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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제발 좀 망하세요 (91)화 (91/130)

91화

내 목숨 가지고 라이오넬을 협박해 원하는 걸 얻어 낼 생각인가 보다. 인질이 되어 라이오넬의 발목을 붙잡을 수 없다.

그가 날 찾기 전에 돌아가야 해. 역시 창문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나?

“여긴 알터우드 공작령과 반나절 정도 떨어져 있으니까, 아마 며칠 안 걸릴 거야.”

좋아. 아델하르트가 나가자마자 도망쳐야겠다.

결심하는데 그는 나갈 생각이 없는지 내 위협용 의자 위에 계속 앉아 있었다.

어떻게든 내보내야 하는데…….

위장이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커다랗게 울렸다.

“배고파요.”

“가벼운 걸로 준비해 줄까?”

고개를 끄덕이고 그가 따라 놓은 물을 마셨다.

인질로 쓸 생각이면 당장 독살하진 않을 거라는 확신 덕분이었다.

음식을 가지러 왕자가 직접 나가면 좋겠다. 생각했지만 그는 종을 울려 사람을 불렀다.

허리에 칼을 찬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몸집으로 보나 움직임으로 보나 절대 하인 같지 않았다.

“묽은 수프하고 부드러운 빵 좀 가져다줘.”

계속 앉아 있을 생각인가 보다.

왕자를 쫓아낼 방법이 없으니 먹을 거라도 잘 먹어서 체력이라도 회복해 둬야지.

“담백하고 부드러운 고기도요.”

슬쩍 끼어들자 왕자가 웃음을 터트렸다. 범죄자 주제에 왜 저렇게 상쾌하게 웃는담.

노려보고 싶은 걸 꾹 참으며 고개를 돌렸다. 이 정도 깐죽거리는 것으로는 분위기가 험악해지지 않았다.

무서우면 머리가 잘 안 돌아가니 나에겐 퍽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웃음을 멈춘 왕자가 들어온 사람에게 부탁했다.

“들었지? 담백하고 부드러운 고기도 부탁할게.”

“예, 전하.”

남자가 방을 나가자 아델하르트가 내 쪽으로 몸을 틀었다.

“뭐 궁금한 거 있어?”

“여긴 어디예요?”

“내 별장. 보다시피 무장한 사람들이 제법 많아.”

물어보지도 않는 걸 알려 주네.

“도망칠 생각하지 말란 뜻이야.”

“……방금 내가 입 밖으로 말했어요?”

“아니. 무슨 생각 하는지 정도야 알기 쉽지. 넬리는 표정이 다양하잖아.”

변함없이 친근한 태도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나를 납치했으니까.

“라이오넬한테 뭘 요구하려고 납치까지 했어요?”

“처음에는 납치할 생각 없었는데. 말했잖아. 정체를 밝히고 갈 생각이라고.”

“그럼 지금은 무슨 생각인데요?”

“그냥 기회가 생겼으니 이야기나 나눠 보려는 거야.”

“둘이 사이 안 좋잖아요.”

“안 좋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지.”

왕자의 미소가 비틀렸다. 흉흉해 보이진 않았으나 납치범이 저러니 살짝 무섭다.

내가 긴장하는 기색을 보이자 왕자가 멋쩍은 듯 웃었다.

“하지만 공통의 적이 있다면 말이 다르지 않겠어?”

“공통의 적이요?”

“데본더스 알터우드.”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왕자의 입에서 나왔다. 아무래도 그 음흉하고 불쾌한 분은 여기저기에 적을 만들어 둔 모양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면 나중에 라이오넬하고 협상할 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자세한 건 라이오넬이 오면 이야기하자.”

물어보기도 전에 거절당했다.

“만약 라이오넬이 오지 않으면요?”

“그럼 넬리 말대로 내가 하디거가 아니라는 증거가 생길 때까지 여기 가둬 둬야지.”

“그런 뒤에는요?”

“놓아줄게. 우린 친구잖아.”

너무 한결같이 말하니까 사라진 믿음이 돌아올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도주를 포기할 건 아니지만!

고개를 끄덕이고 하인이 가져다준 것을 먹었다. 배가 차니 힘이 좀 생기는 것 같았다.

그래도 창문으로 나가는 건 무리일 것 같지만 말이다. 창문은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 놓기로 하고 일단 밖으로 나가 봐야겠다.

“산책할래요.”

거절하면 뭐라고 설득하지? 속이 더부룩하다고 할까? 아니면…….

“그래.”

“네?”

“해. 산책.”

“방 안에서요?”

“아니. 밖에 나가고 싶다는 뜻 아니었어?”

“……맞아요.”

“나가자.”

뭐야. 이렇게 쉽게 된다고?

원래는 출구까지의 길 정도만 알아 둘 생각이었는데, 이 정도 경계심이면 눈치를 봐서 도망칠 수도 있겠다.

설렘을 숨기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왕자가 내게 다가왔다.

주춤 뒤로 물러났지만 그의 보폭이 더 컸다. 순식간에 검은 천 같은 게 눈을 가렸다.

그러더니 왕자가 나를 안아 들었다.

발이 땅에서 떨어지자 비명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입을 악물고 손에 잡히는 걸 쥐어 잡았다.

“높은 거 무서워하는구나?”

정확히 말하면 높은 위치의 탈것을 무서워한다. 그걸 말해 줄 필요는 없어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길은 알려 줄 수 없으니까, 이렇게 나가자. 무서우면 끌어안아도 돼.”

망했어. 이러면 건물 구조를 알 수 없는데.

입을 꾹 다물고 있자 지척에서 왕자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발버둥이라도 쳐 볼까? 손은 안 묶였으니까…….’

라고 생각하는 순간 누가 다가와 내 손을 묶었다.

