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 * *
시야를 가리던 천이 홱 벗겨졌다.
눈앞에 보기 싫은 얼굴이 있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황급히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나와 비슷한 처지의 메리가 방 한쪽 구석에 묶인 채 쓰러져 있었다.
“으읍!”
메리를 부르고 싶은데 재갈 때문에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묶인 몸을 움직여서라도 메리에게 가려는데 몰그란 부인이 내 어깨를 발로 눌렀다.
나름 반항이랍시고 몸을 비틀었다. 묶여 있어서인지 위력은 형편없었다.
몰그란 부인이 내 어깨를 밀 듯이 짓밟아 바로 눕혔다.
그리고 내 앞에 쪼그려 앉아 나와 똑같은 색의 눈동자로 적선하듯 안타까워하는 시선을 던졌다.
“그러니까 내가 찾아갔을 때 잘 대해 줬으면 좀 좋니?”
“으으읍, 으읍, 으부붑!”
“아무한테도 말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내가 알터우드 공작의 장모 될 사람인데. 만나게 해 줬어야지. 나는 네 엄마잖아.”
장모긴 누가 장모야. 그리고 어떤 엄마가 딸을 납치하는 데에 가담해?
노려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지금은 묶인 상태니 심기를 건드려서 좋을 게 없다.
조금만 참자. 조금만.
눈을 질끈 감자 가볍게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렸다.
“뭐, 이제 와 이게 다 무슨 소용이겠니.”
움직이는 소리에 눈을 떴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내려다봤다.
“곧 죽을 건데.”
그게 무슨 소리지? 죽는다니?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몰그란 부인의 시선은 문 쪽을 향해 있었다. 내가 소리를 내며 꿈틀거리자 그녀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여 속삭였다.
“내가 일을 끝마치고 나면 너를 시계탑에서 떨어트릴 거라고 했단다. 자살로 위장해야 일이 깔끔하게 끝나니까.”
더 자세하게 설명해 주길 바랐지만 몰그란 부인은 그대로 방을 나가 버렸다.
납치범들의 의도를 깊게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어차피 끝이 죽음일 텐데 지금 고민해서 뭐 하겠어. 살고 싶으면 몸을 움직여야지.
묶인 발을 꼼지락거려 구두를 벗었다. 안에서 작은 눈썹 칼이 떨어졌다.
손으로 칼을 잡고 일단 메리에게로 다가갔다.
“으읍, 으읍!”
입이 막힌 채로 메리를 부르며 발로 그녀의 다리를 툭툭 흔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메리가 앓는 소리를 내며 눈을 떴다.
그녀는 나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턱짓으로 몸을 돌리라는 신호를 보냈다. 금세 알아들은 메리가 내게 등을 보였다.
나는 메리와 등을 맞대고 손에 든 칼날을 움직였다. 서걱, 서걱. 밧줄 잘리는 소리가 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메리가 밧줄을 풀어냈다.
그녀는 재갈부터 제거하고 눈썹 칼을 받아 들었다.
“넬리 님.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울음기 가득한 목소리가 조용하게 속삭였다. 오히려 내가 하고 싶은 말이라 필사적으로 고개를 휘저었다.
메리가 훌쩍이는 소리를 내며 내 손목을 풀어 주었다.
나는 다리부터 풀고 재갈을 빼냈다.
“그런 말 말아요. 내가 더 미안한걸요. 나 때문에 험한 일 당했잖아요.”
메리가 눈물을 흘리며 몸을 웅크렸다. 나는 그녀를 토닥이면서도 문 쪽을 살폈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곧 아델하르트가 우리를 찾으러 올 거예요.”
그가 아는 것이라고는 최초 접선 장소뿐이었지만 믿는다.
다른 곳으로 끌려왔으니 사실 그가 나를 찾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믿는다. 사병을 써서라도 수색해 줄 거야.
마음을 가다듬으려고 노력하며 방을 살폈다. 방 안은 그야말로 텅 비어 있었다. 문을 제외한 유일한 탈출구인 창문은 판자로 막혀 있었다.
틈새 너머로 창밖을 내다봤다. 높이는 3층 정도 되어 보였고 정확한 위치는 가늠하기 어려웠다.
“메리. 여기가 어딘지 알아요?”
메리가 고개를 저었다.
일단 납치범을 잡아서 정보를 알아내야겠다. 혹시나 하나 더 챙긴 단도가 남아 있을까 싶어 몸을 더듬어 봤다.
당연하게도 없었다. 주변에도 무기로 쓸 만한 건 없었다.
기껏 해 봐야 우리가 풀어 놓은 밧줄 같은 게 다였다. 이걸로 뭘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할 때였다.
문밖에서 누군가 크게 혼잣말로 욕설을 내뱉는 소리가 들렸다.
“넬리 님.”
고개를 돌리자 메리가 밧줄을 들었다.
“들어오면 제가 뒤에서 덮칠 테니까, 검을 빼앗으세요.”
“……알겠어요.”
메리는 문이 열리는 쪽 벽에 바짝 붙었다. 나는 그 반대편 벽에 붙었다. 남자의 목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묶어 놨음 됐지 뭘 자꾸 확인하라고 지랄이야, 지랄은. 그 재수 없는 여자는 또 언제 오는 거고.”
곧 문이 벌컥 열렸다. 남자가 들어옴과 동시에 나는 문을 닫았고, 메리는 뒤에서 밧줄을 휘둘러 남자의 목에 걸었다.
“컥!”
남자가 뒤로 넘어지자마자 검을 빼앗았다. 그리고 남자의 가슴팍에 시퍼런 날붙이를 가져다 댔다.
