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새로 계획을 짜고 있는 거예요?”
“틀은 비슷해.”
“라이오넬하고 레반스 둘이서 감당하긴 좀 힘들지 않을까요?”
라이오넬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관련해서 상의할 게 있어.”
“뭔데요?”
의자를 끌고 와 그의 옆에 앉았다. 그가 펜을 내려놓고 다리를 꼬았다.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할 자세라 나도 경청하겠다는 뜻으로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웃음을 터트리고 내 볼에 입을 맞췄다.
“곧 바빠질 거야.”
“네. 각오하고 있어요.”
반드시 사람을 더 뽑아야 한다는 각오를 하고 있었다.
라이오넬은 여전히 낯선 사람을 많이 경계한다. 그러니 사람을 뽑자고 제안해도 쉽게 받아들이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포기하면 관리소는 1년 내에 공동묘지가 될 게 분명하다.
‘그때 독을 먹지 않았어도 얼마 못 가서 과로로 죽었을 거야.’
일단 라이오넬의 얼굴을 보지 말자. 완벽한 얼굴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약해지니까!
눈 마주치지 말고 사람을 더 뽑자고 강하게 밀어붙…….
“사람을 더 뽑는 게 좋겠는데.”
잘못 들었나? 라이오넬이 먼저 이런 제안을 할 리가 없는데.
“혹시 제가 속마음을 입 밖으로 내뱉었나요?”
라이오넬이 고개를 흔들었다.
“일이 많아지면 그대가 쓰러질 것 같아서.”
“그건 그렇죠.”
이번엔 부정할 수 없었다.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라이오넬이 먼저 새로운 사람을 들이자고 제안하니 오히려 걱정스러웠다.
“그런데, 라이오넬은 괜찮겠어요?”
그가 설핏 웃으며 내 볼을 쓰다듬었다. 커다랗고 따뜻해서 볼을 기대는 것만으로도 걱정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자신이 과로사 했다고 착각할 정도였는데, 그냥 두고 본다면 연인이라고 할 수 없지.”
다정한 목소리와 애정이 흐르는 눈빛은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다. 좀 무뎌져야 심장이 무사할 수 있을 텐데.
이러다 심장에 알통 생기는 거 아니야?
쓸데없는 생각으로 애써 심장을 진정시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보좌관도 더 두는 게 좋겠어요. 라이오넬 요즘 너무 무리하는 거 같아서 저도 여, 연인으로서 걱정스러…….”
라이오넬이 내 목소리를 잡아 먹으며 입을 맞췄다. 안 그래도 졸린데 숨 쉬는 것마저 힘들어지자 정신이 몽롱해졌다.
내 움직임이 눈에 띄게 둔해졌는지 라이오넬이 입을 맞댄 채 미소 지었다.
“아직 이야기가 덜 끝났는데.”
목덜미를 콱 깨무는 느낌에 깜짝 놀라 눈을 번쩍 떴다. 야릇하고 짓궂은 미소가 보였다.
“자기가 시작 했으면서.”
그에 입에 짧게 입을 맞추고 다시 경청하는 자세를 취했다.
반면에 라이오넬은 진지해질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는 내가 앉아 있는 의자 팔걸이를 양손으로 잡고 허리를 숙여 닿는 곳마다 입을 맞췄다.
“새 관리인이 올 거야. 미리 적당한 자를 물색해 놨으니 오래 걸리진 않겠군.”
“네?”
잠이 확 달아나 라이오넬을 밀어냈다.
그의 양 볼을 붙잡고 얼굴을 내 앞까지 끌어왔다. 장난치는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나를 내쫓으려는 건 아닐 테니, 관리인을 두 명으로 만들어서 업무를 분담하게 하려는 건가? 하지만 이제껏 이런 일은 없었는데?
라이오넬이 영입한 사람이면 분명 유능할 것이다. 새로 온 관리인과 비교당하면 어쩌지?
아니, 어쩌면 이미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한 사람을 더 데려오는 건가?
“저로는 부족한가요?”
