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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제발 좀 망하세요 (93)화 (93/130)

93화

“지금?”

왕자가 피곤하다는 얼굴로 인상을 찌푸렸다. 나를 데려가야 할지 말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생각보다 일찍 왔네. 혼자야?”

“기사 다섯 명과 인질을 데리고 왔습니다.”

나는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다섯 명도 많은 숫자는 아니었으나 혼자인 것보다는 나았다.

게다가 그쪽도 인질이 있으니 협상 조건이 제법 동등했다. 적어도 나를 돌려받기 위해 불공정한 일에 휘둘리진 않을 것이다.

“저도 같이 갈래요.”

“얌전히 있어 준다고 약속하면.”

“그럴게요.”

검을 찬 사람이 내 팔꿈치를 붙잡자마자 문이 열렸다. 환하게 드러난 복도는 생각보다 깨끗했다.

“함정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거짓말이야.”

“쇠가 마찰하는 소리 같은 걸 들었는데…….”

왕자가 손가락으로 벽 한쪽을 가리켰다.

철로 된 도르래에 커다란 나무판자가 달린 두꺼운 밧줄이 연결되어 있었다.

그는 나를 데리고 판자 위로 올라갔다.

도르래 근처에 있던 사람이 손잡이를 돌리자 판자가 천천히 내려갔다. 눈을 가렸을 때 들었던 소리가 그대로 들렸다.

“왕자님 거짓말 잘하시네요.”

“함정 있다고 안 하면 방문부터 부술 것 같아서. 그리고 아델이라고 부르라니까?”

나무판자가 2층에서 멈췄다. 아델하르트는 나를 데리고 1층 홀로 향하는 짧은 계단을 내려갔다.

그러자 아델하르트의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라이오넬이 보였다.

“라이오넬!”

그가 무사한 것을 눈으로 확인하자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진짜 울었다가는 왕자가 나를 험악하게 다뤘다고 오해할 것 같아 꾹 참았다.

“넬리.”

그가 당장이라도 다가올 듯 움직였다. 아델하르트의 수하들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라이오넬이 멀찍이서 나를 살폈다.

씻고 옷을 갈아입었으니까 멀쩡해 보이겠지?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로 웃어 보였는데 라이오넬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의 시선은 내 손을 향해 있었다.

다급하게 손을 뒤로 감추자마자 라이오넬이 검을 뽑았다.

“넬리를 이리로 보내.”

“검은 넣고 이야기하는 게 어때? 분위기 흉흉해지잖아.”

“분위기가 흉흉해지는 게 싫었으면 넬리를 다치게 하지 말았어야지.”

이건 나 혼자 탈출하려다가 다친 건데.

뭐라고 해명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왕자님은 아무 말도 없었다.

나는 그의 표정을 잘 알고 있었다. 나도 한때 저런 얼굴로 라이오넬을 본 적이 있을 테니까.

그건 오랜 불신에 지친 표정이었다. 어떤 말을 해도 단번에 믿어 주지 않을 것을 알기에 차라리 해명을 포기해 버린 것이다.

이대로 두면 감정의 골만 깊어질 뿐이다.

“라이오넬. 이건 제가 혼자 탈출하려다 다친 거예요. 왕자님이 치료도 해 주셨어요.”

라이오넬의 눈동자가 나와 왕자님 사이를 오갔다. 그는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칼을 집어넣었다.

* * *

라이오넬은 원탁 하나만 놓인 방으로 들어섰다. 앞서가던 아델하르트가 먼저 의자에 앉더니 입을 열었다.

“인질은 이야기가 끝난 뒤에 교환하자. 괜찮지?”

“…….”

“안 괜찮다고 해도 어쩔 수 없고.”

목장지기였던 첩자가 제 옆에 있는 것에는 별 불만이 없었다. 그러나 넬리가 아델하르트 옆에 앉아 있는 것은 매우 거슬렸다.

“용건.”

“데본더스 알터우드가 벼농사에 성공했다는 거 알지?”

“……안다.”

“수확량을 전부 폐하께 진상하고 앞으로도 무상으로 생산해 황실에 보내기로 했다던데.”

“그것도.”

“그럼 폐하께서 그에게 내리려고 했던 작위를 그가 다른 이에게 양보했다는 것도 알아?”

그건 듣지 못한 일이었다. 고개를 젓자 아델하르트가 말을 이었다.

“제 아래 있던 게드너라는 자를 남작으로 만들어 수도로 보냈더라고. 사교계에서 제법 수완이 좋아.”

