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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제발 좀 망하세요 (94)화 (94/130)

94화

방 안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큰 목소리였지만 말이다.

시선이 한꺼번에 자신에게 쏠리자 프레르가 딴청을 부렸다.

넬리는 라이오넬과 아델하르트를 번갈아 보았다. 차라리 자리를 피해 주는 게 낫지 않을까?

프레르를 보자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주섬주섬 깨진 유리 조각을 들어 올렸다.

“저는 이거 치울게요.”

프레르가 방을 나가는데도 라이오넬과 아델하르트는 막지 않았다.

이미 인질극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 것이다.

안전을 확신하자마자 넬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나간다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라이오넬에게 소매를 붙잡혔다.

“위험하니까 그냥 여기 있어.”

“두 분이서 이야기 나누는 게 좋지 않을까요? 프레르도 나갔으니까 저도 자리를 비켜 드릴게요.”

“그자는 주변에 아군밖에 없으니 안위를 걱정할 필요가 없어. 하지만 그대는 상황이 다르잖아. 손도 다쳤고.”

아델하르트의 미소에서 깊은 짜증이 엿보였다.

“그럼 알터우드 기사한테로 보내 주면 되겠네.”

라이오넬은 내켜 하지 않았으나 넬리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겸사겸사 손도 치료받고요.”

그제야 라이오넬이 넬리의 소매를 놓아주었다. 아델하르트는 알터우드가의 기사들을 전부 불러 넬리를 떠넘겨 주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두 사람은 서로의 맞은편에 있었지만 마주 보진 않았다.

라이오넬은 한참이나 붉은빛을 띠는 찻물을 내려다보았다.

양손에 얼굴을 묻고 있던 아델하르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술 가져올까?”

“……그래.”

아델하르트는 수하를 불러 아무도 손대지 않은 찻잔을 치우게 했다. 테이블을 정리하는 사이 그는 직접 술병과 유리잔을 꺼내 왔다.

술잔을 내려놓던 아델하르트가 잠깐 멈칫했다. 그는 나가려는 수하를 불러 세웠다.

“쟤 아직 술 마시면 죽는지 프레르한테 물어봐 줄래?”

“예, 전하.”

잠깐 나갔던 수하가 얼마 지나지 않아 되돌아왔다.

“죽진 않지만 가급적 드시지 마시랍니다.”

“그렇다는데 어떡할래?”

라이오넬은 말없이 아델하르트의 손에서 술병을 가져와 잔을 채웠다. 그리고 술병을 아델하르트에게 넘겼다.

아델하르트도 잔을 채우고 단숨에 마셨다. 그는 독이 없는 걸 확인할 시간을 주겠다는 듯 팔짱을 끼고 몸을 뒤로 기댔다.

라이오넬이 설핏 웃고 제 잔을 비웠다.

그들은 조용히 한 잔을 더 마시고 나서야 동시에 입을 열었다.

“편지부터 말해 봐.”

“편지 보냈다는 건 무슨 말이야?”

라이오넬이 아델하르트에게 먼저 말하라는 듯 눈짓하고 잔을 채웠다.

아델하르트는 잠시 술잔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 말해도 되나?’

타티아손을 살릴 수 있었는데 살리지 못했다는 것을 알면 분명 충격을 받을 텐데.

오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마당에 라이오넬에게 굳이 상처를 줄 필요가 있나 싶었다. 아델하르트가 말을 걸러서 해야겠다고 결심한 순간이었다.

“그냥 다 말해. 이 짓거리를 두 번 하고 싶진 않으니까.”

라이오넬이 그의 생각을 끊어 냈다. 아델하르트는 제 잔을 다시 채우고 비웠다.

“타티아손은 세뇌당한 상태였어.”

한 문장 내뱉고 라이오넬의 표정을 보았다.

그는 속을 알 수 없는 무표정으로 다리를 꼬고 깍지 낀 손을 올려 두었다.

듣고 있으니 계속하라는 의미였다.

아델하르트는 넬리에게 말했던 것을 조금 더 상세하게 라이오넬에게 말했다.

“답장이 왔다고?”