라이오넬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뭐야. 왜 얼굴을 붉혀! 정곡을 찔려서 그런가? 정말 나를 해고할 셈인가?
오랜만에 그를 노려보자 그가 웃음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보좌관도 더 들일 생각인데, 그대가 맡아 줬으면 해.”
“너무 갑작스러운데…….”
“그대라면 잘할 거야. 유능하니까.”
“그건 복수 실패의 잔해물 같은 거라니까요.”
어깨가 저절로 축 처졌다.
라이오넬이 기운 내라는 듯 내 어깨를 어루만졌다.
“그대는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버릇이 있어.”
프레르에게도 들었던 말이다. 그렇지만 딱히 공감되진 않았다.
혹시 나랑 조금이라도 더 붙어 있고 싶어서 그런가? 아니야. 그건 내가 원하는 거고.
“과거로 오기 전까지의 기간을 다 합치면 햇수로 곧 5년 차이니 승진을 할 때도 되었지.”
“그건 그렇죠.”
“영지 사정이 어떤지 잘 알고, 성실하고, 계산도 느리지 않고, 서류와 장부 정리도 깔끔해.”
역시. 라이오넬이 사적인 감정으로 사람을 뽑을 리 없지.
“무엇보다 보좌관이 되면 종일 얼굴을 볼 수 있을 테니.”
있구나!
“어때? 보좌관이 되는 거.”
목소리가 너무 달아서 누가 들으면 청혼하는 것으로 오해할 지경이었다. 어물쩍거리자 그가 손끝으로 내 턱을 쓸어 올렸다.
“넬리. 지금 대답해 줘.”
나는 반쯤 홀려 고개를 끄덕였다.
“할게요.”
라이오넬이 미소 띤 얼굴로 짧게 입을 맞추고 자기 의자에 앉았다.
멍한 눈을 깜빡이며 안경을 쓰는 그를 바라보다가 깨달았다.
잠깐. 보좌관이면 일이 더 많지 않나?
관리인이야 영지 내부 사정에만 빠삭하면 되지만, 보좌관은 외부 사정도 잘 알아야 하는데?
나는 레반스의 얼굴을 떠올렸다.
사악한 요정에게 정기를 쏙 빼 먹힌 것처럼 핼쑥해진 미소가 눈앞에 떠다니는 듯했다.
‘설마 나……. 지금 미인계에 당한 건가?’
에이. 그래도 애인을 부려 먹기 위해 미인계를 썼겠어? 내가 자기 얼굴에 약한 것도 아는데!
그럼. 그럴 리가 없지.
……없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2주 후. 아레트의 동생이 관리인으로 오고 난 뒤 집무실에 내 책상이 생기고 나서야 깨달았다.
‘라이오넬은 그저 노예가 한 명 더 필요했을 뿐이었어!’
당연한 말이지만 연애 놀음이나 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퇴근 시간에 맞춰서 일을 끝내려면 빠듯하게 일해야 했다.
그렇다고 당장 퇴근하는 것도 아니었다.
내 퇴근을 막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라이오넬이 하루도 빠짐없이 야근하고 있었기 때문에 혼자 방에 들어가 쉬는 게 미안했다.
내 일이 끝나고도 남아서 라이오넬을 돕거나 소파에서 잠이 드는 날이 많았다.
무서운 건 내가 잠들고 일어났을 때도 라이오넬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라이오넬. 지금 서류랑 바람피우는 거죠.”
그가 나에게 잠시 시선을 주었다가 설핏 웃고는 다시 종이를 본다.
진짜, 누가 라이오넬 애인인지 모르겠네. 종이 쪼가리에 질투를 느끼게 될 줄이야!
이대로 두면 안 되겠어.
내 질투도 질투지만 라이오넬의 건강이 더 걱정이다. 마지막으로 자는 모습을 본 게 이틀 전이었다. 그것도 고작 4시간이 전부였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박력 있게 서류를 뺏었다. 그리고 그의 의자를 홱 돌려 안경을 벗겨 냈다.
“우리 자요!”