사람을 찌를 용기는 없지만 그 사실을 들키면 끝이다. 손이 떨리지 않게 검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죽기 싫으면 조용히 뒤 돌아요.”
남자가 몸을 굴리자 메리가 남자의 팔을 뒤로 끌어 묶었다. 그리고 재갈을 가져와 입을 막고 발목도 단단하게 묶어 두었다.
메리는 긴장이 풀린 건지 힘이 빠진 건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있었다. 나는 일단 낑낑거리며 남자를 최대한 문에서 멀리 떨어트려 놓았다.
“이제부터 내가 하는 질문에 고갯짓으로 대답해요. 거짓말하면 재미없어요!”
남자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몇 명이나 있어요? 내가 말하는 숫자보다 많으면 끄덕이고 적으면 저어요. 맞으면 ‘읍!’ 하는 거예요.”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어보니 시내와 그리 멀지 않은 곳이고, 남자까지 총 4명이 있는 모양이었다.
햇볕이 들어오는 방향을 보니 7시쯤 된 것 같았다. 사람들이 돌아다닐 시간이니 여기만 빠져나가면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
“넬리 님. 저는 도망치는 데 방해만 될 거예요. 혼자 나가셔서 사람을 데려와 주세요.”
“그럴 순 없어요.”
내가 메리를 두고 도망가면 그녀는 인질로서의 가치를 잃게 된다. 그러면 납치범들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죽일 것이다.
“같이 나가요. 애당초 메리를 구하러 왔는걸요.”
“넬리 님…….”
“울면 더 지쳐요. 뚝 하세요, 뚝!”
일부러 밝게 말하자 그녀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문에 귀를 가져다 댔다. 밖에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걸 확인하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바로 네모난 나선형의 계단이 보였다. 우리가 탈출을 시도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는지 망을 보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메리도 최대한 조용히 내 뒤를 따라왔다. 계단이 돌이라 삐걱거리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우리는 곧 2층 방문 근처까지 내려왔다.
어떤 방 문 앞을 지나는데 안에서 저열한 농담을 내뱉으며 낄낄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새끼 왜 안 내려와?”
“혼자 재미 보고 있는 거 아니야?”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메리의 손을 잡았다. 그녀도 긴장했는지 내 손을 힘주어 맞잡았다.
그렇게 막 문을 지나치려는 순간이었다. 안에서 들리는 말에 순간 발이 얼어붙었다.
“올라가 보면 알겠지.”
등줄기에 소름이 끼쳤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등 뒤에서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내 한 남자가 거친 목소리로 소리쳤다.
“제길 저것들 뭐야!”
뒤쫓는 발소리가 위협적이었다. 잡히면 죽는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숨이 턱 끝까지 차 목구멍이 아플 지경이었지만 멈출 순 없었다. 메리도 거친 숨을 토해 내며 바짝 따라왔다.
대문이 점점 가까워졌다. 나는 살려 달라고 소리칠 준비를 하며 문을 힘껏 밀었다.
그 순간,
-철컥!
문 너머에서 커다란 자물쇠가 흔들리는 듯한 소리가 났다.
그리고 문은 열리지 않았다.
“아악!”
잡고 있던 손이 휙 빠지며 메리의 비명이 들렸다.
뒤돌자 남자가 메리의 머리채를 잡아당기는 게 보였다. 도와주기도 전에 메리가 들고 있던 단검을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당황한 남자가 물러난 틈을 타 메리를 끌어당겨 내 뒤에 세웠다.
벽을 등지고 서서 다가오는 남자들을 바라봤다.
한 명은 검을, 한 명은 도끼를 들고 있었다. 분명 4명이 있다고 했는데 내려온 사람들은 이 두 명이 다였다.
다른 한 명은 위에 묶어 둔 남자를 구하러 간 걸까?
‘사람이 더 모이면 탈출 확률은 그만큼 줄어들 거야.’
두 사람만 있을 때 도망쳐야 한다. 주변에 사람이 충분히 드나들 수 있을 만한 창문이 있긴 했다.
하지만 남자들과의 간격이 그리 멀지 않았다. 창문을 넘어갈 때 누구 하나는 반드시 붙잡힐 것이다. 혹은 창문을 열기도 전에 붙잡히든가.
내가 도망칠 궁리를 하고 있을 때, 남자들은 우리를 죽일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냥 해치우자고.”
“시간을 맞춰야 한다잖아.”
“귀찮게 그런 걸 왜 맞춰야 하는데? 그냥 죽여 버리면 대충 도망갔겠거니 생각하겠지.”
도망갔다고 생각한다는 건, 무슨 말이지?
고개를 기울이면서 슬금슬금 창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남자 둘은 여전히 실랑이 중이었다.
“시체가 보여야 마음이 편하다잖아. 돈 받고 하는 일이면서 뭔 말이 그렇게 많아.”
“닥쳐 봐.”
“설마 계집애 둘 제압할 실력도 없는 거냐?”
“할 테니까, 닥치라고!”
죽이겠다는 남자가 씩씩거리며 다가왔다.
“그래도 팔이나 다리 하나 못 쓰는 건 상관없겠지?”
떨고 싶지 않은데 몸이 떨렸다. 검 손잡이를 꽉 쥐었지만 알고 있다.
제대로 휘두르지도 못하고 제압당할 게 뻔했다.
‘어떡하지? 창문 넘는 거라도 시도해 볼까?’
검을 앞으로 겨눈 채로 슬금슬금 움직이는데 남자의 등 뒤, 멀리 떨어져 있는 복도에서 별안간 몰그란 부인이 들어왔다.
“저는 할 일 끝냈어요. 이제 죽여도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