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홀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라이오넬은 겨울의 날카로운 냉기를 망토처럼 두르고 천천히 아델하르트에게 다가갔다.
한숨도 자지 않고 말을 타고 달려왔기에 눈 밑은 거뭇했고 머리는 흐트러져 있었다. 막 전쟁터에서 돌아온 사람처럼 흉흉한 분위기가 풍겼다.
누가 심기를 거스르면 당장 목을 벨 것만 같았다. 귀족들은 말도 걸지 못한 채 길을 터 주었다.
“아델하르트.”
라이오넬이 억눌린 목소리로 제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이성은 끊어지기 직전이었다. 머릿속이 새하얬다.
게드너든 데본더스든 범인을 색출해 내기도 전에 전부 죽여 없애고 싶었다. 피와 살인이 지긋지긋해 전쟁터를 떠나 놓고는. 웃기는 일이었다.
그는 살심을 지울 수 없어 일부러 게드너 쪽에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넬리는 어디 있지?”
붉은 안광이 어찌나 사나운지 하마터면 사람이 많은 곳에서 넬리가 어디서 누구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전부 털어놓을 뻔하였다.
‘넬리 손을 보면 날 죽이려고 하겠는데?’
피투성이였던 그녀의 손이 떠오르자 아델하르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덕분에 두 사람의 분위기는 더없이 싸늘해 보였다. 아델하르트는 굳이 분위기를 환기하지 않고 형식적인 미소를 머금었다.
“일단 복장부터 단정히 하고 오는 게 어떻습니까, 알터우드 공작? 넬리가 돌아오기라도 했다간 그 모습을 보고 도망가겠군요.”
명백한 도발에 어디선가 헛숨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는 흥미로운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중에는 게드너의 눈빛도 섞여 있었다.
다들 한바탕 싸움이라도 벌어지길 원하는 눈치였다.
아델하르트는 보란 듯이 말을 덧붙였다.
“도망치면 나에겐 좋은 일인가? 내가 넬리에게 ‘문 없는 방’이라도 내줘야겠네. 다시는 공작에게 돌아가지 못하도록.”
순간 라이오넬의 눈빛이 다시 살벌해졌다.
주변의 귀족들도 덩달아 긴장했다. 그러나 라이오넬은 몸을 돌려 홀을 빠져나갔다.
아델하르트는 남모르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문 없는 방’에서 만나자는 제 말뜻을 못 알아듣고 주먹이라도 날리면 어쩌나 했는데, 의도대로 잘 전달된 모양이었다.
그러나 주변의 걱정스러운 시선은 사라지지 않았다.
“왕자님, 괜찮으시겠어요? 알터우드 공작의 눈빛이 심상치 않던데 절대 단둘이 있지 마세요.”
“하하하. 그래야겠습니다. 만약 제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면 알터우드 공작이 범인이겠군요.”
“농담으로라도 그런 무서운 말씀 마세요.”
아델하르트는 귀족들을 적당히 상대하며 게드너를 보았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고 있던 그가 아델하르트에게 고개를 까딱여 인사하고는 홀을 나갔다.
* * *
데본더스는 라이오넬보다 하루 늦게 수도 인근에 있는 제 저택에 도착했다.
사용인들이 모두 나와 줄을 맞춰 서서 허리를 숙였다.
데본더스가 그 사이를 지나자 현관 앞에 서 있던 집사가 그에게 다가와 인사를 하고 중요한 일들을 알렸다.
“주인님. 여왕님께서 찾으신다는 전언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게드너 남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급한 게 아니면 궁전으로 가면서 이야기하지.”
“예.”
데본더스는 방으로 돌아가 궁전으로 갈 준비를 했다.
밖으로 나오자 집사가 응접실에 있는 게드너를 현관으로 불러왔다. 데본더스가 마차에 오르고, 게드너는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마차가 출발하자 게드너가 조심스럽게 상황을 알렸다.
“일이 좀 어긋났습니다.”
원래 계획은 넬리가 밖으로 나왔을 때 납치하는 것이었다.
그녀를 가둬 놓는 동안 몰그란 부인이 넬리인 척 위조된 장부를 사업장에 가져다 두고 돈을 넬리의 공공 금고에 넣는다.
