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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제발 좀 망하세요 (102)화 (102/130)

102화

슬쩍 짜증이 밀려 올라왔지만 보는 눈이 많아 일단 참았다.

“몰그란 부인.”

“오랜만이구나. 그러고 보니 감사 인사를 못 했네. 말도 없이 찾아갔는데 잘 대접해 주어 고맙구나.”

말을 건 이유가 너무 뻔했다. 보나 마나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나와의 친분을 과시하려는 거겠지.

“뭘요. 차 한잔 대접했을 뿐인데요.”

몰그란 부인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몇 번이나 문전 박대당한 기억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기분 상한 김에 더 말 걸지 말고 떠나가 주면 좋겠다.

아니야. 뭘 떠나 주길 기다려. 내가 가면 되지.

고개를 돌려 라이오넬을 보았다. 그는 차가운 눈으로 몰그란 부인을 보고 있었다.

가자고 하려는데 몰그란 부인이 다시 말을 걸었다.

“신년 무도회 기간 동안 궁전에서 머물 거니?”

“네.”

“나는 주변 고급 여관에서 머물 예정이란다. 주소를 남겨 줄 테니 차 마시러 오렴.”

“아니요. 괜찮아요.”

정중하게 거절하고 라이오넬의 손을 잡았다.

그가 내 손을 맞잡으며 나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좀 더 무례하게 대해도 돼.”

“랜더스 공께서 보고 계시는데 어떻게 그래요.”

“랜더스 공도 무섭나?”

“잘못하면 목이 뎅강이잖아요!”

라이오넬이 웃음을 터트렸다. 좀처럼 소리 내 웃는 사람이 아니어서 그런지 경악 어린 시선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괜히 얼굴이 뜨거워 라이오넬을 데리고 도망치듯 방으로 돌아왔다.

* * *

하루에 몇 시간씩 피로 회복제 생산장에 나가 일을 배웠다.

재료를 공수하는 방법부터 이윤을 어떻게 남기는지, 어떻게 유통되는지 등의 관한 내용이었다.

장부를 작성하는 거는 이미 익숙한 일이라 따로 배울 게 없었다.

며칠 지나자 생산장에서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지 감독하는 일도 가끔 맡기곤 했다.

일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다만 여기가 수도라는 게 문제였다.

“넬리 님.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에트킨 부인이나 랜더스 공 같은 높으신 분들이 툭하면 나를 불러 댔다. 심지어 오늘은 폐하이시다.

다른 사람이 불렀으면 핑계라도 대 볼 텐데!

축 처져서 일어나자 라이오넬이 내 손을 잡았다.

“같이 갈까?”

“……제발요.”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란히 걸었다.

“얼굴 보기가 힘들어. 이럴 줄 알았으면 수도로 오지 않는 건데.”

“폐하께서 꼭 오라고 하셨다면서요.”

“내가 왜 영지를 키우고 있는지 잊었나?”

“말을 안 들어서?”

“잘 아는군.”

라이오넬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내 옆 이마에 입을 맞췄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 알현실에 도착했다.

폐하를 다시 뵌다고 생각하니 벌써 오금이 저렸다. 마른침을 삼키며 문이 열리는 걸 지켜보았다.

주변에 일렬로 늘어선 기사들이 보였다.

원래 이런가? 분위기가 좀 흉흉해 보이는 것 같은데.

라이오넬을 힐끗 봤으나 그의 얼굴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 모습을 보니 조금 안심이 되는 것 같았다.

천천히 걸어 들어가자 에트킨 부인과 아델하르트가 보였다.

아델하르트가 팔을 내린 상태에서 짧게 손을 흔들었다. 전혀 심각해 보이지 않았다.

좋아. 걱정할 필요 없겠어!

“넬리 페퍼는 무릎을 꿇어라.”

걱정…… 해야 하나?

라이오넬을 볼 새도 없이 다리에 힘이 풀려 툭 무릎을 꿇었다.

