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라이오넬이 그를 죽인 것이다. 타티아손을 수도로 보냈다면 군사 정보는 적국으로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타티아손도 살고, 군사 기밀도 유지되어 사상자도 현저히 줄었겠지.
라이오넬은 자신이 막을 수 있는 일을 방치한 것이다.
왕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렇다는 뜻이다.
“하지만 라이오넬이 그런 일을 할 이유가 없잖아요.”
“그는 첩자를 잡은 공으로 폐하께 인정받았어. 귀족들로부터 지지도 얻어 냈고. 다들 그가 왕위를 이어야 한다고 난리지.”
“왕이 되고 싶어서 친구를 죽였다고요? 라이오넬이?”
정말 그렇게 믿는 건가?
왕자가 침묵으로 긍정했다.
“말도 안 돼요. 그는 왕위에 관심이 없어요.”
“진짜 관심이 없다면 나를 죽이려고 하지도 않았겠지. 공을 세우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전쟁터에서 물러나지도 않았을 거고.”
“꼭 라이오넬이 왕위를 원해서 공을 세우기 위해 전쟁터로 갔다는 것처럼 들리네요.”
말투가 저절로 뾰족하게 나왔다.
“정확히 짚었네.”
“아니에요.”
왕자가 노기 어린 얼굴로 나를 내려다봤다.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라이오넬이 전쟁터를 떠난 건 악몽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말했잖아요. 친구를 죽이고 괴로워했다고.”
“…….”
“진짜 왕위를 노린 거였다면 폐하의 심기를 거스르면서까지 전쟁을 피하려고 하진 않았을 거예요.”
“누가 그런 말을 해?”
그의 얼굴에는 비웃음이 가득했다.
보나 마나 내가 라이오넬이나 그의 측근의 말만 듣고 그의 편을 든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폐하와 라이오넬이 하는 말을 옆에서 직접 들었어요.”
“폐하?”
“네. 5년 안에 사람을 죽이는 것 말고 다른 쓸모를 증명하지 못하면 항명의 죄를 물어 사형시키겠다고요.”
그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럼 전쟁터에 간 건……. 그것도 왕위를 노리기 위해서가 아니었다고?”
혼란스러움으로 혼탁해진 눈으로 왕자가 나를 바라봤다.
대충 어떤 식으로 오해가 쌓였는지 알겠다.
라이오넬은 수년이 지난 지금에도 나에게 배신당했던 기억을 말하는 걸 망설였다.
전쟁터로 내몰렸을 때는 배신으로 부모님을 잃은 직후라 아마 지금보다 더 타인을 믿지 못했을 것이다.
가까운 사람은 더욱 경계했겠지. 지금도 친구를 믿지 말라고 하는 사람인데, 그때는 오죽했겠어.
라이오넬은 침묵하고 왕자는 오해했다.
이미 감정의 골이 깊어진 상태로 타티아손이 죽었고, 두 사람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게 된 것이다.
‘오해만 풀면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은데…….’
라이오넬도 왕자도, 함께 지내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 같았다.
무슨 말이라도 더 해야 할 것 같았다. 라이오넬과 대화는 해 봤냐고 물으려는데 왕자가 작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하지만 라이오넬이 타티아손을 죽였다는 건 변함없어.”
차갑고 텅 빈 목소리였다. 그는 내가 붙잡을 새도 없이 몸을 홱 돌렸다.
“산책은 끝이야. 들어가자.”
기사들이 다가와 내 눈을 가렸다. 손을 가볍게 묶고 나를 번쩍 들어 올렸다.
나는 그대로 방으로 옮겨졌다. 손목과 안대가 풀어지자마자 왕자를 찾았다. 그러나 내 주변에는 무장한 사람들뿐이었다.
“좀 쉬고 계십시오. 시간이 되면 저녁을 가져다드리겠습니다.”
한 사람이 정중하게 말하고는 다른 이들을 이끌고 방을 나갔다.
나는 혼자가 되었다. 왕자는 생각할 게 많아 보이는 표정이었으므로 한동안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이건 기회야.’
창문을 활짝 열었다. 다시 봐도 높다. 내려갈 생각을 하니 몸이 떨렸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방법밖에 없다.
‘덮는 이불을 찢으면 너무 티가 나는데.’
