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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제발 좀 망하세요 (107)화 (107/130)

107화

아델하르트 왕자가 다른 사람에게 노골적으로 라이오넬에 대한 적의를 드러낸 것은 처음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왕자를 끌어들이고 싶지만 이미 계획이 끝난 일이었다.

괜히 어중간하게 욕심부렸다가 이도 저도 아니게 되면 곤란하다.

‘왕자에 관한 건 나중에 데본더스 님께 말씀드려야겠군. 이번 일이 성공하면 쓸모없는 정보가 될 테지만.’

게드너는 친절한 낯으로 몰그란 부인을 살폈다.

어린 나이에 넬리를 낳아서인지 모녀의 나이 차가 크게 나 보이진 않았다. 체구도 넬리와 비슷한 편이었다.

눈동자와 머리카락 색도 비슷했다. 눈매와 눈썹은 빼다 박은 수준이었다. 잘만 가리면 넬리 본인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그러니 데본더스 님도 그런 일을 계획하신 거겠지.’

게드너는 몰그란 부인의 얼굴을 한 번 더 훑어보고 선량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 당장은 왕자의 도움보다 부인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제 도움이요?”

몰그란 부인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사실 그녀는 당장 도망칠 생각이었다. 넬리에게 해를 끼치지 않겠다는 거짓말이 아델하르트에게 들통나기 전에 말이다.

“저는 몰그란 저택으로 돌아갈 생각이에요.”

“벌써 말입니까?”

마치 한 일도 없으면서 벌써 도망치냐는 투였다. 실제로도 그런 의도로 한 말이 맞았다.

속내를 알아차리지 못할 거라는 게드너의 예상과 달리, 몰그란은 분노에 찬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저는 할 만큼 했어요.”

“고작 소문 한번 내려다 실패한 거로 말입니까?”

“그럼 제가 뭘 할 수 있는데요? 제가 이렇게 될 때까지 게드너 남작은 보고만 있었죠. 심지어 데본더스 공은 저를 만나 주지도 않으셨고요.”

“그건 서로를 지키기 위한 일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말했다. 각자 하는 일이 다르니 한 사람이 걸렸을 때 얽혀서 발각되는 일을 방지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평소에도 서로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만일 게드너가 위기에 처해도 나서지 말라는 말도 들었다. 게드너 역시 그렇게 할 테니까.

몰그란 부인의 성격상 게드너를 모른 척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제 편이 하나도 없다는 건 견디기 어려웠다.

“알아요. 하지만 제가 언제까지 이 모멸감을 견뎌야 하죠?”

몰그란 부인이 손톱을 물어뜯었다.

“그 애가 모든 걸 망쳤어요. 어떻게 엄마한테, 누구 덕에 그 나이까지 먹고 살 수 있었는데!”

“맞습니다. 길바닥에 버려졌으면 진작 죽었을 텐데 은혜도 모르고. 안 그렇습니까?”

“맞아요. 생각해서 오라버니댁에 의탁하게 해 주었는데!”

“그런 배은망덕한 자를 그냥 둔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몰그란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게드너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숨을 내쉬고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이번만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성공하면 게드너의 공이 될 것이고 실패하면 몰그란 부인의 탓이 될 것이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몰그란 부인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가만히 앉아 라이오넬의 짐을 정리하는 메리를 멍하니 보았다.

라이오넬, 진짜 가는구나.

그래. 진짜로 가지 가짜로 가겠어?

내 입으로 조심히 다녀오라고 했으면서 왜 아쉬워하는 거야! 시무룩해 있으면 라이오넬이 맘 편하게 못 갈 거 아니야.

고개를 젓고 있는데 거칠고 따뜻한 손이 내 볼을 붙잡아 세웠다.

“왜 비에 젖은 다람쥐 같은 표정을 하고 있어.”

“라이오넬…….”

그건 또 무슨 표정인데요? 축 늘어지자 그가 말을 정정했다.

“비에 젖은 멋진 다람쥐.”

‘멋진’을 안 붙여 줘서 시무룩해 있는 게 아니라고요.

