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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제발 좀 망하세요 (109)화 (109/130)

109화

* * *

게드너는 결단코 살면서 지금만큼 당황한 적이 없었다.

넬리가 깨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뿐더러, 의자를 휘두를 거라고는 더욱 예상하지 못했다.

거기다 살려 달라며 고래고래 소리치다니.

벌벌 떨면서 아무 말도 못 할 줄 알았는데. 이건 마치 납치를 예상하고 마음의 준비를 끝낸 사람 같지 않은가?

‘알터우드 공작령에서 있던 모든 일을 넬리 페퍼가 꾸몄다는 걸 잊고 있었군.’

어쩔 수 없었다. 보고받은 게 있어도 넬리 페퍼를 마주하면 엄청난 지략가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귀여운 인상이라 그런지, 어딘가 허술해 보여서인지, 툭하면 화들짝 놀라 도망쳐 버려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냥 만만해 보였다.

게드너는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켰다. 동시에 넬리가 문을 열고 도망쳤다.

따라가 봤을 때 그녀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도망간 거야.’

게드너는 욕지거리를 삼켰다.

넬리 페퍼가 소란을 피웠으니 곧 기사들이 몰려올 것이다.

그는 손을 더듬어 얼굴에 쓴 복면을 확인했다.

다음을 기약할 순 없다. 어떻게 해서든 넬리 페퍼를 밖으로 끌어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숨은 곳부터 알아내야 한다.

금방 사라졌으니 근처에 있을 것이다. 침입에 놀랐으니 안정을 얻기 위해 본능적으로 아는 사람을 찾아갔을 가능성이 크다.

‘바로 옆이 하녀의 방이었던가?’

게드너가 메리의 방으로 향하려 할 때였다.

문이 벌컥 열렸다. 숄을 걸친 메리가 게드너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복면을 쓴 괴한을 보고 당황한 그녀가 다급하게 문을 닫으려 했으나 게드너의 움직임이 빨랐다.

그는 문을 밀치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 힘에 밀려난 메리가 뒤로 넘어졌다.

게드너는 문을 발로 닫고 메리의 목에 칼을 가져다 댔다.

그녀는 겁에 질려 목소리도 나오지 않는 듯 몸을 떨며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게드너가 넬리에게 바랐던 반응이었다.

“조용히 내 말에 따라.”

메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게드너는 안을 훑어봤다. 넬리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실망할 것 없었다. 어지간한 귀족들은 하녀 한 명 사라진 것으로 눈 하나 깜짝하지 않겠지만 넬리 페퍼는 다르다.

그녀는 망나니들까지 공들여 개과천선 시킬 정도로 영지민을 아꼈다. 그러니 저를 모시던 하녀가 사라지면 반드시 찾으려 할 것이다.

게드너는 메리의 입에 손수건을 뭉쳐 집어넣고 재갈을 물렸다. 그리고 그녀를 책상으로 끌고 갔다.

“펜 들어.”

메리가 벌벌 떨리는 손으로 펜을 들었다.

“내가 부르는 대로 따라 적어. ‘하녀를 살리고 싶다면 내 지시에 따라.’”

그는 메리의 필체가 담긴 종이를 접어 품에 넣었다. 겁에 질린 메리의 목을 졸라 기절시키고 주변을 둘러봤다.

기사들이 오고 있을 테니 메리를 지금 들고 나갔다간 마주칠 게 뻔했다.

그는 가장 만만한 벽장을 열어 봤다. 검소하게 산다는 소문과 달리 긴 드레스들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옷 뒤에 숨으면 보이지 않겠어.’

그는 메리의 눈을 가리고 팔다리를 묶어 벽장 안에 넣어 놨다.

방 밖이 여전히 고요한 걸 확인하고 방문을 활짝 열었다. 멀리서 발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게드너는 재빨리 벽장으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곧 기사들이 들이닥쳤다. 하지만 문이 열려 있었기에 누가 숨어 있을 것이라고 의심하지 않았다.