중간에 사람이 들어오면 분명 들킨다. 고민하다가 속 시트를 벗겨 냈다. 침대가 넓어서 그런지 제법 큰 천이 나왔다.
속 커튼들도 다 떼어 내 모으니 연결해서 묶어 두면 제법 길이가 나올 것 같았다.
‘그런데 레이스 커튼이라 내 무게를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네.’
찢어서 더 길게 만들면 좋을 텐데 눈을 씻고 봐도 날카로운 건 보이지 않았다. 거울조차 없으니 말 다 했다.
‘유리창을 깨부숴?’
아니야. 그랬다가 들키면 도망을 시도하기도 전에 끝난다.
방문에 귀를 대고 밖의 소리를 들었다. 조용한 것을 확인하고 커튼이란 커튼은 모조리 떼어 냈다.
총 여섯 장이니까 다 연결하면 6층 정도의 높이는 될 것이다.
‘거기에 이불도 있으니까, 충분히 내려갈 수 있어!’
힐끗힐끗 눈치를 보며 커튼을 이어 단단히 매듭지었다. 둘둘 말아 옮기려는데 한 번에 들 수 없을 정도로 묵직했다.
기둥에 천을 묶어 고정하고 여러 번 당겨 봤다. 절대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창문을 열고 반대쪽 끄트머리를 질질 끌어 창밖으로 천천히 내렸다. 마지막으로 문밖의 소리를 한 번 더 확인하고 돌아와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좋아. 할 수 있어. 할 수 있다, 넬리 페퍼! 용기를 가져.’
심호흡하고 제자리에서 뛰어 몸을 달궜다. 허리띠를 풀어 안에 커튼으로 만든 밧줄을 넣고 다시 조였다. 이러면 손에 힘이 빠져 줄을 놓쳐도 떨어져 죽는 일은 없을 것이다.
매달릴 힘이 없으므로 팔뚝에 밧줄을 한 바퀴 감았다.
도르래를 움직이듯이 늘어진 밧줄을 위로 밀어 올리면서 내려가면 안전하게 땅에 닿을 수 있겠지.
‘그래야 하는데. 할 수 있을까?’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고 조심스럽게 창문 난간을 넘었다.
밧줄이 팔뚝을 꽉 조였다. 잘못하면 부러질 것 같았다. 다리에도 밧줄을 휘감아 무게를 분산시키며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매듭에 한 번씩 허리띠가 걸리긴 했지만 제법 순조로웠다.
‘좋아.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땅에 닿을 수 있는데, 어째서인지 거리가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뭐야. 왜 자꾸 멀어지는 것 같지? 당황해 조금 더 속도를 내 봤다. 아래에 남은 줄은 점점 짧아지는데 높이는 거의 변함이 없었다.
“설마…….”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위를 올려다보자 커다란 손이 커튼 밧줄을 끌어당기고 있는 게 보였다.
안 돼. 거의 다 성공했는데!
이대로 잡혀갈 순 없다. 탈출을 시도했으니 무슨 짓을 당할지 몰라. 지금까지는 고분고분해서 친절하게 대해 준 걸 수도 있잖아!
다시 아래를 봤다.
밧줄이 아슬아슬하게 땅에 닿아 있었다. 조금 있으면 땅에서 멀어질 것 같았지만 아직은 괜찮았다.
나는 다급하게 팔뚝에 감아 두었던 커튼을 풀었다.
발버둥 쳐 다리에 감은 천도 풀자 악력과 허리띠에 의지해 건물에 매달린 상태가 되었다.
‘무서워서 기절할 것 같아.’
그래도 눈을 질끈 감고 손에 힘을 뺐다. 허리띠에 의지한 밧줄이 주르륵 미끄러졌다.
속도가 너무 붙으려고 할 때마다 밧줄을 움켜쥐었다.
몇 번 반복하니 땅과 빠르게 가까워졌다. 하지만 위에서 끌어 올리는 속도도 점점 빨라졌었기에 밧줄은 이미 땅에서 꽤 멀어진 상태였다.
2층 높이에 도착했을 때,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뛰어내렸다.
“으악!”
몸이 추락하는가 싶더니 무언가에 퍽 부딪쳤다.
