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 * *
몰그란 부인은 허름한 여관방에 혼자 남아 다리를 떨고 있었다.
라이오넬이 영지로 돌아가는 날, 게드너가 지시를 내렸다.
그녀는 몰그란 저택으로 돌아가는 척 가문의 마차를 요란하게 수도 밖으로 내보냈다.
연락은 줄 때까지 없는 사람처럼 숨어 있으라는 말에도 순순히 따랐다.
그렇게 기다린 지 벌써 3일째가 되어 가고 있었다.
‘넬리를 처리할 생각은 있는 거야?’
몰그란 부인은 좁은 방 안을 뱅글뱅글 돌다가 얼굴을 가린 채 궁전 근처까지 갔다.
눈치를 살피던 그녀는 병사에게 돈과 함께 쪽지를 쥐여 주었다.
“이것 좀 게드너 남작에게 전해 주게.”
후드 사이로 보이는 복식과 말투를 확인한 병사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몰그란 부인은 다시 여관으로 들어가 기다렸다.
해가 지고 늦은 저녁 시간이 되어서야 누군가 여관방의 문을 두드렸다. 몰그란 부인은 벌떡 일어나 문을 열었다.
“벌써 며칠이나 기다렸는지 알아요?”
안에 들이지도 않고 대뜸 따지는 그녀를 보며 게드너가 한숨을 삼켰다.
그는 몰그란 부인을 밀어 놓고 안으로 들어갔다. 부인이 게드너를 뒤따르며 신경질적으로 나무랐다.
“이러다 공작이 돌아오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뭉그적거리는 거죠?”
“저도 기회를 보고 있습니다.”
게드너 역시 죽을 맛이었다. 라이오넬만 없으면 쉽게 넬리 페퍼를 끌어낼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모든 게 오산이었다.
넬리 페퍼는 라이오넬이 있을 때보다 더 몸을 사렸다.
식사는 여왕이나 에트킨 부인과 함께했다.
게드너는 왕국의 지배자와 궁전의 실세가 있는 자리에 감히 독을 쓸 정도로 용감하지 않았다.
납치나 습격도 불가능했다.
방에 꿀단지라도 숨겨 놓은 오소리처럼 도무지 나오질 않았다.
‘좀처럼 틈이 있어야지.’
한 번은 여왕님이 부른다는 핑계로 끌어내 보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잘 따라오다가 뭘 펼쳐 보더니 돌연 여우를 본 토끼처럼 변해 내빼 버리더란다.
안 그래도 겁 많은 사람이 소심함을 영혼까지 끌어다 경계하니 잡을 방법이 없었다.
“여러 가지 시도해 봤는데 전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피로 회복제 사업장에는 나올 거 아니에요?”
“안 나옵니다.”
게드너가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는 넬리의 공포심을 자극해 궁지로 몰 생각이었다.
어떤 날은 종일 따라붙다가 어떤 날은 신경도 쓰이지 않게끔. 그렇게 반복하다 보면 게드너와 마주치지 않는 날에는 방심할 것이다.
그때를 노릴 생각이었는데, 라이오넬이 떠난 날부터 넬리는 사업장에 나오지 않았다.
휘두를 기회조차 주지 않겠다는 의도가 명백했다.
“그럼 어떻게 하겠다는 거죠?”
몰그란 부인이 날카롭게 물었다. 대답이 성에 차지 않으면 당장에라도 저택으로 돌아가겠다는 투였다.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다면, 방이 안전한 곳이 아니라는 걸 알려 드려야겠습니다.”
* * *
나는 도망치듯 방으로 들어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손에 쥔 쪽지를 꼭 움켜쥐고 심호흡을 하고 있자 메리가 따뜻한 차를 따라 주었다.
“넬리 님. 왜 그러세요?”
“이상한 사람 따라갈 뻔했어요. 메리도 누가 부른다 그러면 쪼르르 따라가면 안 돼요!”
메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안심이 되지 않았다.
