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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제발 좀 망하세요 (89)화 (89/130)

89화

“…….”

대답하지 않았으나 딱히 화내는 기색은 없었다. 그가 시종일관 부드러운 미소를 유지하며 내게 물었다.

“내가 누군진 알겠어? 벌써 몇 번 못 알아봤으니까 이번엔 알아봐 줬으면 하는데.”

그는 하디거다.

하지만 그걸 묻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나도 안다. 나는 잠시 그를 살폈다.

머리는 눈부신 금발이었고, 눈동자는 푸른 하늘과 같았다. 목소리 톤은 평소보다 조금 낮은데 반에 말투는 묘하게 장난스러웠다.

얼굴은 모르는 사람이었으나 분위기가 익숙했다. 게다가 날 알고 있는 금발에 푸른 눈이라면…….

‘왕자님?’

경악해 나도 모르게 소리치려다 반사적으로 입을 막았다.

왕자님이 여길 왜 온 거지? 거기다 변장까지 하고.

심지어 영지에 머무는 동안 딱히 한 것도 없어 보였다. 설마,

“라이오넬에게 독을 먹인 게…….”

“응? 아니야. 무서운 소리를 하네, 넬리.”

“제가 그걸 어떻게 믿죠?”

“우린 친구잖아.”

뻔뻔한 얼굴로 친구를 운운하다니. 이제껏 나를 속여 놓고!

분노가 울컥 치밀어 두려움을 뒤덮었다. 나는 무서워서 떨던 것도 잊고 그를 노려봤다.

그러자 왕자가 곤란하다는 듯 웃으며 프레르를 봤다.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더니 다시 약을 만들던 곳으로 가 버렸다. 하디거가 그의 뒷모습을 빤히 보다가 내 주먹을 제 손에 올려놓고 토닥였다.

“그렇게 화내지 마, 넬리.”

“내 이름 부르지 마세요.”

“너무 차가운데. 이렇게 화낼 줄 몰랐어. 미안해.”

“…….”

“정말 불순한 의도로 들어온 거 아니야. 말했잖아. 넬리와 친해지고 싶다고.”

“교제하자고 하셨죠.”

프레르가 고개를 홱 돌려 아델하르트를 보았다. 파렴치한을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가 다가와 내 손을 왕자의 손에서 빼내어 주었다. 왕자가 억울하다는 듯 해명했지만 프레르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첩자인 걸 들켰는데 둘 다 왜 이렇게 멀쩡하지? 가벼운 분위기에 도무지 적응할 수가 없었다.

“나는 넬리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고 싶어서 온 거야.”

“왕자님쯤 되시면 정식으로 들어올 수 있을 텐데요.”

“라이오넬이 허락할 리 없지. 내가 가면무도회에서 공공연하게 넬리에게 관심을 보였으니까. 그것 말고도 여러 이유가 있지만.”

왕자가 씁쓸한 미소를 머금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내 신분을 알면 넬리가 행동을 조심하니까, 어떤 사람인지 정확하게 알기도 힘들어.”

“그래서요?”

“목적은 넬리가 괜찮은 사람이다 싶으면 내 쪽으로 오도록 회유하는 거였지. 실패해도 친구로는 지내고 싶었어. 그래서 떠나기 전에 정체를 밝히려고 한 거야.”

도대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모르겠다.

친하다고 여긴 사람이 이성적으로 회유하려고 하면 믿고 싶어지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신뢰하고 마음을 놓는 순간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다.

라이오넬은 항상 이런 상황에 놓이며 살았던 걸까?

그러다가 배신당하고 괴로워하고, 줄곧 그렇게 살다가 차라리 모든 걸 의심하면서 혼자가 되기로 한 걸까?

이를 악물며 고개를 들었다.

“그럼 일단 라이오넬에게 해독제를 줄 수 있게 해 주세요.”

“넬리가 나한테 말을 편하게 하면.”

왕자가 턱을 괴며 느물거렸다.

“참고로 내 이름은 아델하르트야. 길면 아델이라고 불러도 좋아.”

싫다. 하지만 본심을 내뱉는 실수는 하지 않았다.