게드너의 의도대로였다.

“하녀는 페퍼 경과 함께 도망친 것 같습니다.”

그들은 형식적으로 방을 둘러봤다. 침대 밑을 확인하고 테라스 밖을 보았다.

벽장 문도 열어 보았으나 게드너를 발견하진 못하고 그대로 문을 닫았다.

“여기는 됐다. 흩어져서 다른 방을 수색해. 없으면 정원으로 나간다.”

“예, 알겠습니다.”

기사들이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게드너는 잠시 숨을 죽이고 있다가 살짝 문을 열었다. 그는 메리가 쓴 쪽지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정원이 소란스러워졌을 때, 그는 사람이 드문 통로를 이용해 몰그란 부인과 만났던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데본더스가 심어 둔 기사들의 도움을 받아 그녀를 밖으로 빼돌렸다.

그가 향한 곳은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버려진 종탑이었다.

“성공한 건가요?”

문을 열고 들어가자 먼저 와 있던 몰그란이 벌떡 일어나 다가왔다.

그녀는 게드너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메리의 얼굴을 확인하고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 넬리가 아니잖아요.”

게드너는 대답하지 않고 메리를 구석에 던져 놓았다.

“넬리 페퍼는 반드시 하녀를 찾으러 올 겁니다. 그녀가 자리를 비웠을 때 몰그란 부인은 맡은 일을 하면 됩니다.”

“알겠어요.”

게드너는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렸다. 당황한 몰그란 부인이 그를 붙잡았다.

“그냥 가시려고요?”

“지금 궁전을 수색하고 있을 겁니다. 오래 자리를 비우면 의심받습니다.”

“그럼 저건 어쩌고요?”

“고용한 놈들이 오기 전까지 부인이 맡으십시오. 가끔 묶어 놓은 게 헐거워지지 않았나 살피면 됩니다.”

대답도 듣지 않은 채 게드너는 궁전으로 돌아갔다.

게드너의 방은 소란이 벌어진 곳과 거리가 있기에 그가 돌아오고 시간이 좀 지난 뒤에야 조사가 시작되었다.

게드너는 대충 조사에 임하고 날이 밝는 대로 다시 몰그란 부인을 찾아갔다.

“몰그란 부인. 얼굴을 가리고 이 내용을 대필가에게 작성하게 하십시오.”

“알겠어요.”

몰그란 부인이 면사를 눈 밑에 둘렀다. 하관을 모두 가린 그녀는 넬리 본인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그녀는 게드너가 건넨 종이를 받아 들고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자 게드너는 단검을 들고 메리에게로 향했다. 그는 겁에 질린 눈동자를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

메리의 눈동자가 새빨갛게 충혈돼 눈물에 젖었을 때, 게드너가 메리의 목을 향해 팔을 휘둘렀다.

머리카락이 붉은 핏방울과 함께 칼바람을 이기지 못한 낙엽처럼 추락했다.

* * *

“찾았어요?”

아델하르트가 안으로 들어오며 고개를 저었다.

반쯤 일으켰던 몸에 힘이 빠졌다. 아델하르트가 내 옆에 앉아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안 쓰는 방까지 모두 찾아봤는데 없었어.”

“비밀 통로나 숨겨진 방은요?”

“폐하께서 믿을 만한 사람을 시켜 살피실 거야. 궁전을 소란스럽게 했다고 화가 좀 나신 모양이거든.”

평소라면 폐하께서 화가 나셨다는 말에 벌벌 떨었을 텐데. 지금은 메리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제 탓이에요. 그때 메리를 데리고 도망쳤더라면…….”

“숨기도 전에 잡혔겠지.”

차라리 그게 나았을 수도 있다. 나를 노린 것이었으니 잡혀가도 내가 잡혀가야 했다.

