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차라리 도망치는 게 낫겠어.’
마침 축제가 끝나고 타지인들이 빠져나가는 시기였다.
아직 넬리가 납치당한 것도 모르니 나가는 사람을 검문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 틈에 섞여 나가면 무사히 도망칠 수 있다.
프레르는 머리를 굴리며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가 방을 절반 정도 가로질렀을 때, 문가에 서 있던 아레트가 움직였다.
붙잡히는 건가 싶어 프레르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으윽…….”
아레트가 프레르를 스쳐 지나가자마자 등 뒤에서 낮은 신음이 들렸다.
“주인님. 해독제부터 드십시오.”
라이오넬이 깨어난 것이다.
‘되는 일이 없네.’
프레르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여기서 쌩하니 나가면 자신은 수상한 사람이라고 소리치는 꼴이었다.
그는 내키지 않지만 억지로 몸을 돌렸다.
몇 걸음 다가가는데 이마를 짚고 있던 라이오넬이 물었다.
“넬리는?”
하필 일어나자마자 찾는 게 넬리라니.
프레르는 무의식적으로 방문을 힐끔거렸다. 마지막 순간에 방문을 향해 달리던 넬리의 심정이 이해가 되는 서글픈 순간이었다.
‘이래서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해.’
그가 반쯤 자포자기하고 있는 사이 라이오넬은 집사에게 넬리에 대한 말을 전해 들었다.
라이오넬이 프레르를 보았다. 막 깨어났음에도 그의 붉은 눈동자는 날카로움을 잃지 않았다.
집사에게서 약병을 받아 든 라이오넬이 프레르에게 병을 내밀었다.
약에 아무런 장난도 치지 않았지만 프레르는 오금이 저렸다.
그는 군말 없이 다가가 약을 삼분의 일쯤 마셨다.
“앉아.”
라이오넬이 의자를 가리켰다. 독이 없는지 확인하려면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프레르를 빤히 바라보다 아레트에게 명령했다.
“아레트. 너는 넬리를 찾아오도록. 만약 넬리가 위험한 상황이라면 즉결 처분도 허용하겠다.”
“예, 각하.”
아레트가 나가자마자 프레르는 속이 타기 시작했다.
넬리의 행적은 한여름에 찬물을 들이켜는 것만큼이나 쉽다. 당나귀 발자국만 따라가면 되니까.
프레르가 믿을 구석이라고는 아델하르트뿐이었다. 그가 기절한 넬리를 데려 나가면서 그녀가 오두막에 왔었다는 흔적을 지워 주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 왕자님이 친히 발자국을 지워 주진 않았을 것 같지만.’
프레르는 걸리면 자신이 어디 있는지 말하라는 명령을 떠올렸다. 정말로 프레르가 불구가 되거나 목숨을 잃는 일이 없길 바라서 한 말이었다.
그 마음에 거짓은 없었다.
그러나 프레르는 알고 있었다. 프레르가 발각되지 않길 바랐다면 아델하르트는 그런 명령을 내리지조차 않았을 것이다.
‘이걸 어쩌지. 공작님 무서운데.’
직접적인 명령이 아니었으니 이행해도 그만 아니어도 그만이었다
첩자가 발각되는 건 목숨을 내놓아야 할 만큼 위험한 일이다. 어중간한 명령보다는 제 안위가 우선이었다.
‘역시 도망쳐야겠어.’
프레르가 도망쳐도 라이오넬은 기어이 아델하르트를 추적해 넬리를 찾아낼 것이다.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다.
그는 아레트가 돌아오기 전에 해독제에 문제가 없음을 증명하고 성 밖으로 나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군.”
“아. 램프를 켜 놓고 나온 것 같아서요. 불나면 큰일이잖습니까.”
은근슬쩍 돌아가고 싶다는 기색을 흘렸지만 라이오넬의 표정은 변함없었다.
그는 프레르의 등에 식은땀이 흐를 때까지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프레르가 가져온 해독제의 냄새를 맡았다.
아그튬반과 상성이 나쁜 것은 알코올뿐이다. 술 냄새도 나지 않고 먼저 먹은 프레르도 멀쩡했다.