“알겠어. 일단 지금은 성으로 돌아갈래.”

“그건 곤란한데.”

“……그냥 나랑 친해지고 싶어서 왔다며. 그럼 상관없는 거 아니야?”

“나는 그런데, 쟤는 아니거든.”

아델하르트가 손가락으로 프레르를 가리켰다.

그는 해독제 제작을 마쳤는지 녹갈색 액체가 든 유리병을 손에 들고 맹한 표정으로 조리대에 기대 있었다.

“게다가 넬리가 내 정체를 알잖아. 공작이 독약을 먹었는데 거기에 왕자가 정체를 숨기고 숨어 있었다는 누가 범인으로 몰리겠어?”

“비밀로 할게요.”

물론 돌아가자마자 말할 생각이다. 아델하르트 역시 내 말을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는 그냥 웃어넘기고 말을 돌렸다.

“알터우드 공작이 무슨 독을 먹었는데?”

알려 주기 싫어 입을 다물었더니 나 대신 프레르가 대답했다.

“아그튬반인 것 같던데. 복용한 지 30분은 지났어요?”

나는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응. 한참.”

“그럼 걱정할 필요는 없을 거예요. 보통 즉사할 정도면 그 안에 죽거든요.”

“정말?”

“네. 드물게 해독 과정에서…….”

“잠깐.”

아델하르트가 프레르의 말을 막고 가만히 밖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다.

“말발굽 소리가 들려. 누가 오는데?”

만사에 의욕이 없는 것 같던 프레르의 얼굴이 서서히 굳었다. 아마 나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은 표정일 것이다.

영지 내에서 말을 자유롭게 탈 수 있는 사람은 기사들밖에 없다.

이 시간에 기사가 프레르에게 온다는 것은 누군가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높은 확률로 약을 먹은 라이오넬일 가능성이 컸다.

“엘링.”

“예?”

생소한 이름에 프레르가 반응했다.

나는 다시금 치미는 배신감에 숨을 억눌렀다. 이를 악무는 사이에도 두 사람의 대화는 이어졌다.

“해독약 꼭 라이오넬에게 전해. 기왕이면 마시는 것까지 확인하고 와.”

“네.”

해독약을 주고 마시는 것까지 보고 오라니. 악의 없이 온 거라는 사람이 내리는 명령치고는 찜찜한 구석이 있었다.

역시 이 틈에 라이오넬을 확실하게 독살하려는 걸까?

‘라이오넬에게 첩자가 만든 해독제를 먹게 할 순 없어. 돌아가서 알려야 해.’

앞에는 하디거가 있다. 힐끔 뒷문을 보았다. 제법 거리가 있었다.

비명을 지르면 기사가 듣지 않을까? 힘껏 소리치기 위해 숨을 들이마시는데 하디거가 내 입을 턱 막았다.

그가 몸부림치는 나를 뒤에서 끌어안아 제압하고 대화를 이었다.

“약 주고 너도 도망쳐.”

“네.”

“혹시라도 붙잡히면 내가 어디 있는지 그냥 말해. 그러면 라이오넬 성격상 널 죽이거나 고문하진 않을 테니까.”

“어휴…….”

프레르가 끊어질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하디거가 웃음을 터트렸다. 순간, 그의 힘이 조금 느슨해졌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의 발을 콱 밟고 몸을 비틀었다.

‘풀렸어!’

도움을 요청해야 해. 몸을 틀어 뒷문을 향해 달리며 소리를 지르려고 했다.

그러나 내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한 발짝을 떼기도 전에 목덜미에 강한 충격이 느껴졌다.

-쾅쾅쾅!

다급하게 노크하는 소리를 끝으로, 의식이 멀어졌다.

* * *

레반스는 다급하게 오두막의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잠시 소란스러운 기척이 들린다 싶더니 이내 문이 열렸다. 그는 반사적으로 내부를 살폈다.

의자 하나가 넘어져 나뒹굴고 있었다.

“흐아함. 무슨 일이세요. 이 시간에.”

프레르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엉덩이를 문질렀다. 누가 봐도 의자에서 졸다가 거친 노크에 놀라 넘어진 사람 같았다.