좀 전에 한 하녀가 찾아와 여왕님이 부른다고 말했다. 식사 시간에 몇 번 본 적 있는 얼굴이라 그녀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영지에서 왔다는 쪽지를 확인하려던 차였기에 그대로 들고 하녀를 따라갔다.
그러다 문득 손에 쥔 쪽지를 열어 봤다.
[넬리 님이 위험합니다. 내려오지 마십시오. R.D.]
레반스에게서 온 쪽지였다. 정신이 번쩍 들어 주변을 둘러봤다. 와 본 적 없는 복도였다. 사람도 많지 않았다.
나는 앞서가는 하녀를 두고 곧장 뒤돌아 뛰었다.
무섭게 쫓아오던 하녀는 내가 사람이 많은 곳으로 들어가자마자 몸을 돌려 사라졌다.
숨 고를 틈도 없이 방으로 돌아오긴 했으나 아직도 간담이 서늘했다.
가슴을 쓸어내리고 구겨진 쪽지를 펼쳤다. 내용이 궁금했는지 메리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나는 그녀에게 쪽지를 보여 주었다.
“이거 영지에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죠?”
“네.”
“라이오넬에게 돌아오라고 할 방법 없을까요?”
“출발한 지 이틀이나 지났으니 따라잡을 순 없을 거예요.”
한숨밖에 안 나온다. 내려오지 말라는 게 단순히 나 때문이면 좋을 텐데. 영지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건 아닐까?
‘일단 몸을 더 사려야겠어.’
식사할 때 빼고는 절대 밖으로 나가지 말아야지.
그 다짐을 실행한 지 며칠이 지났다.
누워 있어도 잠이 오지 않았다. 머리만 대면 잠드는 게 일상인 나에게는 흔치 않은 경험이었다.
‘불안해.’
누군가 내 목숨을 노릴지도 모른다. 혹은 라이오넬의 목숨을 노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신경이 곤두섰다.
아주 작은 소리에도 놀라고, 그냥 지나다니는 사람들까지 의심스러워 보였다.
심지어는 메리가 주는 차조차 마음 편하게 마실 수 없었다.
‘라이오넬은 항상 이런 기분이었을까?’
전쟁에서 돌아온 뒤로도 줄곧 암살 시도가 있었다고 했으니, 그에게 불면증이 생긴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돌아오면 꼭 안아 줘야지.’
다짐하며 라이오넬이 베고 자던 베개를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잠깐 잠들었다가 바람에 창이 흔들리는 소리에 깨어나길 몇 번, 잠긴 문을 억지로 따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덜그럭, 덜그럭, 철컥.
처음에는 내가 예민한 건가 싶었다. 공포에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노력하며 실눈을 떴다.
착각이 아니었다. 검은 그림자 하나가 침대 쪽으로 소리 없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침대 옆을 확인했다. 혹시 몰라 둔 호신용 의자가 얌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괴한이 다가오며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검을 뽑으려는 동작이었다.
‘막아야 해.’
생각과 행동이 동시에 이뤄졌다. 나는 몸을 벌떡 일으켜 벌벌 떨리는 손으로 의자를 휘둘렀다.
남자가 검을 뽑다 말고 의자를 잡았다. 그리고 강한 힘으로 끌어당겼다.
나는 몸이 완전히 딸려 가기 전에 재빨리 의자에서 손을 뗐다. 남자가 반동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넘어졌다.
이때다 싶어 냅다 문을 향해 달렸다.
아델하르트와 프레르에게 납치당할 때 배운 게 있었다. 절대, 붙잡히지 말 것.
범인의 방심을 노리고 쫓아가는 건 멍청한 일이다.
“암살자다! 여기 암살자가 있어요! 살려 주세요!”
내가 이렇게 반응할 줄 몰라 당황했는지 뒤에서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있는 힘껏 소리치며 문을 열었다. 계속 비명을 지르며 무작정 달렸다.
그러다 입을 다물고 라이오넬이 알려 준 방으로 들어갔다.
‘라이오넬과 꽈당이 사이. 라이오넬과 꽈당이.’
든든한 이름을 중얼거리자 두려움이 좀 가셨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사자상과 당나귀상 사이에 몸통 박치기를 날렸다.
