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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제발 좀 망하세요 (118)화 (118/130)

118화

내 입에서 나온 사실이 너무 충격적이었는지 주변에서 제법 큰 목소리가 나왔다.

“친모라니, 거짓말이겠지. 하나도 안 닮았잖아.”

“아니에요. 잘 보면 좀 닮은 것 같기도 해요.”

“그런데 몰그란 부인은 며칠 전에 수도를 떠나지 않았습니까?”

떠드는 소리가 커지는 와중에도 게드너는 잠자코 있었다.

하지만 불안함은 감출 수 없었는지 시선이 사람들 사이에 서 있는 데본더스에게로 향했다.

데본더스가 아델하르트에게 다가가서 그의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대고 속닥거렸다. 그러자 아델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내가 뭘 본 거야?’

아델하르트가 데본더스와 속닥거린 거 맞지? 둘이 언제부터 그렇게 친밀한 사이였다고?

멍하니 두 사람을 쳐다보는데 데본더스가 나를 힐끗 보며 미소 지었다.

젖은 양말을 신고 있는 것처럼 기분이 더러웠다.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데 여왕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부터 허락 없이 떠드는 자는 혓바닥을 자를 것이다.”

주변을 정리한 여왕이 내 이름을 불렀다. 사람들이 말한 것들에 대해 설명해 보라는 투였다.

“몰그란 부인은 16살에 저를 낳아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 않아요. 눈 색은 똑같고 체구도 비슷하니까 하관을 가렸으면 저라고 착각했을 수도 있어요.”

여왕이 증인들을 보았다. 그들은 다들 내가 눈 밑을 가리고 있었다고 말했다.

“게드너 남작. 그대가 본 넬리 페퍼도 얼굴을 가리고 있었나?”

게드너가 당황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내가 하지도 않은 일을 봤다는 거짓말이 된다. 나는 사업장에 갈 때 한 번도 얼굴을 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리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방금 대답은 랜더스 공이 거짓말을 했다는 뜻이 된다.

여왕님은 당연히 랜더스 공을 믿을 것이다. 그 사실을 게드너도 잘 알고 있는지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몰그란 부인이라는 증거는 없습니다. 넬리 페퍼가 거짓말을 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여왕님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기사 단장이 상자 하나와 검을 가져왔다.

“폐하. 게드너 남작의 방에서 발견된 것입니다.”

“저는 억울합니다!”

거짓말은 아닌지 게드너는 정말 억울해 보였다. 그러나 여왕님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기사의 손에서 검을 가져왔다.

“기사가 아닌 자가 허가 없이 궁전에서 장검을 소지하다니. 금기를 어겼군.”

“저는 정말 억울합니다, 폐하. 제 검이 아닙니다.”

“그럼 네 것도 아닌 검이 왜 네 방에서 나왔을까.”

여왕님이 기사가 들고 있던 상자를 게드너 앞에 던졌다. 새까만 내용물이 쏟아졌다. 그건 타다만 위장복과 복면 같은 것이었다.

“그것도 이런 것들과 함께.”

“저는, 저는, 억울합니다, 폐하. 제 검이 아닙니다.”

“끝까지 궁전에 검을 들고 온 적이 없다고는 하지 않는군.”

게드너의 얼굴은 이제 하얗다 못해 푸르게 보일 정도였다.

여왕님이 게드너에게로 다가갔다.

“답해라. 무슨 의도로 내게 거짓을 고했는가?”

게드너가 털썩 무릎을 꿇으며 몸을 벌벌 떨었다.

그가 간절한 얼굴로 데본더스를 보았고, 데본더스는 아델하르트를 보았다.

그러자 아델하르트가 아까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

“말하라.”

“이 모든 게 라이오넬 알터우드 공작이 꾸민 일입니다.”

저 아델하르트 놈이 뭐라고 하는 거지?

나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트리려다가 혀가 잘릴 것 같아서 이를 악물었다.

뒤에서 하인이 종이로 된 것들을 잔뜩 가져왔다.

“여기 증거가 있습니다. 라이오넬 알터우드가 보낸 지령서입니다. 넬리 페퍼를 함정에 빠트려 죽이라는 내용입니다. 물론 증인도 있습니다.”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말도 안 된다고 소리치려고 하자마자 아델하르트가 목소리를 조금 더 키워 말했다.

“그리고 이건 모두 데본더스 공이 준비한 겁니다.”

나는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데본더스는 조용히 앉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이건 모함입니다! 전부 라이오넬이 한 짓이 맞습니다.”

“제가 뭘 했다는 겁니까, 숙부님?”

고개를 홱 돌리자 라이오넬과 눈이 마주쳤다.

기사들을 이끌고 들어온 그가 나를 보더니 왼쪽 눈썹을 까딱였다. 그리고 아델하르트를 노려보며 내게 다가왔다.

나는 라이오넬의 손길에 이끌려 몸을 세우며 그의 어깨 너머를 보았다. 기사들이 사람들을 끌고 와 꿇어앉히고 있었다.