“아그튬반의 해독제가 필요합니다.”

“아항. 들어오세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밖에 있을 테니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프레르는 힐끗 안을 보았다. 찻잔은 대충 조리대 쪽으로 치웠고 아델하르트는 기절한 넬리와 함께 침대 밑에 숨어 있었다.

일말의 의심조차 남기지 않으려면 레반스를 안으로 들이는 게 나았다.

“최대한 빨리할 테니까 들어와 계세요. 손님을 세워 두는 게 좀 그래서…….”

“부탁드리겠습니다.”

프레르가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자 레반스가 마지못해 안으로 들어왔다.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프레르도 그를 방 안에 오래 두고 싶지 않았다.

그는 짧게 약 만드는 시늉을 하고 미리 만들어 두었던 해독제를 손에 쥐었다. 몸을 돌리자마자 레반스가 벌떡 일어났다.

“가시죠.”

“먼저 나가 계세요. 불 끄고 나갈게요.”

레반스가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갔다. 프레르는 불을 끄면서 침대를 향해 작게 속삭였다.

“뒷문 열어 둘게요.”

그리고 곧장 레반스와 함께 성으로 향했다.

도착해 살펴본 라이오넬의 상태는 심각하지 않았다. 조치를 잘 취한 것인지 눈에 띄는 중독 증세도 없었다.

“아그튬반은 치사량이 아니면 자연스럽게 해독됩니다. 그 과정에서 피로를 극심하게 느끼기 때문에 가끔 쓰러지는 사람이 있어요.”

그의 말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인상을 찌푸린 채 누워 있는 라이오넬을 집사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그럼 몸에는 이상 없으신 겁니까?”

“한동안 몸이 무겁고 잠을 많이 주무실 겁니다. 그 증상도 해독제를 먹으면 괜찮아질 테니 의식이 돌아오시면 드리세요.”

프레르가 집사에게 만들어 온 해독약을 건넸다.

“그리고 두통이 있으셔도 다른 약은 드시지 못하게 하시고요. 목숨이 위험한 건 아닌데, 간에 안 좋아요.”

“명심하겠습니다.”

집사가 약병을 받아 들었다.

프레르는 힐끗 라이오넬을 보았다.

아델하르트는 해독제 먹는 걸 확인하라고 했지만 프레르는 심장이 떨려 더는 여기 있고 싶지 않았다.

그는 지금쯤 기절한 넬리를 데리고 비교적 감시가 덜한 강을 통해 도주하고 있을 제 왕자님을 떠올렸다.

‘나도 빨리 도망이나 쳐야지.’

간단한 짐만 가져가야겠다. 머릿속으로 챙길 것을 정리하며 프레르가 몸을 돌리려 할 때였다.

집사가 갑자기 말을 걸었다.

“그런데 넬리 님은 못 보셨습니까? 프레르 씨에게 간다고 했는데 안 보이시는군요.”

프레르는 저도 모르게 라이오넬을 힐끗 보았다.

라이오넬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프레르가 아무렇지 않게 머리를 긁적였다.

“못 봤는데요. 길이 엇갈렸나?”

“한참 전에 나가셨습니다.”

“그래요? 그럼 하디거한테 갔나……?”

프레르는 뻔뻔하게 자기 고용주를 팔아먹었다.

눈앞에서 기절한 넬리가 침대 밑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본 사람이라고는 상상도 못 할 정도로 맹하고 어리둥절한 목소리였다.

“그건 아닐 겁니다. 두통약을 받으러 간다고 하셨으니까요.”

“아항. 그럼 하디거한테는 안 갔겠네요.”

프레르가 태평하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별일 없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아, 혹시 모르니까 제가 돌아가는 길에 하디거에게 들러 보겠습니다.”

“번거롭겠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그럼 저는 이만.”

인사를 하며 돌아서는 순간에도 마음이 급했다.

아무런 언급이 없었던 것을 보면 레반스는 벡시아드리아 라렐리우스를 못 본 게 분명했다.

그러니 라이오넬이 깨어나 추적을 명령하기 전에 꽈당이를 방생하고 당나귀 발자국을 지워야 한다.

아니면 지금 이대로 도주하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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