게드너가 랜더스 공에게 그 사실을 알려 수사가 시작되면 가둬 두었던 넬리를 죽여 자살로 위장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되었다면 그녀의 죽음에 의심을 품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넬리 페퍼가 밖으로 나오지 않아 궁전에서 납치를 시도했습니다.”
데본더스의 표정은 좋지 않게 변했다.
납치에 실패해 넬리 대신 하녀를 데려왔다는 대목에서는 얼굴이 완전히 구겨졌다.
계획이 완전히 틀어져 버린 것이다.
“그래서 하녀와 넬리 페퍼는 지금 어디 있지?”
“그게…….”
게드너가 말끝을 흐리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도망쳤습니다.”
데본더스가 마차 벽을 쾅 내리쳤다.
“방심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일을 그르쳐?!”
“죄송합니다. 하지만 넬리 페퍼와 하녀를 감시할 인원이 너무 적어서…….”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하는 건가?”
계획을 완벽하게 통제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인원으로 움직여야 한다. 하지만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소수 정예를 10명 넘게 쓸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런 배려를 받고도 일을 엉망진창으로 만든 것이다.
게드너는 데본더스의 화난 기색을 살피고 서둘러 수습한 것을 보고했다.
“그래도 현재 상황은 괜찮습니다. 몰그란 부인을 이용해 자작극으로 꾸며 놨고, 돈도 하녀의 이름으로 된 공공 금고에 넣어 하녀를 공범으로 엮을 수 있게 해 두었습니다.”
“라이오넬이 올라오면 의심할 테니 그 전에 처리해.”
“그는 이미 올라왔습니다.”
데본더스가 혀를 찼다. 그러자 게드너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저희보다는 아델하르트 왕자를 의심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어째서?”
“넬리 페퍼가 아델하르트의 사택 쪽으로 도망쳐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라이오넬 공작도 수도에 사람이 있을 테니 그 사실을 전해 들었겠죠.”
“저가 없는 사이에 왕자가 넬리 페퍼를 가로채려 했다고 생각하는가 보군.”
아델하르트는 가면무도회에서부터 넬리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였고, 올라온 뒤에도 둘이 종종 시간을 가졌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둘은 퍽 친밀해 보여 아델하르트가 넬리를 짝사랑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질투에 눈이 멀어 생각이 편협해졌나?’
데본더스는 픽 웃었다. 어쨌든 상황은 생각만큼 나쁘지 않았다.
랜더스 공이 넬리에게 사형을 내리면 좋겠지만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라이오넬은 죄인인 넬리 페퍼를 더는 제 곁에 두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넬리 페퍼의 대단한 두뇌도 쓰지 못하고, 라이오넬은 망하게 되겠지.’
게드너의 계획을 아는 증인들만 잘 처리하면 아직 그들이 유리했다.
“몰그란 부인을 죽여야겠군.”
“이미 수도를 떠나 어디 있는지 찾아야 합니다. 허락하시면 제가 처리해 두겠습니다.”
데본더스는 안절부절못하는 게드너를 보았다. 그는 이미 일을 망쳤다. 그 역시 처리해야 하는 증인이었다. 하지만 데본더스는 티 내지 않고 지시했다.
“아니. 넬리 페퍼가 궁전으로 돌아올지도 모르니 너는 그때를 대비하는 데에 집중해. 몰그란은 내가 따로 사람을 보내도록 하겠다.”
“예, 데본더스 님.”
데본더스는 라이오넬이 돌아오자마자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에 대해 들으며 궁전으로 들어왔다.
그는 게드너와 헤어져 주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알현실로 향했다.
“아까 알터우드 공작님 눈빛 봤어요?”
“분노할 만하죠. 공작님이 없었을 때 페퍼 경이 왕자님하고만 붙어 다녔잖습니까.”
“그런 데다가 랜더스 전하의 돈을 횡령하고 자취를 감췄으니. 어쩌면 왕자님이 페퍼 경을 숨겨 줬다고 생각할지도 몰라요.”
“왕자님 암살이라도 당하시면 어쩌죠?”