잠깐 굳었던 라이오넬이 양손을 포개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나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턱에 조금 힘이 들어간 것 같기도 했다.
서류 뺏어서 화났나? 조심스럽게 서류를 다시 돌려주었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
“무슨 의미로 한 말이지?”
“자자는 뜻이죠.”
“……여기서?”
“아니요. 침대에서!”
라이오넬이 팔걸이에 몸을 기대며 고개를 틀어 손바닥으로 입가를 덮었다.
왜 저러고 움직이질 않지? 고민하는 건가?
좀처럼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모습이 신선했다. 동시에 피곤해서 두뇌 회전이 느려진 건가 싶어 좀 짠하기도 했다.
‘강제로라도 방으로 데려가서 재워야겠어.’
그의 손을 무작정 끌어당겼다. 라이오넬이 반항하지 않고 순순히 끌려왔다.
나는 그의 방으로 향하면서 집사님을 불렀다.
“죄송한데 집무실 정리 좀 해 주시겠어요?”
“네. 맡겨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집사님이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항상 라이오넬이 못 자는 걸 걱정했으니까, 집사님은 내 편일 수밖에!
의기양양하게 라이오넬의 방 문고리를 잡는데 그가 멈춰 섰다.
“넬리. 잠시만.”
“왜요?”
“괜찮겠어?”
무슨 의미로 묻는 건지 모르겠다.
“안 괜찮을 일이 있나요?”
석상처럼 굳어 있는 라이오넬의 팔을 양손으로 붙잡고 끌어 기어이 침대까지 데리고 갔다.
얼마나 잠을 못 잤는지 가볍게 툭 밀었는데도 견고한 몸이 침대 위로 허물어졌다.
이상하게 눈빛이 더 또렷해진 것 같긴 하지만. 오면서 잠이 깼나?
눈을 깜빡이는데 그가 팔꿈치로 뒤를 디뎌 상체를 일으키려 했다. 다시 라이오넬을 눕히려다가 손을 붙잡혔다.
“앗!”
라이오넬이 깍지 낀 손을 강하게 잡아당기는 바람에 나도 옆에 같이 눕게 되었다.
고개를 돌리자 라이오넬이 반쯤 일어나 있었다. 그를 다시 눕히기 위해 잡히지 않은 손을 뻗었다.
그러나 곧 손가락 사이로 라이오넬의 손끝이 파고들었다. 얇은 피부를 느리게 스치는 감촉에 잠깐 오싹한 감이 들었다.
몸을 움찔거리는 사이 라이오넬이 내 위로 올라왔다. 내 손가락은 여전히 라이오넬의 손가락에 얽힌 채로 머리맡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잠깐, 이건 자려는 자세가 아닌데……?
“라이오넬?”
그가 그대로 입을 맞췄다. 평소보다 조금 더 짙고 노골적인 입맞춤이었다.
고개를 들어 숨을 터트리기 무섭게 입술이 다시 맞닿았다.
그가 내 한쪽 손을 풀어 주었다. 동시에 그의 손도 자유로워졌다.
문제는 자유를 되찾은 손이 예상치 못한 쪽으로 향했다는 것이다.
“악! 잠깐, 잠깐만요!”
“응?”
라이오넬이 움직임을 멈추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싫은가?”
“싫다기보다는…….”
마음의 준비가 덜 됐는데!
그냥 재워 주려고 했던 건데 갑자기 왜 이런 분위기가 된 거야.
일단 오해를 풀고 라이오넬을 재워야겠다.
그를 저지할 생각으로 손을 뻗었다. 라이오넬이 스스로 내 손바닥에 볼을 묻었다.
“싫으면, 멈출까?”
피로가 쌓인 것뿐일 텐데, 반개한 눈과 달아오른 눈가가 유난히 나른하고 유혹적이었다. 입맞춤 때문인지 입술도 평소보다 더 붉었다.
나는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아니에요. 계속하세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가 내 손을 치우고 다시 입을 맞췄다.
나는 그에게 휩쓸리며 속으로 생각했다.
망할 미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