“세력을 모으는 거군.”

“그래. 이유가 뭐겠어?”

“알터우드 공작 자리.”

“혹은 왕위까지 노리고 있을 수도 있지. 너와 나만 없애면 그가 가장 유력한 왕위 후보가 될 테니까. 못 할 것도 없지 않겠어?”

라이오넬은 침묵했다. 그가 생각에 빠진 듯하자 아델하르트는 수하에게 차를 부탁했다.

이내 한 남자가 차를 내왔으나 정작 아델하르트는 손도 대지 않았다. 그건 라이오넬과 넬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프레르만이 차를 홀짝이며 세 사람을 구경하고 있었다.

벼 재배법이 어떤 경위로 데본더스의 손에 들어갔는지, 아델하르트가 원하는 게 뭔지 생각을 마친 라이오넬이 입을 열었다.

“너나 내 쪽에 다른 첩자가 있다는 거군.”

“그렇지.”

“데본더스를 치우기 위해 손을 잡자는 건가?”

“맞아.”

동맹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두 사람 다 표정이 좋지 못했다.

프레르는 차나 마시며 강 건너 불구경하듯 둘을 보았다. 넬리는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라이오넬이 속내를 숨기지 않아 아델하르트가 검이라도 뽑는 날에는 진흙탕 싸움이 될 것이다.

“내가 널 어떻게 믿지?”

그리고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그의 말을 듣자마자 아델하르트가 곱상한 얼굴을 구겼다.

다행히 칼은 뽑지 않았다. 그러나 넬리는 자신이 죽었던 날이 떠올라 이마를 짚었다.

“라이오넬.”

그녀가 말리듯 라이오넬의 이름을 불렀다.

라이오넬의 시선이 잠시 넬리에게 닿았다. 그제야 아델하르트의 상처 가득한 푸른 눈동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뱉은 말을 취소할 생각은 없었다. 이건 그의 진심이었다.

“3년 넘게 내 영지에 첩자를 숨겨 둔 거로도 모자라 내 연인을 꼬여 내려고 했지. 거기에 암살자를 보내 나를 죽이려고 했다. 그런데도 내가 너를 믿어야 하나, 아델하르트?”

“앞에 두 가지 이유는 그렇다 쳐도, 뒤에 건 좀 억울한데?”

아델하르트가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나는 적어도 권력 따위에는 아무 관심 없는 척하면서 몰래 사람을 죽이진 않거든.”

“우연이군. 나도 웃는 얼굴로 뒤통수를 치는 짓은 안 하는데.”

서로에게 향하는 감정이 날카로워지자 프레르는 찻잔을 든 채 슬그머니 탁자에서 멀어졌다.

두 사람 사이에는 끊임없이 상대를 비꼬는 말이 쏟아졌다.

“내가 첩자를 보내는 건 비열한 거고, 라이오넬 네가 첩자를 보내는 건 정당한 건가 봐? 아주 대단한 논리네.”

“첩자는 견제할 가치가 있는 자에게나 보내는 거지. 내가 그럴 필요가 있나? 너에게?”

자세히 들어 보면 대화가 어딘지 어긋난 느낌이 들었다.

어투에 섞인 적의가 너무 강해 내용을 다 가리고 있었다. 그저 상대를 어떻게라도 상처 입히기 위해 칼을 내지르는 꼴이었다.

서로를 향한 원망과 적대감을 걷어 내면 전혀 다른 내용이 나왔다.

아델하르트는 라이오넬을 죽이려 한 적이 없다고, 라이오넬은 아델하르트에게 첩자를 보낸 적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넬리는 가만히 듣고 있다가 중재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심호흡이라도 좀 하고 차분히 대화하면 오해를 풀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너를 불러내는 게 아니었어. 함께 자란 친우에게조차 곁을 주지 않는 놈한테 무슨 협조를 구하겠다고.”

“일단 둘 다 진정하고…….”

“왕이 되는 것밖에 관심 없어서 절명의 위기에 빠진 친우를 무시한 놈에게 듣고 싶은 말은 아니군.”

“그 절명의 위기를 만든 게 누구지? 너잖아, 라이오넬!”

살얼음 위를 걷는 듯한 침묵이 흘렀다. 둘 중 하나가 입을 열면 당장 칼부림이라도 날 것처럼 방 안에 살기가 팽배했다.

넬리가 몇 번 더 진정하라고 말했지만 두 사람은 듣지 않았다.

