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그래서?”
알렉산드라가 왕좌에서 일어났다. 느리고 위엄 있는 걸음이 호위 기사에게로 향했다. 데본더스는 눈으로 그녀를 좇으며 입을 열었다.
“여왕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알렉산드라가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자 데본더스는 초조해졌다.
“넬리 페퍼를 원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공작이 되면 넬리 페퍼를 폐하께 바치겠습니다.”
여왕이 기사의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데본더스는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눈이 마주치자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알렉산드라는 검을 쥔 손을 늘어트린 채 왕좌로 돌아왔다.
“알터우드 공은 이리 가까이 오라.”
데본더스는 왕좌로 이어지는 몇 개 안 되는 계단에 발을 디뎠다. 가까워질수록 앉아 있는 알렉산드라와 눈높이가 벌어졌다.
여왕을 내려다볼 순 없기에 그는 자연스럽게 한쪽 무릎을 굽혀 앉았다.
마치 기사가 맹세의 서약을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여왕은 검을 쥔 손을 뻗어 데본더스의 어깨에 검신을 걸쳤다.
“그대는 내가 타인의 도움 없이는 관리인 하나 얻지 못하는 위인이라 여긴 모양이군.”
검날이 데본더스의 목덜미와 더 가까워졌다.
“그, 그것이 아니라…….”
“아니면? 나더러 고작 귀족들 자리다툼 따위에 끼어들라는 건가?”
알렉산드라는 냉랭한 얼굴로 데본더스를 응시했다. 그는 갈증을 지우기 위해 억지로 마른침을 몇 번 삼켰다.
“제가 감히 어떻게 그런 의도로 여왕님을 모욕하겠습니까?”
알렉산드라는 무표정한 얼굴로 코웃음 쳤다.
“라이오넬 알터우드를 후계자로 생각하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가문의 일에는 아무리 여왕이어도 끼어들지 않는 게 관례이다.
하지만 처리하려는 사람이 여왕의 마음에 들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알렉산드라 여왕은 처단해야겠다 마음먹은 게 있다면 관례든 뭐든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었다.
미리 말하지 않고 일을 쳤다가는 목이 달아날지도 모른다.
“그러니 공작이 되기 전에 여왕님께 미리 양해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알현을 청한 것입니다.”
“그대가 라이오넬보다 쓸모 있다 자부할 수 있는가?”
“제가 공작이 되면 알터우드 공작가의 기사단을 폐하께서 마음껏 사용하실 수 있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아레트가 이끄는, 오직 라이오넬에게 충성하는 기사단과는 성향이 달랐다.
알터우드가처럼 유서 깊은 공작 가문에 속한 기사단은 규모가 거대하다. 다만 움직이기 위해서는 다른 혈족들의 동의가 필요했다.
그걸 준다는 것은 가문의 목줄을 여왕에게 쥐여 주겠다는 뜻이었다. 더불어 알터우드 친인척들이 데본더스의 편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라이오넬은 폐하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폐하를 두려워하니 훨씬 써먹기 편하실 겁니다.”
“그 말이 옳다.”
알렉산드라가 옆으로 검을 집어 던졌다. 쇠붙이가 대리석에 떨어져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원하는 게 무엇인가?”
“그저 제가 하려는 일에 눈을 감아 주시면 됩니다.”
“말하라.”
“사병을 움직일 생각입니다. 명분은 적당히 만들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공공연하게 라이오넬의 목을 자르겠다는 뜻이었다.
알렉산드라는 데본더스가 성공할 것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이런 노골적인 수까지 꺼냈다는 건 그동안의 모략이 전부 실패했다는 뜻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허락했다.
“문제 삼지 않겠다.”
“감사…….”
“단, 50개월을 기다려라.”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 기간 내에 영지를 발전시키지 못하면 라이오넬 알터우드에게 불복종의 죄를 묻기로 하였다.”
데본더스는 미소를 숨기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불복종의 죄를 묻다니! 그건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잘만 하면 사병을 움직일 필요도 없겠군.’
명분이 있다고 한들 병사를 움직여 가주의 목을 치는 건 모양새가 좋지 않기 마련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여왕과 접선하는 거였는데.’
