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뒤에서 우는 소리가 들렸지만 돌아보지 않고 나왔다.
아래로 내려오자 몇몇 사람들이 나를 힐끔거렸다. 적대적인 시선은 거의 없었다.
아델하르트 덕에 소문으로 인한 오해가 풀린 모양이었다.
‘아델하르트는 어디 있지?’
두리번거리다 보니 금세 사람이 뭉쳐 있는 곳이 눈에 띄었다. 나를 발견한 그가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왔다.
“넬리. 마차 불러 놨어.”
“고마워요.”
그와 함께 마차에 올랐다. 오래 돌아다니지도 않았는데 진이 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소문을 바로잡을 생각에 벌써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한숨을 내쉬자 창밖을 보던 아델하르트가 고개를 돌렸다.
“소문 때문에 그래?”
“네…….”
“어떻게 할 생각이야?”
“정면 돌파해야죠!”
무일푼으로 외삼촌 댁을 나와 일을 할 때도 가끔 받던 오해였다.
혼자 떠돌아다닌다는 이유로 손버릇이 나쁘니, 누굴 유혹했느니 하는 말을 많이 들었었다. 물론 진실은 없었다.
처음에는 귀찮아서 내버려 두었다. 그러자 그게 거의 기정사실이 되어 걷잡을 수 없이 퍼졌다.
그때 깨달았다. 들은 소문은 무시하면 안 된다.
최대한 간결하고 당당하게 해명해야 한다. 그래도 안 믿을 사람은 안 믿어 주지만, 오해를 줄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는데 아델하르트가 생긋 웃었다.
“도와줄까?”
“소문 해명하는 거요?”
“응. 넬리가 직접 나서는 것도 멋지긴 한데 사실 귀족들 방식은 아니거든.”
본인이 직접 말하고 다니는 건 세력이 없다고 이마에 써 붙이고 다니는 것이나 마찬가지란다.
하지만 나는 거리낄 게 없었다. 정말 세력이고 뭐고 없으니까!
그래도 이런 일은 나보다는 아델하르트가 전문일 것 같긴 한데…….
“그럼 아델하르트는 귀족의 방식으로 도와주세요. 저는 제 방식대로 수습해 볼게요.”
“좋은 생각이야.”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아델하르트는 사람을 만나야겠다면서 먼저 자리를 떠났다.
나는 혼자 궁전 안으로 들어왔다. 여전히 여기저기에서 적의 어린 시선이나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일부러 천천히 걸으며 수군거림과 비웃음을 들었다.
그리고 그중에 가장 많은 사람이 뭉쳐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페퍼 경.”
그래도 양심이 있는지 날 대하는 미소에 민망함과 껄끄러움이 묻어났다.
“횡령이나 도둑질은 한 적 없고, 이중장부는 어떻게 작성하는지 몰라요.”
“아, 그게…….”
대뜸 고백하자 귀족들이 눈에 띄게 당황하는 게 보였다.
“그리고 라이오넬이 유혹한다고 넘어가는 사람이었으면 한참 전에 유부남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건 그렇죠.”
멍하니 듣고 있던 귀족 한 명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더 궁금하신 것 있나요?”
귀족들이 헛기침만 하며 내 눈을 피했다. 그중에 한 사람이 어색하게 웃으며 내 앞에 섰다.
“페퍼 경. 미안해요. 험담을 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괜찮아요! 그냥 궁금해하시는 것 같아서 직접 말씀드리고 싶었던 것뿐이에요. 그럼, 말씀 나누세요.”
일단 겉으로 보기엔 화기애애하게 헤어졌다.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고, 이 정도 목소리 크기면 어지간한 사람은 다 들었을 것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들어가서 좀 쉬어야겠다.
다음에 차라도 함께 마시자는 사람들에게 미소로 화답하고 위로 올라갔다.
방에 들어와 침대에 드러누우니 몸이 푹 퍼졌다.
그제야 깨달았다.
‘나 긴장하고 있었구나.’
멍하니 천장을 보다가 몸을 굴려 이불을 품에 한가득 끌어안았다.
“라이오넬 보고 싶다…….”
내 혼잣말이 효과가 있었는지 라이오넬은 그가 예상한 시간보다 빨리 돌아왔다.
나는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자마자 벌떡 일어나 달려갔다.
“라이오넬!”
몸을 날려 목을 끌어안았다. 그가 나를 받아 주며 허리를 감싸 안았다. 나는 다리가 달랑 들린 채로 그에게 입을 맞췄다.
라이오넬은 입술을 떼지 않고 침대로 걸어갔다. 곧 몸이 눕혀졌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자 라이오넬이 내 위에서 내려왔다.
나는 그의 팔을 끌어다 베고 품을 파고들었다.
“무슨 일 있었나?”
고개를 끄덕이고 그의 가슴에 귀를 댔다. 따뜻한 체온과 심장 박동 소리에 기분이 좀 나아졌다.
그러고 나서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에게 전부 말했다.
라이오넬은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경청하다가 묘한 비음을 냈다.
“흐음…….”
그러더니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잠이 쏟아지려 할 때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소문과 피로 회복제 사업이라…….”
“왜요?”
“아니. 아무것도. 그것보다 내가 도와줄 일은 없나?”
“응. 괜찮아요. 이런 일 익숙하거든요.”
등을 감싼 팔에 힘이 들어갔다. 고개를 들어 보니 라이오넬이 어디가 쓰라린 사람처럼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런 일에 왜 익숙해.”
그가 한숨 쉬듯 읊조렸다. 질문이나 질타라기보다는 안타까움에 가까웠다.
그래도 말하고 싶었다. 내가 겪었던 차별과 무시, 의심, 떠돌아다니던 생활을 전부 꺼내 놓았다.
