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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제발 좀 망하세요 (103)화 (103/130)

103화

* * *

잠결에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미소를 지으며 손바닥에 머리를 비비다가 눈을 떴다.

라이오넬이 완벽한 차림새로 침대에 걸터앉아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설명했다.

“폐하께 다녀올게. 국경 지대 문제로 상의할 게 있다고 하셔서.”

“폐하께요?”

“그래. 같이 가겠나?”

검을 들고 내게 걸어오던 폐하의 모습이 떠올랐다. 잠이 다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질색해 고개를 흔들자 라이오넬이 가볍게 웃으며 이마에 입을 맞췄다. 나는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언제 와요?”

“오후 늦게.”

종일 라이오넬이 없다는 뜻이었다. 아쉬웠지만 별수 없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참에 랜더스 공이 말해 준 돈이 얼마나 쌓였는지 알아봐야지. 겸사겸사 수도 구경도 해야겠다.

“조심히 다녀와요.”

라이오넬이 대답 대신 입을 맞추고 방을 나갔다.

나도 기지개를 켠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제나처럼 궁전은 어디를 가도 귀족들이 가득했다. 그런데 평소와 달리 곳곳에서 적의 섞인 눈빛이 느껴졌다.

‘무슨 일 있었나?’

뭐든 좋지 않은 일인 건 확실했다.

궁금했지만 이렇다 할 친분도 없었기에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엿듣고 싶어도 내가 다가가면 귀신같이 입을 다물어 버렸다.

‘나중에 라이오넬이나 아델하르트한테 아는 게 있는지 물어봐야겠다.’

마차를 타고 궁전 밖으로 나왔다.

사병은 궁전에 둘 수 없기에 모두 돌아간 상태였고, 메리는 따라오겠다고 했지만 얼굴이 지나치게 피곤해 보여서 쉬라고 했다.

수도에 온 지 며칠이 흘렀지만 시내로 나온 적은 처음이었다.

광장이 영지의 광장의 3배는 되어 보였다.

알터우드 공작령도 사람이 늘 테니 광장을 늘리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공공 금고를 찾아갔다.

그리고 내 이름 앞으로 쌓여 있는 금액에 넋을 놓고 말았다.

“이거, 서류가 잘못된 것 같은데요.”

“아닙니다.”

사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금고에는 이미 천만 단위의 돈이 쌓여 있었다.

얼마 전, 하사품 목록에서 한적한 곳에 위치한 작은 저택이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와는 또 다른 충격이었다.

“출금하시겠어요?”

이 돈을 진짜 내가 써도 되는 걸까?

내 이름으로 들어 있긴 한데……. 일단 그냥 두자.

사양하고 밖으로 나왔다. 커피 하우스에 앉아 종이에 적혀 있던 무시무시한 숫자들을 떠올리는데 누가 내 이름을 불렀다.

“페퍼 경.”

저 경이라는 호칭은 도무지 적응이 안 된다. 차라리 아가씨 소리를 듣고 말지!

진저리를 치면서 고개를 들자 어수룩한 미소의 남자가 보였다.

저번에 랜더스 공의 티 파티에서 나에게 정강이를 차였던 남자였다.

“게드너 남작.”

“하하하. 기억해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기억할 수밖에. 돌아오는 길에 데본더스의 사람이니 주의하라고 몇 번이나 라이오넬이 주의를 주었으니까.

웃음으로 무마하자 그가 아주 자연스럽게 내 앞에 자리를 잡았다.

“안 그래도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었습니다.”

나랑 할 이야기가 뭐가 있다고. 고개를 기울이자 게드너가 선량한 미소를 지었다.

“들어 보니 제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던데요.”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피로 회복제에 쓰이는 빨간 열매, 커빈 열매를 좀처럼 대량으로 구하기 힘들어 생산 개수를 통제하고 있었다.

“마침 제가 이번에 구매한 땅에 커빈 나무숲이 있었습니다.”

“음. 그러시군요.”