원래 가까운 이와의 원한이 더 오래 남는 법이다.
데본더스는 그 사실을 이용해 라이오넬과 아델하르트가 암투를 하면 어부지리로 왕이 될 생각이었다.
그런데 몇 년에 걸쳐 감정의 골이 깊어져도 그들은 서로를 죽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가 시도했던 것들은 전부 실패로 돌아갔다.
그런데 약 4년 동안 라이오넬이 하는 일을 방해하기만 하면 라이오넬은 죽는다니!
라이오넬만 죽으면 공작 자리는 자연스럽게 제 것이 된다.
‘아델하르트 왕자만 제거하면 왕이 되는 것도 시간문제다.’
일이 생각보다 잘 풀린다. 문제는 넬리 페퍼였다.
그 천재적인 지략가가 라이오넬의 곁에 있으면 방해하기가 어려워질 것이다. 그래도 조급할 필요는 없다.
관리인 하나쯤이야. 공작을 죽이는 것에 비하면 날벌레 잡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데본더스는 표정을 갈무리하고 공손하게 머리를 숙였다.
“기다리겠습니다.”
“물러가라.”
데본더스가 뒤로 물러나 인사하고 알현실을 나갔다.
알렉산드라가 왕좌에서 일어나자 에트킨 부인이 그녀를 뒤따랐다.
“괘씸하네요.”
갑자기 무슨 말이냐는 얼굴로 알렉산드라가 에트킨을 보았다.
“기사단을 마음대로 쓸 수 있게 해 주겠다니. 가문을 폐하께 드리겠다는 뜻이잖아요.”
꼴사납게 벌벌 떨면서 공작 자리를 가지고 싶다더니 손에 넣으면 여왕께 드리겠단다.
그 의미는 하나뿐이었다.
그는 알터우드가를 통째로 바쳐도 아깝지 않은 것을 원하는 것이다.
감히 여왕 앞에서 반란을 입에 올렸을 리 없으니 후계자 자리를 노리는 것이리라.
“폐하의 보위가 이토록 굳건하신데, 감히 건방지게…….”
“화낼 필요 없다.”
데본더스는 라이오넬을 방해하기 위해 넬리를 건드릴 게 분명했다.
그걸 라이오넬이 구경만 하고 있을 리 없다.
굳이 알렉산드라가 제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아도 데본더스는 라이오넬이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
“만약 데본더스가 성공하면 어쩌시려고요?”
“손해 볼 건 없다. 내가 죽을 때까지 알터우드 가문을 손에 쥐고 흔들 수 있을 테니.”
“그게 아니라 라이오넬 알터우드가 아깝진 않으신가 해서요.”
“데본더스에게 당한다면 쓸모가 거기까지밖에 안 되는 놈이라는 거겠지. 아까울 리가.”
에트킨 부인이 부채를 살랑이며 얼굴을 가렸다. 알렉산드라는 어떨지 몰라도 그녀는 아쉬울 것 같았다.
어렸을 때부터 보아 온 아이기에 정도 들었고, 제법 안쓰럽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에트킨이 입을 다물자 앞서가던 알렉산드라가 뒤를 돌아보았다.
“아나벨라 에트킨. 내 안목을 못 믿는 건가?”
라이오넬은 여왕이 살려 둔 인재였다. 죽을 일 없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속뜻을 읽은 에트킨이 미소 지었다.
“설마요. 라이오넬이 너무 잘해서 심술이나 부리실 생각으로 데본더스 알터우드에게 정보를 흘린 것이잖아요?”
넬리 페퍼의 영향으로 라이오넬이 내기에서 유리해진 것 같아 알렉산드라는 내심 못마땅했다.
그렇기에 그녀는 부정하지 않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녀를 뒤따라 걸으며 에트킨이 우아하고 심술궂은 미소를 지었다.
“덕분에 오랜만에 재미있는 구경을 하겠어요, 폐하.”
* * *
어수선하던 공작성은 원래의 분위기를 되찾았다.
자결한 하녀의 시신은 라이오넬이 자비를 베풀어 가족에게 돌려주었다. 그리고 당장 의사부터 고용했다.
음식은 더 엄격한 과정을 거쳐 조리되었다. 나르기 전에 몸수색도 받아야 했지만 불만을 품는 사람은 없었다.