라이오넬은 그제야 안심하고 해독제를 마셨다.
병이 비는 것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프레르가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났다.
“그럼 해독제도 드셨으니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프레르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밖으로 나왔다. 다행히 라이오넬은 그를 붙잡지 않았다.
집에 들를 시간은 없었다. 그는 시가지에서 후드 하나를 사 깊게 눌러쓰고 바로 인파 속에 섞여 들었다.
강물처럼 흐르는 사람들 사이를 교묘하게 파고들어 점점 앞질러 갔다.
성문이 가까워질수록 신원을 확인하는 줄이 정교해졌다. 바로 옆에서 줄을 통제하는 병사들이 보였다.
프레르는 늦게 합류한 것치고는 제법 앞쪽에 자리를 잡았다.
신원 확인은 빠르게 이뤄졌고 줄 역시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후드 좀 벗어 보쇼.”
간이 책상에 앉은 병사가 프레르에게 말했다. 프레르는 순순히 후드를 벗었다.
“응? 목장지기잖아.”
“네.”
“어디 가게?”
“아버지가 편찮으셔서 잠깐 다녀오려고요.”
“아유. 효자네. 조심히 다녀와.”
병사는 프레르의 이름과 목적을 간단히 적고 나가 보라고 손짓했다.
프레르가 어설프게 인사하며 막 외성의 문을 나가려 할 때였다.
검은 그림자가 그의 머리 위를 훅 덮쳤다. 그는 반사적으로 머리를 감싸며 단검을 뽑았다.
곧 앞에서 발굽이 땅을 거세게 디디는 소리가 들렸다. 라이오넬이 말을 탄 채로 프레르의 머리를 뛰어넘은 것이었다.
“투항해라.”
라이오넬이 검을 뽑아 겨눴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짙은 피로감이 묻어 있었고, 두통에 시달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붉은 두 눈동자만큼은 형형했다.
프레르는 양손을 펼쳐 머리까지 들어 올렸다. 쥐고 있던 단검은 당연히 바닥에 떨어졌다.
라이오넬은 말에서 내려 단검을 걷어차 버리고 검 끝으로 프레르의 턱을 들어 올렸다.
“넬리는 어딨지? 네 정체는? 누가 너를 이곳에 심어 두었나.”
“그건…….”
프레르는 혹시라도 빠져나갈 구멍이 있나 눈을 굴렸다. 그러나 이내 제 주변을 원형으로 둘러싼 병사들을 보고 도주를 포기했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럴 줄 알았지. 고문…….”
“대신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프레르의 흐릿한 말투가 라이오넬의 말을 날카롭게 잘라 냈다.
그는 깍지 낀 손을 뒤통수에 대 완전히 항복한 자세를 취하며 무릎을 꿇었다.
“전 아픈 것도, 죽는 것도 싫거든요. 그러니까 인질 겸 안내자가 되겠습니다.”
“…….”
“가는 길에 이것저것 물어보세요. 성심성의껏 대답할게요.”
“…….”
“아니면 인질 교환할 때 저를 쓰셔도 되고요. 쓸모가 있을 겁니다. 왕자님이 저를 제법 아끼시거든요.”
“함정인가?”
“항복입니다.”
찜찜할 정도로 손쉬운 제압이었다.
* * *
“여기가 어디…….”
목이 뻐근하고 머리도 아프다. 몇 번 깨어났다가 바로 기절했던 게 어렴풋이 떠올랐다.
자리에서 일어나 황급히 주변을 둘러봤다. 방이 쓸데없이 넓고 호화롭다.
묶이지도 않았고 발목에 족쇄도 없었다. 하지만 문과 창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나 납치당한 거야……?’
머릿속이 어지럽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지?
손발이 덜덜 떨려 그냥 침대에 주저앉았다.
오두막에서 무슨 짓을 해서든 도망쳤어야 했다. 아니, 애초에 따라 들어가면 안 되었던 건데…….
무엇보다 아무 말 없이 사라져서 라이오넬이 많이 걱정하고 있을 거야.
‘라이오넬은 괜찮을까?’