오해만 풀면 되는데, 상대에 말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모습에 속이 답답했다. 넬리는 코끝이 찡한 것을 참으며 탁자를 쾅 내리쳤다.

“둘 다 그만 좀 하세요!”

깜짝 놀란 프레르가 찻잔을 떨어트렸다. 유리 깨지는 소리가 커다랗게 울리자 두 사람이 그제야 이성을 차렸다.

그들은 똑같이 프레르를 한 번 바라보았다가 넬리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두 사람 감정의 골이 깊은 건 알겠는데, 협력한다면서요. 그러면 차분히 이야기 좀 해 봐요. 두 분 다 상대방 말을 전혀 안 듣고 있잖아요.”

반쯤 자리에서 일어났던 아델하르트가 자리에 앉았다. 그는 길게 숨을 내쉬고 눈을 감았다.

나는 라이오넬에게 다가가 손을 잡아 주었다. 치켜떠진 눈매가 조금 누그러졌다.

“들어 보니까 라이오넬은 왕자님께 첩자를 보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그래.”

아델하르트가 고개를 들었다. 라이오넬에게 옮기라도 했는지, 그의 얼굴에는 불신이 가득했다.

“아델하르트는 라이오넬을 죽이려고 한 적이 없고요?”

“내가 왜 그러겠어.”

아델하르트가 부정하자 라이오넬이 끼어들었다.

“이미 암살자가 실토했던 사실이다.”

“그럼 왜 그냥 뒀어? 그걸 빌미로 날 끌어내릴 수 있었을 텐데.”

“널 끌어내리는 것보다 내 목숨을 지키는 게 먼저였으니까.”

“타티아손은 죽여 놓고 넌 살고 싶었나 보지?”

넬리가 화들짝 놀라며 라이오넬의 귀를 막고 제품으로 끌어당겼다. 손바닥 밑으로 경직된 몸이 느껴졌다.

넬리가 무시무시한 눈으로 아델하르트를 노려봤다.

그의 파란 눈동자에 일순 후회하는 기색이 어렸다. 하지만 아직 그것보다는 원망과 미움이 더 큰 듯했다.

“일단 감정은 미뤄 두고 사실만 이야기해 봐요. 제가 보기엔 뭔가 오해가…….”

“그럼 내가 어떻게 했어야 하는데?”

라이오넬이 넬리를 밀어내고 고개를 들었다.

“부하들이 죽어 가는 걸 알면서도 타티아손을 감싸야 했나? 네가 뭘 알아. 안전한 수도에만 있었던 네가, 하루에도 수십 명씩 얼굴을 맞대고 웃던 놈들이 죽어 가는 기분을 알아?”

“그래서 내가 타티아손을 수도로 보내 달라고 편지를 보냈잖아! 알아서 하겠다고 한 건 너야.”

라이오넬이 무슨 말을 하냐는 얼굴로 아델하르트를 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아델하르트는 그 표정을 보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난 네게 더 좋은 방법이 있을 줄 알고 기다렸어.”

“…….”

“얼굴을 맞대고 웃던 놈들이 죽어 가는 기분을 아냐고? 그럼 너는? 하루아침에 형제같이 지내던 놈들이 서로를 죽이려고 했고, 한 놈은 시체가 되어 돌아온 기분을 알아?”

“난…….”

“나한테 가족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은 너와 타티아손이 전부였어. 그런데 넌, 라이오넬 너는 공을 세워 왕세자가 될 생각뿐이었겠지!”

“난 왕위에 관심 없다.”

“그럼 왜 아무것도 안 했어? 타티아손이 세뇌당해서 배신할 거라는 편지를 보냈는데, 왜, 왜 그를 죽게 내버려 뒀지? 그럴 거면 왜 알아서 하겠다고 답장했어?”

라이오넬이 충격에 휩싸인 얼굴로 아델하르트를 바라봤다. 그리고 한참 뒤에야 억눌린 목소리로 겨우 입을 열었다.

“난 그런 편지를 받은 적도, 답장을 보낸 적도 없다. 너야말로 타티아손이 궁지에 몰렸으니 도와 달라는 내 편지를 무시하지 않았나?”

“무슨 소리야.”

뭔가 꼬여도 단단히 꼬였음을 직감한 아델하르트가 인상을 찌푸렸다.

“난 네 편지 받은 적 없어. 네가 갑자기 전쟁터에 나간 뒤로 한 번도.”

아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침묵이 흘렀다. 느릿느릿하게 깨진 찻잔을 치우던 프레르가 맹한 목소리로 혼자 중얼거렸다.

“누가 이간질한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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