번거로움을 감내하는 게 나 때문인 것 같아 못내 미안했다.
그래서 도움이 되기 위해 틈이 날 때마다 서재에서 일과 관련된 공부하고 있었다.
라이오넬은 내가 서재에 있을 때면 서류를 바리바리 싸 들고 와서 곁을 지켰다. 보통은 서로 자기 일에 집중했지만 가끔 이야기가 다른 쪽으로 새기도 했다.
“왜 내 푸딩에 독을 넣었을까요? 날 죽여서 무슨 이득이 있다고?”
내가 공부하던 책을 내려놓자 라이오넬도 서류를 내려놓았다. 나는 라이오넬을 보며 책상에 엎드렸다.
“딸기 콩포트를 못 먹겠어요. 사실 라이오넬이 먹는 것만 봐도 심장이 덜컥 주저앉아요.”
“딸기를 끊어야겠군.”
농담인가 싶었는데 표정이 진지했다.
뭘 툭하면 끊는다고 그런담. 저번에도 감시를 끊었다가 불면증에 시달렸으면서.
“제가 극복해 볼게요.”
“극복할 때까지 나도 자제하도록 하지.”
“그러다 또 잠 못 자려고.”
“그대가 재워 주면 되지.”
“무슨, 뭐, 뭘, 재워 줘요! 다 큰 어른을!”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줄 알았네!
달아오른 낯빛을 감추기 위해 팔에 얼굴을 묻었다. 라이오넬이 내 귓가를 어루만졌다.
“간지러워요.”
어깨를 움츠리자 뜨거운 손이 목덜미를 감쌌다.
입술을 맞대자 뜨거운 숨이 쏟아졌다. 무른 혀가 입천장을 간지럽혔다.
점점 숨이 막혔다. 코로 숨 쉬면 된다는 걸 머리로는 아는데 항상 뜻대로 되지 않는다.
잠깐 떨어져 숨만 쉬려는데 라이오넬이 뒤로 물러났다. 그가 내 얼굴을 보고 장난스럽게 웃었다.
“공부는 그만하고 쉬는 게 좋겠어. 열이 나는군.”
“열 아닌 거 알면서.”
“그래도 쉬어.”
길고 모양 좋은 엄지가 내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요즘 계속 퇴근해서 늦게까지 공부하지 않나? 오늘은 쉬는 날인데도 책만 보고 있고.”
“건강 관리 잘하고 있어요.”
“아닌 것 같은데.”
그가 내 양 볼을 감싸고 엄지로 눈가를 부드럽게 쓸었다.
“뭐가 그렇게 조급해.”
“소문만큼 유능해지진 못해도 여왕님께 끌려갔을 때 쓸모없다는 말은 듣지 않아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걱정하지 마. 그대는 내가 지킬 테니.”
“영지 성장에 도움이 되고 싶기도 하고요. 더는 운에 맡길 수 없으니까 스스로 발전해야죠!”
라이오넬의 손을 잡아 내리며 깍지를 꼈다. 그가 깍지 낀 손가락에 입을 맞췄다.
“기특하긴 한데, 쓰러지면 어쩌려고.”
그 정도로 무리하진 않았는데.
사귀고 나서 보니 라이오넬도 은근히 팔불출이다. 입술을 삐죽이는데 맞잡은 손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래도 라이오넬이 생크림처럼 구는 게 싫진 않았다.
“오늘은 쉬어.”
“쉬엄쉬엄할게요.”
“고집은.”
긴 손가락이 머리카락을 스치듯 훑고 떨어져 나갔다.
나는 영지 경영에 관한 책을 덮고 다시 책상에 엎드렸다. 그의 주변에는 서류가 한가득 쌓여 있었다.
“라이오넬도 집무실로 가서 편하게 일해요.”
“그대가 있는 곳이 편해.”
낯뜨거운 말도 아무렇지 않게 하고. 둘만 있는데도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
차가운 책상에 볼을 식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서재 문이 열리고 집사님이 안으로 들어왔다.
“공작님. 손님이 왔습니다.”
“아무도 초대한 적 없는데. 누구지?”
“몰그란 자작 부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