그중에는 몰그란 부인도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몰그란 부인이 벌떡 일어나려 했다. 기사들이 그녀의 어깨를 내리눌렀으나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소리쳤다.

“넬리! 나 좀 살려 주렴. 응? 그래도 내 오라버니 덕에 네가 이때까지 먹고 살 수 있었잖아! 거둬 준 은혜를 이렇게 갚을, 읍! 으읍!”

그녀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여왕님의 수행인이 그녀의 턱을 우악스럽게 잡아 벌렸다.

수행인은 몰그란 부인의 입에서 혀를 잡아 빼냈고, 여왕님은 기사의 허리춤에서 검을 빼냈다.

“네가 들어오기 전에 허락 없이 떠드는 자는 혀를 자르겠다고 했다.”

“흐으, 으으으…….”

“또 떠드는군.”

몰그란 부인이 소리 내던 것을 멈췄다.

“두 번째는 눈감아 줄 수가 없는데.”

몰그란 부인이 몸부림치듯 고개를 내저었다. 여왕은 검을 몰그란 부인의 어깨에 올려놓았다.

“하나 진실을 알려면 네 혓바닥이 필요하니, 솔직히 털어놓으면 혀는 자르지 않겠다.”

수행인이 혀를 놓아주었지만 몰그란 부인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여왕이 고개를 돌려 라이오넬을 보았다. 그가 내 어깨를 부드럽게 쓸어 주고는 앞으로 나섰다.

“몰그란 남작 부인은 게드너 남작과 함께 넬리 페퍼 납치 미수 사건에 가담했습니다.”

라이오넬의 시선이 데본더스에게 겨눠졌다.

“데본더스 알터우드가 이 일의 배후입니다. 그가 모든 일을 지시했습니다.”

여왕이 몰그란 부인에게 물었다.

“사실인가?”

“예, 그렇, 그렇습니다.”

“자세히 설명하라.”

몰그란 부인은 울먹이면서도 정말 빠짐없이 모든 것을 고했다.

“하녀를 저로 위장해 저택으로 보내 놓고, 저는 몰래 수도에 남아 넬리를 흉내 내어 조작한 장부를 가져다 두라고 했습니다.”

몰그란 부인이 입을 다물자 라이오넬이 차갑게 재촉했다.

“그게 다가 아닐 텐데.”

“저보고 얼굴을 가리면 넬리와 비슷하다면서, 주는 돈을 넬리의 하녀의 공공 금고에 넣으라고 했어요. 그리고 버려진 종탑으로 돌아오라고요.”

부인이 나를 힐끗 보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면 그녀가 금고에 돈을 넣고 스스로 종탑에 간 것을 본 목격자가 생길 거라고 했습니다. 나중에 넬리가 종탑에 갇혀 있었다고 해도 무죄를 입증하는 증거가 되진 못할 거라고 했어요.”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여왕의 뒤에 서 있던 에트킨 부인이 기사들에게 눈짓했다.

기사들이 뒷걸음질 치던 데본더스를 잡아 와 게드너와 함께 몰그란 부인 옆에 앉혔다.

그가 무섭게 라이오넬을 노려보았다. 그러다 결백한 사람처럼 고개를 빳빳하게 세우고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이건 몰그란 부인과 라이오넬이 꾸민 일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순간에 몰그란 부인를 잡아 올 수 있었겠습니까?”

라이오넬이 가볍게 비웃고 기사가 데려온 남자의 목덜미를 끌어다 데본더스의 옆에 앉혔다.

“숙부님. 이 자를 보십시오.”

데본더스는 남자의 얼굴을 힐끗 보더니 고개를 돌렸다.

“모르는 사람이다.”

“숙부님의 저택 지하에서 발견한 사람인데, 정말 모르십니까?”

라이오넬이 남자를 보자 그가 여왕의 눈치를 살폈다. 여왕이 말해도 좋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저는, 데본더스 님의 명령으로, 라이오넬 알터우드 공작님의, 글씨체를 계속 연습했습니다. 그리고 그 글씨로 거짓 증, 증거를 만들었습니다.”

“끌고 오기 전에 확인했습니다.”

기사가 종이를 들었다. 거기엔 같은 문장 두 줄이 위아래로 나란히 쓰여 있었다.

“위에 문장은 라이오넬 공작이, 아래의 문장은 이 남자가 썼습니다.”

여왕은 종이를 받아 살폈고, 라이오넬은 진술을 이어 갔다.

“데본더스는 저자를 감금, 협박해 제 필체로 지령서와 거짓 편지들을 작성하게 했습니다.”

“예, 저, 저는, 저는……. 죄송합니다. 살려 주십시오. 제발, 목숨만은…….”

남자가 바닥에 엎드려 눈물을 흘렸다. 여왕이 기사에게 눈짓하자 그를 데리고 나갔다. 여왕의 시선이 남자와 같이 끌려온 자들에게 닿았다.