늘어진 몸에 도무지 활기가 생기지 않았다. 그의 허리를 끌어안자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넬리. 알려 줄 장소가 있는데.”

고개를 들자 그가 내 팔을 떼어 내고 손을 잡았다. 끌어당기는 대로 일어나 따라갔다.

밖으로 나간 그는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걸음을 옮겼다.

우리가 사용하는 방에서 왼쪽 3번째에 있는 문을 열자 역대 왕들의 초상화와 그 밑에 11자 대열로 늘어선 동물 조각상들이 보였다.

거의 다 다른 동물이었지만 사자상은 제법 여러 개가 있었다.

“여긴 왜요?”

라이오넬은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나를 안으로 끌어당겼다. 뒤를 돌아보며 웃는 얼굴이 마치 소년 같았다.

처음 보는 표정에 멍하니 끌려갔다. 그러다 라이오넬을 따라 걸음을 멈췄다.

고개를 들자 왕의 초상화가 보였다. 초상화의 양옆에는 석고로 조각된 사자상과 당나귀상이 서 있었다.

“사자와 당나귀 사이의 벽을 밀어 봐.”

뜬금없는 요구에 잠깐 고개를 기울였지만 일단 시키는 대로 했다. 하지만 여느 벽이 그렇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근력 운동시키는 거예요?”

“흐음…….”

특유의 비음을 흘리던 그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액자 아래에는 사각 프레임 모양의 장식 몰딩이 붙어 있었다. 라이오넬은 벽과 몰딩의 경계를 손으로 훑었다.

“좀 더 무게를 실어서, 다시.”

“그런다고 벽이 움직이기라도…….”

하네! 벽이 뒤로 밀렸다. 그러자 사각 프레임 몰딩과 벽 사이에 틈이 생겼다.

설마 비밀 통로 그런 건가?

가슴이 두근거려 라이오넬의 손을 꼭 잡으며 그를 보았다.

그가 웃음을 참는 듯한 얼굴로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잡은 손을 끌어 몰딩과 벽 사이의 틈으로 집어넣었다.

벽의 끄트머리가 손아귀에 잡혔다.

“옆으로 밀어.”

그의 말대로 하자 벽이 미닫이문처럼 열렸다. 그 너머로 사람 한 명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은 계단이 나타났다.

라이오넬이 먼저 그 안으로 들어갔다.

“내 기억보다 훨씬 좁군.”

그는 벽에 걸린 촛대를 빼내 부싯돌로 불을 붙이고 내게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벽 안쪽에 달린 손잡이를 잡고 문을 옆으로 밀어 닫은 뒤 다시 앞으로 밀었다. 꽉 맞물린 벽을 확인하고 라이오넬에게 다가갔다.

계단이 제법 높고 가팔랐다. 무서워 멈칫거리자 그가 내게 손을 뻗었다.

손을 맞잡자 두려움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호기심이 들어찼다.

“이게 다 뭐예요?”

“비밀 통로.”

속삭이듯 묻자 그가 속삭이듯 대답했다.

“궁전으로 도망쳤을 때 여기에 자주 숨곤 했어.”

“가정교사를 피해서요?”

“맞아. 원래는 셋만 알고 있기로 한 곳이었는데…….”

그가 답지 않게 말끝을 흐렸다. 목소리에서 씁쓸함이 묻어났다. 어떻게든 위로를 해 주고 싶은 마음에 그의 손을 끌어 입을 맞췄다.

라이오넬이 나를 돌아보며 설핏 미소 짓고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이 계단은 1층의 방과 이어져 있어.”

라이오넬이 계단 끝의 벽을 당겼다가 옆으로 밀자 제법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나는 안으로 들어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소파와 탁자, 의자, 목탄과 종이도 몇 장 있었다. 없는 것은 단 하나, 문뿐이었다.

‘열리는 벽이 어딘지 외워 두지 않으면 갇히게 생겼네!’

손이 겨우 닿을 높이에 긴 창이 있어서인지 볕이 잘 들었다. 덕분에 3면이 벽이어도 답답한 느낌은 없었다.

“아까 거기를 통해서만 들어올 수 있는 거예요?”