“그래. 알터우드 가문의 인장이 찍혀 있었어. 필체와 말투도 네 것이었고.”

“인장과 필체, 말투라……. 알터우트가의 사람이겠군.”

“그렇겠지.”

자연스럽게 숙부의 얼굴이 떠올랐다.

라이오넬이 전쟁터에 있는 동안 그가 모든 권한을 휘둘렀기에 편지를 빼돌리는 것쯤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델하르트 역시 라이오넬과 같은 생각을 하다가 물었다.

“네가 말한 편지는 뭔데?”

“타티아손이 막사의 위치와 전술, 병력 규모에 대한 내용을 적국에 빼돌린다는 말이 돌았었다.”

그 내용에 대해서는 아델하르트도 알고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엔 믿을 수 없었는데, 막사가 습격을 당했어. 전쟁터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한정적이니까, 너에게 편지를 보냈다.”

“타티아손이 배신자인지 확인해 달라고?”

“아니. 살릴 방법을 찾아봐 달라고. 그래선 안 되지만, 살릴 수 있다면 살리고 싶었어.”

그러나 그 편지는 아델하르트에게 닿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고 돌아왔을 때, 라이오넬은 자신이 편지를 보냈던 시기에 아델하르트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알아봤다.

그리고 그가 사교계에서 세력을 모으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네 답장을 2주간 기다렸다. 그사이 습격이 종종 있었고 전투에서도 한 번 패배했지. 병력의 4분의 1이 죽고 나자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라이오넬이 결단을 내린 그날, 타티아손이 라이오넬을 찾아왔다.

그는 라이오넬을 찌르려 했다. 그러면서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마치 어쩔 수 없는 일을 하는 사람처럼. 괴롭지만 신념을 지키려는 사람처럼.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세뇌를 당했을 줄이야.”

타티아손의 시신을 제 손으로 수습했을 때, 그는 감정을 지웠다. 슬픔도, 괴로움도 느끼지 않아야 했다.

항아리에 갇힌 수십 마리의 뱀처럼 뒤엉킨 감정을 받아들이면 미칠 게 분명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끌어야 할 이들이 남아 있었다.

부상당해 생사를 오가는 수하들, 길어진 전쟁에 가족을 돌보지 못해 떠나보내야 했던 파우트. 저를 따라 전쟁터까지 들어온 레반스와 아레트까지.

당장 자결이라도 하고 싶었으나 그에겐 책임져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배신 소식을 알리자 잠시 수도로 돌아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돌아가는 내내 그는 누울 수조차 없었다. 부하들의 시체가 산맥을 이뤄 척추뼈를 짓눌렀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으나 그는 전쟁터를 떠났다.

2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라이오넬은 담담한 목소리로 제 친우에게 속사정을 알렸다.

“더 빨리 말했으면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겠지. 하지만 그때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해해.”

아델하르트는 라이오넬을 몰아붙이기만 했던 과거가 떠올라 속이 쓰렸다.

“나는 네가 참전한 것도, 갑자기 물러난 것도 전부 공로 때문이라고 생각했어.”

“그런 소문이 돌긴 했지.”

라이오넬을 왕세자 후보로 두고 있다고 공공연하게 말한 여왕 때문에 난 소문이었다.

라이오넬이 왕세자가 되기 위해 공로를 세우러 자진해서 전쟁터로 나갔다는 것이었다.

“왕위에 관심도 없는 놈이 전쟁엔 왜 나간 건데?”

“살려고.”

“보통 반대 아니야?”

아델하르트가 가볍게 웃었다. 즐거운 기색이라고는 없는, 건조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라이오넬은 그를 따라 설핏 웃으며 제 처지를 털어놨다. 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전쟁터로 나가야 했는지.

그의 말 속에서 배신이 거듭될수록 아델하르트의 얼굴이 굳어 갔다.

“왜 말 안 했어?”

“믿을 수 없었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더욱.”

아델하르트는 독한 술을 병째로 들이키고 싶은 걸 참았다.

배신을 피해 전쟁터로 갔건만, 거기에 또 배신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라이오넬은 타티아손을 살리려 했다.