“남은 것들은 뭐지?”

“데본더스의 사주를 받아 알터우드 영지에 불을 지른 자들입니다.”

데본더스가 까드득 이를 갈았다. 그는 살기 어린 눈으로 라이오넬을 노려보았다.

“네가 어떻게.”

“숙부님이 증거와 증인을 처리하는 방식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제 부모님을 사고로 위장해 살해했을 때와 다를 게 없어서.”

여왕님의 명령 때문에 아무도 입을 열진 않았으나 여기저기에서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데본더스가 악에 받쳐 소리쳤다.

“증거! 내가 네 부모를 죽였다는 증거가 있나?”

“있었다면 지금까지 살아 있지 못했겠지.”

목소리에는 고저가 없었으나 그의 손가락 마디와 턱선은 잔뜩 불거져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의 주먹을 양손으로 감쌌다.

라이오넬이 잠시 나를 돌아보았다가 여왕님께 말했다.

“폐하. 데본더스 알터우드는 왕족을 기만하고 궁전과 가문의 영지를 혼란스럽게 했습니다. 사형에 처해 주십시오.”

여왕님은 죄인들을 무정한 눈으로 쭉 훑었다.

몰그란 부인이 벌벌 떨다가 쫓기는 사람처럼 무릎으로 기어 라이오넬과 내 발치에 매달렸다.

“넬리. 내가 다 잘못했어. 엄마 좀 살려 줘. 내가 다 갚으면서 살게. 응? 제발. 제발, 넬리.”

“제가 묶여서 갇혀 있을 때 어차피 죽을 거라고 비웃지만 않았어도 조금은 동정심이 생겼을 텐데…….”

“그, 그건!”

몰그란 부인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가 몸을 홱 틀었다.

“공작님. 난 넬리의 엄마예요. 연인의 어머니를 죽게 할 생각인가요?”

그는 붉은 안광이 맺힌 눈으로 몰그란 부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설마 여기서 죽이려는 건 아니겠지?

오금이 저려 라이오넬의 손을 꼭 쥐었다. 그러자 라이오넬이 시선을 거뒀다.

몰그란 부인은 덫에 잡힌 쥐처럼 떨다가 실신할 것 같은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폐, 폐하! 저는 밖에만 있었습니다. 아니, 저도, 저도 협박당했습니다! 제발 살려 주십시오.”

여왕님은 그녀에게 잠시 시선을 주었다가 나를 보았다.

“넬리 페퍼. 그대가 피해자니 의견을 듣겠다. 그대의 어머니를 어찌하고 싶은가?”

무언가를 기대하는 초록색 눈동자를 보며 참 뻔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폐하. 저는 어머니가 없습니다. 저기 꿇어앉아 있는 건 범죄자들 뿐이니 법대로 처벌해 주세요.”

“몰그란 부인을 지하 감옥에 가둬라.”

“넬리! 이 배은망덕한 것! 내가 널 가만히 둘 줄 알아?”

살인 공모에, 사기 결혼, 신분 위조까지 합쳐졌으니 아마 무사히 살아남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날 죽이려던 사람을 동정할 필요는 없었기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몰그란 부인을 빤히 보던 에트킨 부인이 여왕님에게 일렀다.

“혀를 자르셔야겠는걸요.”

여왕님이 고개를 끄덕이자 수행인과 기사 한 명이 몰그란 부인을 따라갔다.

알현장이 다시 조용해졌다. 여왕님은 자포자기한 듯 늘어진 게드너와 다른 증인들도 모두 내보낸 뒤 데본더스에게로 갔다.

그녀의 검이 데본더스의 어깨에 걸쳐졌다.

“분명 네 입으로 나를 두려워한다고 하지 않았나?”

“폐하. 억울합니다. 다른 것은 제가 시킨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절대 궁…….”

별안간 라이오넬이 망토로 내 몸을 휘어 감으며 품으로 끌어당겼다. 동시에 주변에서 찢어지는 비명이 울렸다.

“명심하도록. 이스탈타 궁전을 더럽힐 수 있는 것은 오직 왕뿐이다.”

“저런. 중요한 말인데. 데본더스 경은 못 듣고 저승으로 간 것 같네요.”

여왕님과 에트킨 부인의 목소리가 여상스럽게 비명 사이를 파고들었다.

소름이 끼쳐 라이오넬의 품에서 한참이나 몸을 웅크리고 있다가 그가 놓아준 후에야 고개를 돌렸다.

데본더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나 바닥에는 피가 흥건했다.

에트킨 부인은 손수건으로 여왕님의 얼굴을 닦아 주고 있었고, 그 뒤로 실신한 몇몇 귀족들이 보였다.

라이오넬이 망토를 벗어 바닥에 내려놨다.

“재판은 끝났다. 떠나고 싶은 자들은 떠나도 좋다.”

여왕님의 목소리와 피에 젖은 망토가 무겁고 질척한 소리를 내며 추락하는 소리가 겹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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