곧장 벽을 옆으로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으며 힐끗 밖을 봤다.
다행히 쫓아온 사람은 없어 보였다.
그제야 다리에 힘이 탁 풀렸다. 불을 켤 정신도 없었다. 기듯이 아래로 내려와 방으로 들어갔다.
반쯤 울면서 소파를 끌어 문을 막았다.
그리고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라이오넬……. 흑.”
혼자서 얼마나 훌쩍였을까, 드르륵하고 벽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무작정 쓸 만한 의자부터 찾는데 익숙한 금발이 보였다.
“넬리. 여기 있어?”
“아델하르트!”
벌떡 일어났지만 차마 그에게 달려갈 수 없었다. 주춤거리며 서 있자 그가 천천히 다가왔다.
“어디 다치진 않았지? 넬리 다쳤으면 나 엄청 욕먹을 것 같은데.”
아군인데. 라이오넬 하고도 화해를 했고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도와주러 올 거라는 말도 들었는데, 왜 이렇게 무서울까?
아델하르트가 나를 기절시켰던 게 계속 떠올랐다. 무서워서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배신하면, 가만, 가만 안 둘 거예요.”
“알겠어. 그러니까 일단 진정 좀 하자.”
아델하르트가 다가와 나를 안아 주었다.
“걱정하지 마. 이제 안전해.”
그 말을 듣자마자 울음이 터졌다.
정신없이 울고 나니 좀 진정이 되었다. 은근슬쩍 아델하르트 옷에 얼굴을 닦고 뒤로 물러났다.
“고마, 킁, 고마워요.”
“우리 사이에 뭘.”
터덜터덜 걸어 벽을 막아 놓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델하르트가 내 앞에 서서 묘한 표정으로 웃었다.
“미닫이문이라 앞을 막아도 소용 없었을 텐데.”
“심신의 안정을 위해서예요.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요.”
“소리는 잘 질렀어. 덕분에 궁전이 발칵 뒤집혔지만. 대처가 능숙하던데?”
“이미 한 번 납치당해 본 적이 있어서요.”
“하하하.”
아델하르트가 어색하게 웃고 먼저 몸을 일으켰다.
“기사들하고 초상화실 앞으로 가 있을 테니까 천천히 나와. 바로 호위해 줄게.”
“네. 부탁드릴게요.”
아델하르트가 가볍게 손을 흔들고 자기가 왔던 문을 통해 방을 나갔다.
나는 소파에 앉아 조금 더 진정하고 천천히 움직였다.
계단을 올라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여전히 초상화실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고양이 걸음으로 복도 쪽으로 가서 문에 귀를 붙였다. 몇 분이 지나자 아델하르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을 빼꼼 열자 아델하르트가 놀란 척을 했다.
“넬리. 여기 숨어 있었구나. 걱정돼서 왔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초상화실을 나왔다.
복도는 자다 깨 나온 귀족들과 순찰을 돌다 달려온 기사들로 북적였다.
“기사들이 방 근처를 지킬 테니까 안심하고 자.”
“네. 감사해요.”
눈이 마주치는 사람마다 괜찮냐고 질문했다.
어색하게 대답하며 아델하르트의 곁에 붙어 방으로 향했다. 그러면서 주변을 둘러봤다.
메리는 내 옆방에서 지내니까 비명을 들었을 텐데. 가장 먼저 뛰쳐나왔을 그녀가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다.
“아델하르트. 혹시 메리 못 봤어요?”
“못 봤는데.”
순간 불안감이 엄습했다. 나는 사람들 사이를 빠르게 헤쳐 메리의 방 문을 열었다.
방 안은 인기척 없이 휑했다. 흐트러진 이불만이 그녀가 여기에 있었다는 걸 알려 주었다.
힘이 풀리려는 다리를 겨우 이끌어 방을 살폈다.
책상 위 종이에 커다란 글씨로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하녀를 살리고 싶다면 내 지시에 따라.]
삐뚤빼뚤한 글씨가 마치 겁에 질려 있는 것 같았다.
그건, 메리의 필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