“미리 말해 주는 건데, 문으로 도망칠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이쪽 복도에는 함정이 많아.”

친절한 척하기는. 애당초 납치를 하지 않았으면 알 필요도 없는 정보였는데.

잠깐 문을 여닫는 소리가 나더니 여기저기에서 기계 소리가 났다. 가끔 쇠가 마찰하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왕자의 말이 거짓말은 아닌 모양이었다.

“라이오넬하고는 왜 틀어진 건데요? 친구였다면서요.”

침묵이 한동안 이어졌다. 내가 불편한 주제를 꺼낸 모양이었다. 굳이 두 번 물을 생각은 없었다.

조용한 왕자를 내버려 두고 이 틈을 타서 손목을 풀어 보려 했다.

계단을 내려가는지 이내 몸이 흔들렸다. 그리고 다시 잠잠해졌을 즈음에야 왕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라이오넬이 타티아손을 죽였어.”

“그건…….”

“나도 알아. 배신 때문이었지. 하지만 용서할 수가 없어.”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제법 서늘해진 바람이 볼에 닿았다. 현관을 나온 것 같은데 왕자는 한참이나 나를 내려놓지 않았다.

하지만 막 손목이 풀린 참이었기에 안대를 벗을 수 있었다.

보이는 거라고는 나무와 높은 탑, 무장한 사람들이 다였다.

네 명은 나와 왕자 근처에, 다섯 명은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함께 걷고 있었다. 완벽한 포위였다.

도망치기 힘들다는 걸 깨달았지만 산책하겠다는 명분으로 나왔으니 걷긴 해야겠지. 천천히 움직이자 왕자도 내게 보폭을 맞췄다.

내내 웃는 얼굴이었던 사람답지 않게 그는 잔뜩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라이오넬을 변호하는 말을 꺼냈다.

“라이오넬은 아직도 괴로워하고 있어요.”

그러나 왕자는 비소를 머금었다.

“그래야지. 몇 년이나 지났다고. 벌써 멀쩡해졌으면 난 그놈을 사람 취급도 안 했을 거야.”

“라이오넬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많은 자국민이 죽었을 거예요.”

“타티아손을 죽이지 않고도 해결할 수 있었어.”

왕자가 걸음을 멈췄다. 그의 얼굴에는 분노가 깃들어 있었다.

“그놈이 제 치부는 감쪽같이 숨긴 모양이야.”

전에 없던 흉흉한 분위기에 나도 모르게 주춤 물러났다.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그의 분노가 나를 향한 게 아님을 알아차렸다.

왕자는 이를 갈며 찡그리듯 미소 지었다. 납치범인 걸 알면서도 안쓰러움이 느껴질 정도로 고통스러워 보였다.

“타티아손은 세뇌당한 상태였어.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의 가족 전체가 전쟁을 위해 데사테르의 손에 이용당한 거야.”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인상을 찌푸리자 왕자가 말을 이었다.

“데사테르는 우리나라가 점점 커지는 걸 경계하고 있었어. 동맹을 맺지 않았지만 이제껏 우호적인 관계였으니 명분 없이 전쟁을 일으킬 수 없었을 거야.”

“……망명한 왕족의 신병을 요구했겠네요. 거절하면 전쟁을 일으키려고요.”

“맞아. 똑똑하네.”

그가 조금 장난스럽게 웃었다.

“여왕 폐하께서는 모르고 계셨나요?”

“아니.”

“그런데도 망명을 받아들이셨다니…….”

“욕심이 많은 분이시라.”

“대가로 뭘 받으셨는데요?”

“국경 지대에 있는 철광산과 그 주변의 비옥한 땅, 막대한 양의 황금.”

“이해할 수 없어요. 아무리 좋은 것을 받아도 지키지 못하면 의미가 없잖아요.”

그런데 욕심 때문에 전쟁의 씨앗을 나라에 들였다는 건가?

아델하르트가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희미하게 웃었다.

“지킬 자신이 있으셨던 거지. 원래 데사테르를 마음에 안 들어 하셨으니 오히려 잘되었다고 생각하셨을지도 모르고. 전쟁에서 이기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으니까.”

“질 수도 있잖아요.”

“그런 생각은 잘 안 하는 분이시라. 그래도 걱정은 되셨는지 아무런 직위도 주지 않으셨지만.”

그는 속이 답답하다는 얼굴로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들은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천천히 아투뉴의 국민이 된 것처럼 보였지, 전쟁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그들이 세뇌당한 첩자라는 걸 아무도 몰랐을 거야.”

쥐 죽은 듯이 있었다가 데사테르와의 전쟁이 무르익었을 때 군사 정보를 팔아넘긴 것이다. 하지만,

“그게 왜 라이오넬의 치부죠?”

“내가 라이오넬에게 이 사실을 알렸으니까.”

“…….”

“그놈이 우리를 진짜 친구로 여기고 있었다면 타티아손을 전쟁터에서 내보냈겠지. 그가 배신을 저지르기 전에!”

라이오넬이 그랬을 리 없다. 늑대를 죽이는 것조차 꺼리던 사람이 친구를 죽였을 리가.

그가 야심가라면 의심이라도 해 보았을 텐데 라이오넬은 권력욕이 없었다. 그가 원하는 건 살아남는 것뿐이었다.

“뭔가 오해가 있을 거예요. 소식을 늦게 접했을 수도 있고…….”

“아니. 내가 편지를 보낸 건 전쟁 초반이었어.”

“그럼 편지를 받지 못한 거 아닐까요?”

아델하르트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돌아가면 꼭 수도에 한번 들러, 넬리. 내 방 서랍에 그놈이 보낸 답장이 아직 있으니까.”

“…….”

“내게 타티아손 일은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 난 그 말만을 믿었어. 우리 셋은 형제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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