사업장으로 가면 바로 거래 계약을 체결할 수 있을 텐데 왜 나에게 온 걸까?

일을 배우고 가끔 장부 작성을 맡기도 했지만 나에겐 아무런 권한도 없었다.

고개를 기울이자 게드너가 진짜 용건을 꺼냈다.

“거래하기 전에 견학을 해 볼 생각인데, 페퍼 경이 함께 가 주셨으면 합니다.”

이건 무슨 수작일까?

“죄송해요. 그날 약속이 있어서요.”

“하하하. 재미있는 분이시군요. 저는 아직 날짜를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네! 알아요.”

내 말에 게드너의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가 묘하게 비틀렸다.

그럼 뭐, 당신이 데본더스의 사람인 걸 아는데 만나자 그러면 냉큼 만나 줄 줄 알았나?

도망갈 기회만 엿보는데 게드너가 머쓱한 얼굴로 웃었다.

속으로 투덜거리며 차를 한입에 털어 마셨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마자 게드너가 손을 뻗었다. 동시에 옆 테이블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하하!”

이 웃음소리. 익숙하다.

“아델하르트?”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우연이지?”

말투를 보니까 미행한 것 같은데.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봤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우연 맞아요?”

“사실 미행했어.”

게드너도 있는데 너무 솔직하게 말하는 거 아니야?

그의 표정을 살피려다 눈이 정통으로 마주치고 말았다.

“두 분께서는 가까운 사이이신가 봅니다.”

“내가 일방적으로 추근대고 있지. 알터우드 공작령을 버리고 내 밑으로 들어오면 좋겠다 싶어서 말이야.”

아델하르트가 게드너를 향해 생긋 웃었다.

“그러니 게드너 남작이 좀 빠져 주겠어? 넬리와 할 이야기가 있는데.”

게드너는 잠시 눈치를 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그럼, 페퍼 경.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거절하기도 전에 게드너가 떠나 버렸다.

나는 그가 사라진 방향을 보다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게드너가 앉았던 자리를 아델하르트가 차지했다.

나는 주변에 잘 안 들리도록 소곤거리며 물었다.

“라이오넬하고 사이 안 좋은 척하는 중이잖아요. 나랑 이러고 있어도 돼요?”

“그래서 그러는 거야. 걔는 연기를 못해서 진짜 열 받게 만들어 줘야 하거든.”

아델하르트가 웃으며 차를 주문했다.

주변에 귀족들이 꽤 있었기에 인사하겠다며 찾아올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조용했다.

자세히 보니 아델하르트의 호위들이 주변을 드문드문 에워싸고 있었다.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줄 알았는지 사람들은 이쪽을 힐끔거리기만 할 뿐 다가오지 않았다.

정작 나는 그와 잡담이나 나눴지만 말이다.

“아! 맞다. 오늘 궁전에서 나오는데 분위기가 좀 이상하더라고요.”

“음? 어떻게?”

“약간 저를 적대하는 것 같았어요. 혹시 뭐 아는 거 있어요?”

“아마 소문 때문일걸.”

또 소문이라니. 반응을 보니까 좋은 소문 같아 보이지도 않던데.

한숨을 내쉬는데 아델하르트가 탁자에 팔꿈치를 올리고 턱을 괬다.

“그런데 몰그란 자작 부인과는 무슨 사이야?”

딱히 정의할 말이 없었다. 나는 그 여자를 어머니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 여자도 내게 어머니 역할을 하지 않았으니까.

“달갑지 않은 사이에요.”

“그래 보여. 몰그란 부인이 넬리에 대해 안 좋은 소문을 퍼트리고 다니거든.”

“어떤 소문이요?”

“적나라하게 말해 줘?”

“네. 그래야 대응하기 편해요.”

그는 몰그란 부인의 입에서 직접 나온 소문부터 다른 사람의 입을 거치며 파생된 소문까지 쭉 나열했다.

미담밖에 없었던 저번 소문과 달리 이번 소문은 악담밖에 없었다.