그 마음이 어땠을지 도무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아델하르트는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몸을 웅크려 제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차라리 변명이라도 하지 그랬어. 내가 널 원망했을 때, 주먹질했을 때 같이 때렸어야지. 악이라도 쓰던가.”

타티아손의 시체를 보고 이성을 잃은 아델하르트는 라이오넬을 찾아갔다. 무턱대고 주먹을 휘두르고 원망을 쏟아 냈다.

“그날은 잘 기억나지 않는군.”

라이오넬이 술을 따라 마시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떠올려 보려 해도 흐릿하기만 했다.

분명 눈앞에서 아델하르트가 비명처럼 소리치는 모습이 보이긴 했었다. 하지만 청각이 차단된 것처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눈빛, 새파란 증오의 불길이 타오르던 눈동자만은 꿈에서까지 그를 따라다녔다.

“그래서 암살자가 아델하르트, 네 이름을 입에 올렸을 때도 납득했다. 너라면 나를 죽이고 싶어 했을 테니까.”

“나도 마찬가지야. 타티아손을 죽일 정도로 왕위가 탐이 났으면 나도 죽일 수 있겠구나 싶어서……. 다 오해였지만.”

라이오넬이 영지로 내려오고 난 뒤로 두 사람은 한 번도 개인적으로 만나지 않았다.

2년은 의심이 확신으로 변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적대한 적이 없지만 적이 되었다.

“결론은 우리 둘이 놀아났다는 거네. 자존심 상하는데?”

아델하르트가 사납게 웃으며 술잔을 비웠다.

형제 같은 친구가 죽었을 때 이성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범인은 그것을 이용해 라이오넬과 아델하르트를 이간질하고 서로를 증오하게 만들었다.

멋대로 휘둘린 게 마음에 안 드는지 라이오넬 역시 왼쪽 눈썹을 까딱였다.

술병을 흔들어 남은 양을 가늠해 보며, 아델하르트가 물었다.

“어쩔 셈이야?”

“갚아 줘야지. 너는?”

“나도. 일단 편지를 전달했던 하인부터 찾아보려고. 네가 돌아오자마자 사고로 다리를 다쳐서 불구가 됐거든. 그때 고향으로 내려보냈어.”

“시기가 적절하군.”

“그렇지.”

잠시 침묵이 흘렀다. 미안하다는 말은 오가지 않았지만 서로를 향한 눈빛에 적의는 없었다.

아델하르트는 얼마 남지 않은 술을 제 잔에 따라 라이오넬 쪽으로 밀었다. 설핏 웃은 라이오넬이 술잔을 비웠다.

빈 병을 아쉬운 눈길로 보던 아델하르트가 씩 웃었다.

“한 병 더 마실래?”

라이오넬은 잠깐 생각하는가 싶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아델하르트가 아까보다 더 독한 술을 가져왔다. 라이오넬은 주는 술을 거부하지 않았다.

취기가 오르자 속내를 꺼내는 게 더 편안해졌다. 그들은 가깝게 지냈을 때에도 하지 못했던 말들을 기꺼이 꺼내 놨다.

한참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시 침묵이 돌려고 할 때, 아델하르트가 불쑥 말을 꺼냈다.

“나 너한테 열등감 가지고 있었는데, 몰랐지?”

“어.”

“여왕님이 너만 좋아했잖아. 너는 맨날 노는데 유능하고, 뭐든 잘하고. 타티아손 아니었으면 진작에 한 대 팼을 거야.”

“……살릴 수 있었는데.”

라이오넬이 탄식했다. 들이켠 독한 술이 갑자기 식도를 태울 듯 달구며 위장에 고였다. 그 열기 때문인지 마음이 괴로웠다.

“아델하르트. 네가 나보다 타티아손에게 더 의지했던 거 알아. 나보다 상심이 더 컸겠지.”

아델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술을 병째로 마셨다. 그는 이마를 짚고 있는 제 친우를 보았다.

“그래도 타티아손의 죽음은 네 탓이 아니야, 라이오넬. 더는 자책하지 마.”

기대하지도 않았던 위로에 라이오넬은 찌푸리듯 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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