아그튬반을 먹었는데 혹시 잘못되기라도 하면…….
아냐. 프레르가 걱정할 거 없다고 했으니까 나쁜 생각 하지 말자. ……근데 프레르는 첩자잖아.
상상 속에서 라이오넬의 몸이 수십 번이나 고꾸라졌다. 태어나서 처음 손톱을 물어뜯었다.
가만히 있다가는 정말 미칠 것 같았다.
‘정신 차려! 정신 차리고 생각을 하자. 라이오넬에게 돌아가야지.’
얼굴을 감싸고 자책하다 양 볼을 찰싹찰싹 두드렸다.
문을 열려고 애써 보고 창문도 두드려 봤다.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으나 창문에는 티가 나지 않게 잠금을 풀 수 있는 장치가 있었다.
‘탈출할 수 있어!’
희망을 품고 끙끙거리며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금세 닫았다.
‘탈출할 수 없어…….’
창문과 지상의 거리가 까마득할 정도로 멀었다. 잠깐 커튼이나 이불을 이어 붙여 밧줄이라도 만들어 볼까 생각했다.
정말 잠깐만 고민했다.
내 악력과 팔근육으로는 3분의 1도 내려가지 못하고 추락할 게 뻔했다.
심지어 지금은 깨어난 지 얼마 안 된 데다가 배까지 고파서 온몸에 힘이 없었다.
‘문을 통해 나가는 방법밖에 없겠어.’
철천지원수가 된 것처럼 문을 노려보고 있는데 인기척이 들렸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일단 의자를 옆에 가져다 뒀다.
여차하면 던져 버려야지! 아니면 휘두르든가.
오래 버틸 순 없으니 상대가 방심한 순간을 노려서 한 방에 끝내야 한다.
마음을 다잡으며 입술을 악무는데, 문이 열렸다.
“응? 일어났네.”
왕자 놈이 물병과 컵이든 쟁반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가 문을 닫자마자 밖에서 철컥, 하는 소리가 들렸다. 보초를 서는 사람이 있다는 뜻이었다.
점점 낮아지는 탈출 확률에 참담해하고 있을 때, 왕자가 침대 옆에 앉았다.
정확히는 내가 가져다 둔 의자에 앉았다.
여차했을 때 무기로 쓰긴 그른 모양이다.
“어디 아프진 않고?”
“날 어떻게 할 셈이죠?”
“뭘 어떻게 할 생각은 없는데……. 사실 급해서 그냥 데려온 거거든. 풀어 주면 분명 하디거가 왕자였다고 말했을 거잖아. 그렇지?”
그렇지. 온 동네 사람들이 다 알도록 성으로 뛰어가면서 소리쳤을지도 모른다.
내가 입을 꾹 다물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왕자가 손수 컵에 물을 따라 나에게 내밀었다.
“일단 목부터 축일래? 오래 기절해 있어서 목이 마를 거야.”
갈증이 심하긴 했다. 그래도 마시지 않았다.
뭘 탔을 줄 알고 저걸 냉큼 받아먹어. 내가 바보인 줄 아나?
애써 고개를 돌리고 외면하자 그가 물을 반쯤 마시고 내게 내밀었다. 안 마시고 버티자 그가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더니 물잔을 내려놓았다.
“독은 안 탔어. 안 믿을 것 같지만.”
“안 믿어요.”
왕자가 가증스럽게도 퍽 곤란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풀어 주세요. 어차피 저는 여기가 어딘지도 몰라요.”
“그렇지.”
“라이오넬에게 돌아가려면 한참 걸릴 거예요. 그 시간 동안 왕자님은 왕자님이 하디거가 아니었다는 증거를 만들면 되잖아요.”
증거가 있으면 내 말을 믿는다고 해도 왕자를 어떻게 할 순 없을 것이다.
“나도 넬리 말대로 해 주고 싶은데, 유감스럽게도 아직 알터우드 공작령 근처거든.”
“……라이오넬이 날 구하러 올 거예요.”
“알아.”
왕자가 언제 곤란한 얼굴을 했냐는 듯 생긋 웃었다.
“내가 바라는 게 그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