‘내 소문은 왜 이렇게 극단적이지?’

속으로 허탈하게 웃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려 줘서 고마워요.”

“우리 사이에 뭘.”

인사하고 헤어질 생각이었는데 그가 나를 따라나섰다.

“어디 가려고?”

“경고하려고요.”

“같이 가 줄게.”

“네!”

내 편이 한 명이라도 더 있으면 든든하겠지.

고개를 끄덕이고 큰 걸음으로 그 여자가 있는 고급 여관을 향해 걸어갔다.

안으로 들어가자 아델하르트는 금세 사람들에게 둘러싸였다. 그는 빠져나올 생각이 없는지 그냥 둘러싸여 있었다.

든든할 일이 사라졌다. 나는 그를 두고 빠져나와 시종을 불렀다.

“몰그란 부인께 넬리 페퍼가 왔다고 전해 주세요.”

내 말에 주변이 잠시 조용해졌다.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지만 너무 많은 말소리가 섞여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잠시 기다리자 위로 올라갔던 시종이 내려왔다.

“204호실로 모셔 오라고 하십니다.”

시종을 따라가며 아델하르트를 돌아보았다. 그는 나를 향해 걱정하지 말라는 듯 웃어 보였다.

그냥 사람들을 뿌리치지 못해 둘러싸여 있는 게 아니라 소문을 정정해 오해를 풀어 주려던 거였나보다.

다시 든든해진 아델하르트를 뒤로하고 시종을 따라 올라갔다.

도어 노크를 두드리자 금방 문이 열렸다.

“어서 오세요, 페퍼 경.”

하녀가 몸을 비켜서며 공손하게 인사했다. 가볍게 화답하고 안으로 들어가자 몰그란 부인이 한걸음에 달려와 내 손을 붙잡았다.

“넬리. 와 줄 줄 알았단다.”

그녀는 적의라고는 눈곱만치도 보이지 않는 얼굴로 나를 소파로 이끌었다.

그리고 귀한 차와 과자들을 전부 꺼내 놓았다. 지나친 환대였다.

이쯤 되면 찾아오라고 소문을 퍼트린 게 아닌가 싶었다.

혹시 함정에 빠진 건가? 독이 들었던 딸기 콩포트 푸딩이 생각나 일부러 차와 쿠키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라이오넬 공작님과 함께 왔으면 더 반가웠을 텐데. 다음엔 꼭 모시고 오렴.”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나는 몰그란 부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경고하려고 온 거거든요.”

“뭐?”

“제가 도둑이니 손버릇이 나쁘니 하는 소문 내는 거, 멈춰 주세요. 앞으로는 험담도 하지 마시고요.”

“…….”

“제 친모인 게 밝혀지면 곤란하신 거 알아요.”

“그건!”

몰그란 부인이 반쯤 벌떡 일어섰다.

나는 그녀가 다시 자리에 앉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말을 이었다.

“저는 부인을 제 어머니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서 구태여 알리지 않은 거예요.”

“그래서, 지금 협박하는 거니? 사기 결혼한 걸 들키기 싫으면 입 다물고 있으라고?”

“네. 맞아요.”

“어떻게, 어떻게 엄마한테 그럴 수가 있니?”

“부인께서 하신 건 딸에게 할 짓이고요?”

그녀는 대꾸하지 못하고 드레스 자락만 움켜쥐었다. 노려보는 얼굴에 눈물이 그렁그렁했지만 당연하게도 동정심은 일지 않았다.

“그냥 서로 없는 사람처럼 살아요.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요.”

“그럼 나는? 내 입지는! 네가 다녀간 뒤로 내가 입을 다물면 사람들이 나를 뭐라고 생각하겠니?”

“악의적으로 헛소문이나 퍼트리는 사람 정도로 생각하겠죠. 하지만 부인께서 자초한 일이니 감내하셔야죠.”

“넬리, 너 정말……!”

“어떤 게 부인께 도움이 되는 선택일지 아시리라 믿을게요. 안녕히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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