위협만 당했던 나도 이렇게 무서운데 메리는 도대체 얼마나 무서울까. 생각하니 눈물이 터질 것만 같았다.

나는 입술을 악물고 가장 유력한 용의자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게드너 남작의 짓이 확실해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조사해 봐도 수상한 점이 안 나와서 문제지만.”

숨이 턱 막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힘이 잔뜩 들어간 주먹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아델하르트가 나를 위로했다.

“그래도 궁에 있는 사람들 전부 조사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으니까, 곧 뭔가 단서가 나올 거야.”

“사용인들은 그렇다고 쳐도, 하녀 한 명 때문에 신문을 받는 건데 귀족들이 제대로 협조해 줄까요?”

“폐하가 명령하신 일이니까 괜한 불똥을 피하려면 적극적으로 협조하겠지.”

사실 잘 믿기지 않았다.

귀족이 사라진 것도 아니고 하인 하나가 없어진 건데 여왕님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서실 리가 있나?

내 표정이 안 좋아 보였는지 아델하르트가 말을 덧붙였다.

“귀족이 사라졌으면 오히려 이렇게 나서지 않으셨을 거야. 힘없고 무고한 사람한테 비교적 약하시거든.”

그러고 보니 여왕님이 제일 신경 쓰시는 게 기아 문제라는 걸 들은 적이 있다.

귀족한테만 냉철하다고 생각하니 좀 안심이 되었다. 그렇다고 마냥 앉아서 기다리는 게 마음이 편하진 않았지만 말이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없을까요?”

“안전하게 기다리는 거?”

분위기를 풀어 주려는 듯 아델하르트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항상 그린 것처럼 완벽하던 미소가 오늘은 조금 어색해 보였다.

“나는 일이 있어서 가 봐야겠다. 저녁때 들를게. 기사들 배치해 뒀으니까 혼자 다니지 말고.”

“알겠어요.”

그가 나를 짧게 다독인 뒤 방을 나갔다.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좀처럼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인데 손 놓고 가만히 있어야 한다니.

‘비참해.’

코를 훌쩍이며 눈을 비볐다. 침대로 들어가 베개를 끌어안았다.

라이오넬이 절실했다. 그의 품이, 온기가 필요했다.

라이오넬이 있었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차라리 그를 따라가는 게 나았을까?

그의 체취가 다 빠진 베개에 얼굴을 문지르다가 벌떡 일어났다.

‘씻자. 씻고 뭐라도 해야지.’

내 방에 몰래 들어왔던 괴한의 특징이라도 떠올려 보자. 그러면 잡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까.

몸을 씻고 밖으로 나왔다. 괴한을 떠올리기도 전에 하인이 찾아왔다.

“수사관님이 물어볼 게 있으니 모셔 오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수사관에게 갔다. 그는 당시 상황에 대해 자세하게 물었다.

체계적인 질문에 답하다 보니 혼자 떠올리려고 했을 때보다 더 어제 일이 더 자세하게 기억났다.

‘체격이 게드너 남작과 비슷한 것 같았어. 설마 본인인가?’

수사관에게 괴한의 체격을 자세하게 설명한 뒤 은근슬쩍 게드너를 언급했다.

“참고하겠습니다.”

신문이 끝나자마자 방으로 돌아왔다.

인상착의를 적어 아델하르트에게 괴한 찾는 것을 도와 달라고 해야겠다. 내가 정체를 알아내서 신고하는 것보다는 왕자인 아델하르트의 말이 더 신빙성 있을 거야.

책상 앞에 앉아 메모할 준비를 했다. 그런데 종이가 보이지 않았다. 항상 책상 위에 두고 문진으로 눌러 놨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하인이 치웠나?’

의아해하며 책상 서랍을 열자 종이 뭉치가 들어 있는 게 보였다.

하지만 나는 차마 종이를 꺼낼 수가 없었다.

종이 뭉치 위에는 잘린 머리카락이 산화된 피와 얽혀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던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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