라이오넬은 가만히 들으며 가끔 입을 맞춰 주었다.
“그래도 예전에는 혼자였을 때를 떠올리기만 해도 외로웠는데, 지금은 괜찮아요.”
“그래. 이제 그대는 알터우드에 속해 있고, 곁에는 내가 있으니까.”
그 말이 지독한 고독을 녹였다.
지금 내가 받은 위안은 아마 평생 말로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았다.
* * *
“하아…….”
레반스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맞은편에 있던 리지가 몸을 움찔 떨었다.
동시에 책상에 쌓여 있던 서류가 낙엽처럼 흩어졌다. 레반스는 거의 반자동으로 리지가 흘린 서류를 주우며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레반스 님. 한숨 한 번만 더 쉬면 오늘만 벌써 15번 째예요.”
리지가 울먹거리며 말하자 레반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 죄송합니다.”
리지는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저었다.
레반스가 한숨을 쉬는 게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레반스. 광장에서 시비가 붙어 해결했고, 절도 2건, 폭행 1건 처리했다.”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레트가 불쑥 들어와 보고하고 돌아가자 레반스의 입에서 다시 한숨이 터져 나왔다.
라이오넬과 넬리가 떠나고 영지는 이주민들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보란 듯이 문제가 터졌다.
처음에는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레반스는 자는 시간을 줄여 가며 영지를 돌봤다. 리지가 오기 전에는 밤새우는 것쯤은 흔한 일이었으니 견딜 만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범죄가 늘어 갔다.
‘치안 좋은 게 큰 장점이었는데.’
이주민들과 영지민 사이에 유난히 시비가 자주 붙었다. 그저 기존 주민과 이주민들의 다툼이라고 보긴 어려웠다.
기사들 말로는 일부 이주민들이 의도적으로 시비를 걸고 다니는 것 같다고 했다.
그 외에도 전체적으로 경범죄의 비율이 확 늘었다. 잡히는 자들은 추방하고 있긴 하지만 새로 들어오는 이들 역시 같은 문제를 일으켰다.
“리지 양. 공작님께 답장은 없습니까?”
“네…….”
아직 편지 보낸 지 이틀밖에 안 됐어요. 아마 수도에 도착도 안 했을걸요.
리지는 그 말을 삼키고 레반스가 건네는 서류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때,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레반스 님! 큰일입니다!”
기껏 정리해 둔 서류가 다시 허공에 날렸다. 불길한 느낌에 레반스는 서류를 줍지 않고 톰을 보았다.
리지 역시 안절부절못하며 두 사람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사색이 된 톰이 발을 구르며 소리쳤다.
“숲에 불이 났습니다!”
레반스는 당장 집무실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성에서 나오자마자 하늘을 뒤덮을 기세로 피어오르는 연기가 보였다.
그는 당장 말을 타고 달렸다. 숲 근처에 도착하자마자 사람들을 통솔해 불을 끄고 있는 아레트가 보였다.
그 옆에는 새로 온 영지 관리인 나수스 덱스터도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이야?”
레반스가 말에서 뛰어내리듯이 내려 나수스와 아레트에게 다가갔다.
“아무래도 누가 불을 지른 것 같습니다.”
“발화점이 3곳이야.”
나수스와 아레트가 차례대로 대답했다. 레반스는 한숨을 내쉬며 제 머리를 헝클이다가 아레트에게 말했다.
“아레트. 넌 기사단으로 돌아가 있어. 무슨 일이 생기면 안 되니까.”
“응.”
레반스는 아레트가 떠난 자리에 섰다. 그리고 병사들을 지휘하고 나수스와 함께 직접 물동이를 날랐다.
해가 질 즈음에야 불길을 겨우 잡을 수 있었다.
“관리인이 되자마자 사고가 끊이질 않네요. 넬리 님이 관리인이실 때도 이랬어요?”
나수스가 그 자리에 주저앉으며 물었다. 레반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런 적은 처음이야.”
“누가 이런 걸까요?”
“알아봐야지. 나는 성으로 돌아가서 일마저 해야겠다. 남아서 뒷수습 좀 해 줘.”
“네. 고생하세요, 형님.”
레반스는 성으로 돌아가며 생각했다.
불을 고의로 지른 건 저번에도 있었다. 그때는 첩자의 짓이었다.
그리고 레반스의 예상이 맞다면 아마 이번에도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각하께서 빨리 돌아오셔야 할 텐데.’
그는 리지가 혼자 있는 사이 집무실을 박살 내 놓진 않았을까 걱정하면 문을 열었다.
리지가 울먹이는 표정으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레반스는 등골이 서늘해 집무실부터 둘러보았다.
다행히 내부는 멀쩡했다.
그러나 리지가 전해 준 소식은 전혀 멀쩡하지 않았다.
“레반스 님. 건축 자재를 납품하던 상단이 화재 때문에 망했대요.”
레반스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고 리지가 건네주는 서류를 받아 들었다.
“방금 상단의 사람이 와서 전해 주고 갔어요.”
“……리지 양. 일단 오늘은 퇴근해 보세요.”
“하지만…….”
“괜찮으니까, 어서요.”
“네.”
리지가 시무룩하게 대답하고 집무실을 나갔다.
불행이 이렇게 한꺼번에 닥쳐올 수가 있는가? 레반스는 허탈하게 웃으며 천장을 올려다봤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다른 업체를 찾아보고, 산불 피해 금액도 계산하고…….’
그가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가장 큰 불행이 문을 두드렸다.
“사람 하나 없다고 영지가 말이 아니군.”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온 데본더스가 보란 듯이 라이오넬의 의자에 앉았다.
“라이오넬이 돌아올 때까지 내가 영주 대리를 맡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