데본더스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안 그래도 게드너를 버리면 쓸 패가 필요했는데, 잘되었다. 아델하르트 왕자와 라이오넬이 치정으로 얽혀 서로를 향한 악감정이 극에 달했다면, 이것을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라이오넬을 무너지게 할 수도 있겠군.’
그러면 넬리 페퍼 따위는 어찌 되든 상관없으니 왕자에게 줘 버리면 된다.
그가 비리고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걷고 있을 때, 에트킨 부인이 다가왔다.
“어서 오세요, 데본더스 공.”
“에트킨 부인. 폐하께서 부르셨다고 해서 왔습니다. 알현실에 계십니까?”
“아니요. 공을 만나기엔 폐하가 너무 바쁘셔서요. 제가 대신 왔어요. 재미있는 일이 생길 테니 한 달간 궁전에서 머물라고 하시던데요.”
궁전에 머물면 왕자와 접촉하기 더 쉬울 것이다.
때마침 이런 제안이 들어오다니, 데본더스는 하늘이 자신을 돕는다고 생각하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방을 배정받자마자 암호를 이용해 저택에 기별을 넣었다.
[몰그란 부인을 죽여라.]
그리고 찾아서 처리하겠다는 답변을 받자마자 하인에게 물었다.
“라이오넬은 어디 있지?”
“듣기로는 홀에 나타난 뒤로 궁전을 떠나 종적을 감췄다고 합니다.”
라이오넬이 있었다면 마음껏 행동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신과 아델하르트가 손잡으려는 것을 안다면 대비를 했을 테니까.
“정말 하늘이 돕는군.”
그는 가벼운 걸음으로 아델하르트에게 향했다.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던 아델하르트가 형식적인 미소를 띠며 데본더스를 맞았다.
“오랜만입니다. 데본더스 공.”
데본더스는 아델하르트의 맞은편으로 갔다. 그가 자리에 채 앉기도 전에 아델하르트가 불쑥 말을 꺼냈다.
“저를 찾아오시다니 별일이군요. 제가 데본더스 공의 조카와 싸웠다고 꾸짖을 생각이십니까?”
불쑥 적대적인 느낌이 들었다. 데본더스는 오히려 만족스러웠다.
‘왕자는 나와 라이오넬 사이에 있던 일을 모르겠지.’
대외적으로 데본더스와 라이오넬은 친밀한 사이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적대적이지도 않았다.
그러니 데본더스를 향한 적의는 라이오넬을 향한 적의와 마찬가지였다. 어쨌거나 그는 알터우드가의 사람이니 말이다.
“설마요. 혼내도 라이오넬을 혼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델하르트가 재미있는 말을 들은 사람처럼 큰 소리로 웃었다.
“어떻게 혼내실 생각입니까?”
“감히 왕자님께 대들었으니 그 벌로 가진 것을 전부 빼앗을 생각입니다.”
데본더스가 하인이 내온 차를 마셨다. 그러면서도 붉은 눈동자로는 연신 아델하르트의 얼굴을 살폈다.
그는 아델하르트의 얼굴에서 ‘이래도 되나’ 싶은 기색을 읽어 냈다.
‘저렇게 망설이니 여태 라이오넬을 못 죽였지.’
그는 라이오넬을 향한 아델하르트의 오래된 증오를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공을 들여 그렇게 만든 것이니 의심하지도 않았다.
‘조금만 부추기면 나와 손을 잡겠지.’
물론 데본더스는 끝까지 아델하르트의 편에 있을 생각이 없었다.
‘라이오넬을 처리한 뒤에 왕자까지 엮어 둘 다 없애 버려야겠군.’
그는 속내를 숨기며 짐짓 아이를 달래듯 말했다.
“저는 왕자님이 원하는 것을 압니다.”
아델하르트가 말해 보라는 듯 눈짓했다.
“폐하께 인정받는 것과 라이오넬에게 복수하는 것. 그리고 넬리 페퍼.”
아델하르트는 놀란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데본더스가 말한 세 가지 중에 아델하르트가 원하는 것이 무려 한 가지나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진심으로 제 능력을 폐하께 인정받고 싶었다.
그 마음이 표정에 드러나자 데본더스가 오만한 미소를 머금은 채 등받이에 편안하게 몸을 기댔다.
“저는 그 세 가지를 왕자님께 전부 드릴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