“통로가 한 군데 더 있어.”

그의 손끝이 텅 빈 벽을 가리켰다.

“아델하르트가 자주 사용하는 길이지. 그 녀석 방과 가깝거든.”

신기한 마음에 다가가 벽을 두드렸다. 책에서는 이러면 바로 알아차리던데. 아무리 두드려 봐도 일반 벽과 뭐가 다른지 잘 모르겠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벽에 귀를 가져다 댔다. 뒤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추억이라도 발견했나 싶어 몸을 돌리려는데 라이오넬이 뒤에서 나를 끌어안았다.

“도망치거나 숨어야 할 일이 생기면 여기로 와. 아델하르트에게 미리 말해 두었으니까, 여기서 기다리면 그 녀석이 구하러 올 거야.”

“알겠어요.”

초상화 방의 풍경을 떠올렸다. 사자상이 제법 있었지. 자칫하면 헷갈리겠다 싶어 ‘사자와 당나귀 사이’를 더 익숙한 것으로 치환했다.

라이오넬과 꽈당이 사이. 좋아. 완벽해.

“나갈 일이 있으면 아델하르트와 동행해. 아니면 전하께 호위를 붙여 달라고 하고.”

그의 품 안에서 몸을 빙글 돌려 마주 봤다. 볼을 잡고 입술에 쪽 입을 맞췄다.

“왜 그렇게 걱정이 많아요. 페하가 무서워서라도 궁전 안에서는 아무 짓도 못 할걸요.”

“그렇지.”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영지에만 신경 써요. 신속하고 안전하게 돌아오기! 약속.”

새끼손가락을 내밀자 라이오넬이 웃으며 자기 손가락을 걸었다.

* * *

라이오넬이 떠났다.

랜더스 공이 시킨 일을 할 때 빼고는 매일 붙어 있었던 탓인지 옆자리가 유난히 허전했다. 시무룩하게 처져 있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할 건 해야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청소하던 메리가 고개를 돌렸다.

“피로 회복제 사업장에 가시게요?”

“네. 아델하르트가 한가할지 모르겠네요.”

“제가 보고 올게요.”

메리가 방을 나갔다가 아델하르트와 함께 돌아왔다.

드레스 위에 망토를 두르고 나가려는데 메리가 목도리를 들고 다가왔다.

“요새 날이 추워요.”

“고마워요, 메리.”

그녀에게 인사하고 아델하르트와 그의 호위 기사들과 함께 피로 회복제 사업장으로 향했다.

집무실로 들어오자 옆에 있던 아델하르트가 한 사람을 보고 중얼거렸다.

“전하의 시종이네.”

가면무도회 때 라이오넬에게 방을 안내해 준 사람이었다. 내가 먼저 다가가 알은 척을 하자 그도 마주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넬리 님.”

“그러게요. 손에 들고 있는 건 뭐예요?”

“장부입니다. 전하께서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다고 하셔서요.”

내가 일할 때의 장부인가 싶어 괜히 신경 쓰였다. 실수라도 했으면 민망하니까.

힐끗 보는데 랜더스 공의 시종이 장부를 제 하인에게 맡겼다.

“안 그래도 오늘 전해 드릴 말씀이 있었는데 만나서 다행입니다.”

“전할 말이요?”

“네. 이제 사업체에는 안 나오셔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무슨 일인지 물을 틈도 없이 그가 인사를 하고 집무실을 나갔다.

나는 멀뚱히 서 있다가 같이 일하는 관리인에게 그의 말이 사실인지 물었다. 관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하지 않고 돌아가셔도 될 것 같습니다.”

별안간 나오지 말라니. 좀 이상하긴 하지만 궁에만 있는 게 안전하니까. 잘됐지, 뭐!

고개를 끄덕이고 아델하르트와 함께 궁으로 돌아왔다. 그는 궁전의 대문을 넘자마자 다른 사람에게 불려 갔다.

그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방으로 향했다.

조용한 복도를 걷는데 조심스러운 발소리가 뒤따라오는 것 같았다.

순간 소름이 끼쳐 홱 돌아보았다.

그러나 복도에는 그 누구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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