 준비를 했다.
성 밖으로 나와 꽈당이를 타고 정원을 지나는데 라이오넬과 마주쳤다.
“라이오넬!”
반갑게 인사하자마자 꽈당이가 알아서 라이오넬에게로 갔다. 라이오넬이 꽈당이 위에서 내리려는 나를 저지하고 고삐를 쥐었다.
“이제 가는 건가?”
“응. 라이오넬은요?”
“산책.”
“그럼 가는 길까지 같이 갈까요?”
라이오넬이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나와 나란히 걸으며 정원을 지나쳐 성문으로 향했다.
‘산책하는 겸 배웅해 주려나 보네.’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그가 같이 성문을 나섰다. 좀 멀리까지 배웅해 준다 싶었는데 나는 어느새 그와 함께 목초지에 들어서고 있었다.
“라이오넬도 프레르한테 볼 일 있어요?”
“아니. 그대와 같이 있으려고.”
어쩐지 순순히 보내 준다 싶었더니 따라올 심산이었나보다.
‘같이 있고 싶다니, 귀엽긴!’
목장지기의 오두막이 보이자마자 꽈당이가 걸음을 멈췄다. 라이오넬이 나를 향해 팔을 벌렸다.
그의 목에 덥석 매달리며 볼에 쪽 입을 맞춰 주고 땅에 발을 디뎠다. 하녀들과 달리 프레르는 라이오넬을 딱히 불편해할 것 같지 않아 손을 잡고 같이 오두막으로 향했다.
꽈당이가 제 친구들에게 달려가는 것을 보고 오두막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이젠 누구냐고 묻지도 않는다. 그만큼 영지에 익숙해졌다는 뜻이겠지!
생각보다 설득이 쉬울 것 같아 자신감을 가지고 문을 벌컥 열었다. 프레르가 하던 일을 멈추고 맹한 얼굴로 나와 라이오넬을 번갈아 보았다.
그의 앞에는 커다란 트렁크가 입을 쩍 벌린 채 바닥에 누워 있었다.
“프레르. 짐 싸?”
“아, 네. 미리 싸 두면 떠날 때 편하잖아요.”
벌써 떠날 생각을 하다니. 매정하긴!
나는 아직 텅 빈 트렁크를 탁 닫아 침대 밑으로 밀어 넣어 놓고 그를 끌어다 의자에 앉혔다.
“안 돼. 못 가!”
“되는데. 가는데.”
“못 가. 프레르가 가고 난 다음에 오는 목장지기들은 다 위험한 사람들이었단 말이야.”
프레르가 뒤통수를 긁적이며 눈을 끔뻑였다.
“넬리. 혹시 예언도 하세요?”
……앗. 죽어서 과거로 돌아왔다는 건 라이오넬한테만 말했지.
라이오넬을 슬쩍 보자 그가 내 옆에 앉았다.
“로만을 말하는 건가 보군.”
“아항.”
프레르가 습관적으로 감탄하고는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흔들리는 모양이다.
이때다 싶어 목장지기로 일하는 것에 대한 장점을 늘어놓자 프레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왕자님께 한번 말해 볼게요.”
“수도에 다녀오려고?”
“네.”
갔다가 안 내려오려는 거 아니야?
눈을 가늘게 뜬 채 보고 있는데 라이오넬이 창밖을 보며 시간을 가늠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편지를 보내 놓도록 하지.”
“저도 보낼래요.”
“……그렇게까지요?”
프레르가 맹하게 물었다.
“풍화돼서 뼈만 남을 때까지 일 시킬 거라고 했잖아요!”
“역시 억하심정이…….”
“어쨌든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그의 등을 팡팡 두드리고 라이오넬에게로 갔다.
프레르가 나한테 손을 흔들고 라이오넬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라이오넬은 한동안 프레르를 보다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나는 꽈당이를 찾아 고삐를 쥐고 한 손으로는 라이오넬에게 팔짱을 꼈다.
성으로 돌아오자 집사님이 다가왔다.
“주인님. 몇몇 가신들이 도착했습니다.”
알터우드 영지와 가까운 곳에 사는 가신들은 말을 타고 3시간이면 올 수 있으니까. 아마 편지를 받고 오늘 아침에 바로 출발한 모양이었다.
“같이 가.”
“어딜요?”
인사받는 자리에? 에이. 설마. 아니겠지.
혹시 몰라 빠르게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러자마자 라이오넬이 집사에게 말했다.
“인사는 다 모이면 받도록 하지. 별관으로 안내하고 여독을 풀고 있으라고 해.”
“예. 주인님.”
라이오넬이 내 손을 잡은 채로 계단에 올랐다.
‘아무래도 이상하단 말이야.’
수도에 가기 전에도 제법 자주 붙어 있긴 했지만 지금처럼 한시도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던 적은 없었다.
단순히 떨어져 있었던 만큼 붙어 있고 싶어 하는 거라기엔 정도가 심했다.
재판 전까지는 괜찮았었다가 그 이후부터 이렇게 계속 붙어 있었으니까…….
“라이오넬. 나 쓰러져 있을 때 무슨 일 있었어요?”
“전혀.”
“그런데 왜 이렇게 안 떨어지려고 해요?”
“같이 있고 싶으니까.”
아까와 같은 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귀여운 느낌은 아니었다.
그의 얼굴을 빤히 보다가 눈이 마주쳤다. 서서히 떠오르는 미소가 너무 아름다워 머릿속이 하얘졌다.
멍해진 채 집무실로 들어갔다. 리지와 레반스는 이미 일을 하고 있었다.