눈을 뜨자 내 밑에 깔린 왕자가 보였다. 바로 일어나 뛸 생각이었는데 왕자의 손이 더 빨랐다.
그는 몸을 돌려 내 위를 점령하더니 바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괜찮아?”
“……어떻게 알았어요?”
“바로 아래층 방이 내 방이야. 창밖을 보는데 뭐가 기어 내려가더라고.”
그가 가만히 있는 내 팔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주변에는 이미 호위가 깔려 있었다.
그제야 탈출에 실패했다는 게 실감이 났다.
‘도망칠 생각 하지 말라고 했는데…….’
두려움을 애써 감추며 왕자를 보았다.
그는 커튼으로 만든 밧줄을 보며 기가 차다는 듯 웃고 있었다.
“겁도 많으면서 어떻게…….”
감탄인지 탄식인지 모를 숨을 내뱉은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인상을 찌푸렸다.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지만 손이 붙잡혔다.
“피 나잖아.”
“놔주세요.”
“알겠으니까 일단 치료부터 하자. 어디 더 다친 데 없어?”
왕자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무장한 사람이 깔려 있으니 도망칠 생각하지 말라고 한 사람답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의 태도가 고맙거나 기껍진 않았다.
애당초 그가 나를 납치하지만 않았으면 이렇게 필사적으로 도망칠 일은 없었을 테니까.
그렇다고 마냥 적의가 생기는 것도 아니라 이래저래 마음이 불편했다.
“없어요.”
손을 빼내자마자 다시 눈이 가려졌다.
왕자는 내 손목을 묶으려다가 한숨을 내쉬더니 그냥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 안대도 풀어 주었다.
혹시 놓아주려나? 기대감에 그를 바라보는데 그가 위에 소리쳤다.
“줄 내려!”
갑자기 줄은 왜?
끌어 올려졌던 줄이 다시 땅에 닿았다. 왕자가 내 몸에 줄을 여러 번 둘러 꽉 묶었다.
그리고 두 번 잡아당기자 줄과 함께 몸이 쭉 딸려 올라갔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팔뚝에 멍이 들어서 묶을 수가 없잖아. 안대 풀지 말라고 해도 안 들을 것 같아서.”
“그렇다고 이렇게…….”
“위에서 봐.”
손을 흔드는 왕자와 호위들이 점점 멀어졌다. 왕자는 탑 안으로 들어갔지만 검을 찬 사람들은 그대로였다.
내려올 때는 벽만 보려고 노력해서 몰랐는데 끌려 올라가자 높이가 실감이 났다.
눈을 질끈 감고 기다리자 순식간에 다시 6층으로 끌려 올라왔다.
언제 올라온 건지 왕자는 약을 들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
“기둥에 묶은 매듭이 허술하던데, 그러다 풀리면 어쩔 뻔했어. 그렇게 고생 안 해도 때 되면 풀어 준다니까? 이것 봐. 다 쓸리고, 피 나고, 멍들고.”
그리고 한숨 섞인 잔소리를 늘어놓다가 제 방으로 돌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식사 시간이 되었다. 나이프가 있으면 숨겨 두려고 했는데 숟가락이 전부였다. 고기는 한 입 크기로 썰려 있었다.
‘혹시 비밀 통로 같은 게 있지 않을까? 소설 같은 거 보면 이런 탑에 꼭 하나씩 있던데.’
밤이 되길 기다렸다가 은밀하게 움직였다. 수상해 보이는 장식물은 다 들쳐 보고 바닥과 벽을 두드리며 입구가 나오길 바랐다.
그러나 나온 건 비밀 통로가 아니라 아델하르트 왕자였다.
피곤한 얼굴로 올라온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넬리. 제발. 비밀 통로 같은 건 없으니까 바닥 좀 그만 두드려. 나도 잠은 자야지.”
“정말 없어요?”
“있다고 해도 여긴 아니야. 비밀 통로가 있는 방에 인질을 가두는 멍청이가 어딨어.”
맞는 말이라 고개를 끄덕였다. 왕자는 다시 한번 조용히 해 달라고 부탁하고 몸을 돌렸다.
그러나 그가 편하게 잠드는 일은 없었다.
“왕자님. 알터우드 공작이 찾아왔습니다.”
라이오넬이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