갑자기 왜? 나 혹시 뭘 잘못했나? 무릎 위에 공손히 올려놓은 손이 덜덜 떨렸다.

그러자 옆에서 라이오넬이 앉는 게 느껴졌다. 혹시 나를 위해 용서라도 빌려나 싶어 고개를 돌려 보았다.

한쪽 무릎을 굽혀 앉은 그가 속삭였다.

“넬리. 그렇게 말고 한쪽 무릎만 굽혀 앉아.”

그의 말을 따라 엉거주춤 자세를 고쳤다.

고개를 들자 아델하르트와 에트킨 부인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틀어 웃음을 참고 있는 게 보였다.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 폐하께서 검을 들고 다가오셨, 잠깐, 검?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

“넬리 페퍼.”

“예, 폐하.”

대답하는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그대를 남작으로 임명한다.”

“살려 주…… 네?”

여왕님이 들고 온 검이 내 양어깨에 순서대로 닿았다.

“여전히 담이 작군. 일어나도 좋다.”

라이오넬이 내 팔을 잡아 일으켜 세워 주었다. 갑자기 왜 작위를 받은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차마 여왕님을 멀뚱히 쳐다볼 수 없어서 제일 만만하고 뭔가 알고 있을 것 같은 아델하르트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대답은 여왕님 입에서 나왔다.

“내가 아나벨라와 랜더스를 시켜 두 번이나 원하는 것을 물었는데 답이 없더군.”

떠보려는 질문이 아니라 진짜 원하는 것을 물어보는 것인지 몰랐다.

“그대가 워낙 욕심이 없기에 내가 편한 것을 내려 주기로 했다.”

“감사합니다, 폐하.”

“쓸모없는 걸 받았다는 표정이군.”

마침 ‘작위가 필요한가?’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뜨끔했다.

“곧 임명장과 하사품 목록을 전달하겠다. 물러가라.”

“예, 폐하.”

인사를 올리고 라이오넬과 함께 알현실을 빠져나왔다.

문에서 조금 멀어지자마자 나는 라이오넬의 팔을 붙잡았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그대가 치하받을 만한 일을 하긴 했지.”

“그래도 갑자기 작위라니.”

멍하니 중얼거리는데 뒤에서 우아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요. 공작의 연인이면 평민인 것보다는 귀족인 게 나으니까요.”

에트킨 공작 부인이 다가와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그리고 저쪽에도 하나를 줬으니 이쪽에도 하나를 줘야죠.”

저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고민하는 사이에트킨 부인은 의미심장한 미소만 남기고 사라졌다.

* * *

“넬리 페퍼가 작위를 받았다면서요?”

“왜 안 받나 싶었어요. 총애도 받고 있고 능력도 있잖아요.”

“원래도 귀족의 핏줄이었다던데요. 가세가 기울어서 그렇지.”

“남작이 되었으니 신분의 벽도 사라졌네요. 이러다가 정말 알터우드 공작 부인이 되는 거 아닌지 몰라요.”

“미리 줄부터 서 둬야겠어요.”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나벨라 에트킨은 상석에 앉아 그 대화들을 모두 듣고 있었다.

말을 보태진 않았지만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이끌었다.

그럴수록 한 사람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에트킨은 흥미진진하다는 표정을 가리고 몰그란 부인에게 말을 걸었다.

“몰그란 부인. 아까부터 표정이 좋지 않네요.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몰그란 부인은 깜짝 놀라 손에 든 쿠키를 떨어트렸다.

초대받긴 했으나 에트킨이 말을 걸어 줄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당황하긴 했으나 그녀는 발언권을 얻은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사실 조금 염려스러워서요.”

에트킨 부인이 찻잔으로 미소를 감췄다.

다른 귀족들이 몰그란 부인에게 뭐가 염려스러운지 앞다투어 물어봤다.

“넬리 그 아이, 사실 제 오라버니의 집에 의탁해 있을 때 손버릇이 안 좋아 몇 번 호되게 혼났거든요.”

“세상에.”

“그게 사실인가요?”