내가 앉자마자 리지가 의자를 끌고 와서 속닥거렸다.
“넬리 님. 내일 일 끝나고 뎀스에 가실래요? 메리 씨가 이제 움직여도 많이 아프지 않대요.”
“소피는?”
“내일 쉬는 날이라고 했어요.”
“그래!”
리지가 환하게 미소 짓고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리고 자기 자리로 돌아가다가 내 책상을 쿵 걷어찼다.
쌓여 있던 서류가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황망한 얼굴로 바라보는데 리지가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짚어 다시 자리에 앉혔다.
“내가 할게!”
“죄송해요…….”
“이제 익숙해져서 괜찮아. 대신 내일은 실수 안 하기야. 일찍 퇴근해야 하니까.”
“네!”
서류를 그러모아 바닥에 내리쳐 정리하고 일어나는데 라이오넬과 시선이 마주쳤다.
활짝 웃어 주고 책상에 앉았다. 점심시간이 다 되어 갈 즈음 하녀가 안으로 들어와 나에게 말했다.
“넬리 님. 중개인이 왔어요.”
하디거로 위장했던 아델하르트가 나가고 난 뒤 정신이 없어서 집을 내놓지 않았는데. 중개인이 무슨 일이지?
‘잘됐다. 안 그래도 다시 내놓으려고 했는데.’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라이오넬이 자석처럼 딸려 왔다.
‘역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나중에 아델하르트한테 물어봐야겠다.’
나는 하녀를 따라갔다. 홀에서 기다리던 중개인이 내 옆을 보고 깜짝 놀랐다. 황급하게 라이오넬에게 인사를 올렸다.
나는 슬그머니 옆으로 떨어져 인사를 피했다가 중개인이 고개를 들고 난 뒤에 라이오넬 옆으로 돌아갔다.
라이오넬이 응접실로 들어가며 집사님에게 차를 내오라고 했다.
중개인은 황송해하면서도 연신 응접실 안을 구경했다. 그리고 차가 나오자마자 용건을 꺼냈다.
“오늘 가 보니까 오두막이 비어 있던데, 원래 살던 세입자는 나간 모양이에요.”
“네. 축제가 끝나자마자 나갔어요.”
“혹시 다시 내놓으실 생각 없으신가요? 세 들어 살고 싶다는 사람이 있는데……. 아! 혹시 저번에 말했던, 집을 써야 하셔서 안 내놓으신 건가요?”
……옆에서 라이오넬의 뜨거운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라이오넬의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오두막에서 살 생각이었나?”
“하하. 그게…….”
“내게 말도 없이? 내 곁을 떠나서?”
혹시 화났나? 슬쩍 그를 돌아보았다. 라이오넬이 대답해 보라는 듯 왼쪽 눈썹을 까딱였다.
“그건, 라이오넬 얼굴을 보면 너무 심장이 뛰어서! 잠깐 진정을 시키려고 했던 거예요.”
“……지금은?”
그의 손끝이 내 손가락 사이 사이를 파고들어 강하게 옭아맸다.
물론 지금도 심장이 뛰긴 하지만, 이제는 연인이니까 괜찮지! 해명하려는데 라이오넬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나가서 살 생각이 있나?”
나는 옴짝달싹할 수 없는 손을 내려 보다가 입을 다물었다.
“아니요!”
“그럼 내가 사도 상관없겠군.”
“네?”
그럼 나야 고맙긴 한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고개를 기울이는데 라이오넬이 깍지 낀 손을 풀지 않은 채 중개인을 보았다.
“내가 사지. 웃돈을 얹어서.”
중개인이 힐끗 내 눈치를 봤다. 나는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는 오두막뿐이었지만 지금은 여왕님이 하사해 주신 집이 있으니까 괜찮다.
무려 작은 이층집이다. 그것도 테라스에 흔들의자가 있는! 에트킨 부인의 말로는 아침마다 빵 냄새도 난다고 했다.
안 그래도 팔려던 걸 라이오넬이 웃돈까지 얹어서 사겠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지.
“흐흐, 흠! 저는 좋아요.”
음흉하게 웃으면 라이오넬이 웃돈을 준다는 말을 물릴까 봐 재빨리 헛기침으로 가렸다.
계약은 빠르게 체결됐다. 라이오넬은 그 자리에서 월세 계약까지 체결했다. 집을 비워 두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저렇게 안 해도 안 도망가는데.’
계약서를 들고 나가는 중개인을 보며 서 있었다.
얼마 안 있어 옆구리를 타고 넘어온 팔이 내 배를 끌어당겼다. 라이오넬이 빈틈없이 나를 안고 내 뒷덜미에 이마를 기댔다.
‘도대체 뭐가 이렇게 불안한 걸까?’
나는 그의 손등에 손을 겹쳤다. 라이오넬이 손을 펼쳤다가 내 손가락을 휘감고 다시 오므렸다.
그를 조금 달래다가 밖으로 나왔다.
그새 가신과 방계 혈족들이 더 온 것인지 평소와 달리 고급스러운 옷차림의 사람들이 제법 눈에 띄었다.
“각하.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데본더스한테 붙어 있었거나 그의 만행을 모른 체했던 사람들 몰려와 인사를 건넸다.
라이오넬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표정은 평소보다 더 싸늘했다.
그러나 집무실로 돌아오고 난 뒤에는 괜찮아 보였다.
혹시라도 퇴근한 뒤에 나를 놓아주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그는 의외로 나를 붙잡지 않았다.
‘그래. 붙어 있으려는 것도 점점 괜찮아지겠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똑똑.
야심한 밤. 그가 내 방문을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