모든 시선이 몰그란 부인에게로 쏠렸다. 그녀는 희열에 가슴이 뻐근해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네. 그 이유 때문에 쫓겨난 것이나 마찬가지랍니다. 그 뒤로 종종 소식을 들었는데 일을 하면서도…….”

그녀는 말을 멈추며 곤란하다는 듯 미소 지었다.

“어쩐지. 저번에 몰그란 부인이 티 파티에서 말을 걸었을 때 싸늘하다 싶었어요.”

“부인께서 비밀을 알고 있어서 그랬던 거군요.”

“순진해 보이던데, 의외네요.”

“사람을 어떻게 겉모습만 보고 알겠어요?”

험담하며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이런저런 나쁜 추측이 몰그란 부인이 내뱉은 말에 달라붙었다.

안 좋은 소문이 커지자 몰그란 부인의 안색이 조금 안 좋아졌다.

‘폐하께서 넬리를 아낀다는 말이 있던데. 에트킨 부인은 폐하의 사람이니 나를 안 좋게 보시면 어떡하지?’

힐끔거리다가 눈이 마주치자 에트킨 부인이 생긋 웃었다.

그제야 몰그란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녀는 좌불안석한 기색을 지우며 게드너의 말을 떠올렸다.

‘넬리 페퍼가 혹시라도 몰그란 부인이 사실 자신의 어머니라고 말하면 큰일입니다. 그 귀족 사회에서의 신뢰를 떨어트려 놓아야 합니다.’

그의 말이 옳다. 미리 선수를 쳐 넬리의 말을 아무도 안 믿게 만들어 놓아야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다.

딸에 대한 죄책감은 없었다. 그런 게 있었다면 어린 딸을 무참히 버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에게 조금만 살갑게 대했어도 이런 일을 없었을 텐데. 넬리, 이건 다 네 탓이란다.’

그녀는 적극적으로 대화에서 목소리를 냈다.

“사실 거짓말도 능숙해서, 혹시 누가 속지 않을까 걱정이에요.”

몰그란 부인이 한마디를 던지면 여러 말들이 따라붙었다.

“수확량이 늘어난 것도 장부를 조작한 게 아닐까요?”

“관리인이니까 어려운 일도 아니죠.”

“어쩌면 알터우드 공작도 작정하고 유혹했는지 몰라요.”

“그렇네요.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그 얼음장 같던 분의 관심을 끌었겠어요.”

하지만 대화는 한 쪽으로만 흘러가지 않았다.

“다들 너무 억측이 심하신 것 아닌가요? 폐하가 어떤 분이신데 고작 거짓말에 속으시겠어요?”

“그러니까요. 알터우드 공작의 의심병도 유명하잖아요. 페퍼 남작이 그런 사람이면 곁에 두지도 않으셨을걸요.”

“어머. 그건 또 그렇네.”

듣기만 하던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자 전세가 다시 기울었다.

“어디서 들은 건데, 몰그란 부인. 저번에 알터우드 공작가를 찾아가셨다가 문전 박대를 당하셨다면서요?”

“저도 얼핏 듣기는 했는데. 혹시 그거에 앙심 품고 일부러 안 좋은 소문을 퍼트리시는 건 아니겠죠?”

몰그란 부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수치심에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그리고 애써 웃으며 반박했다.

“아니에요. 차도 대접 받았는걸요.”

“그럼 더욱 이해가 안 되네. 연락도 없이 찾아온 이에게 차를 내어 줬는데 뒤에서 이런 말을 하다니.”

몇몇 사람이 그녀에게 아니꼬운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다.

단순한 투기로 사람을 깎아내린다고 생각한 탓이었다. 사실이었으나 그녀는 분했다.

‘이게 다 넬리 때문이야. 그 애가 내 앞에 나타나지만 않았다면 이런 취급을 당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주변에 있던 몇몇 사람들이 몰그란을 위로했으나 그녀의 귀에는 이미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드레스를 움켜쥔 손이 증오로 바들바들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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