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단검을 뽑아 날 위협한 건 아니지만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긴장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을까?
자꾸만 힘이 들어가려는 어깨를 늘어트리려 애쓰며 프레르를 보았다.
그는 내 손목을 놓고 평소와 별반 다르지 않은 얼굴로 늘어지게 하품이나 하고 있었다.
아직 내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하지만 여기서 도망가면 쫓아올지도 모른다.
‘도망칠 수 있을까?’
목초지 근처는 인적이 드물다. 기사들이 가끔 순찰을 다니긴 하지만 지금도 있을지 알 수 없다.
꽈당이를 타고 도망쳐도 누굴 만나기도 전에 따라잡힐 가능성이 컸다.
“넬리.”
“으응?”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차 마시고 가라니까요.”
“아, 응.”
대답하자마자 프레르가 몸을 돌렸다. 곧장 집으로 가지 않고 나를 보고 있는 게,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덩달아 서 있으려는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그를 따라 걸었다. 프레르가 문을 열고는 먼저 들어가라는 듯 비켜섰다.
그러자 창가에 앉아 있던 작은 새가 다시 푸드덕 날아갔다.
“왜요?”
“저 새, 프레르가 키우는 거야?”
“아니요. 초면인데요.”
프레르가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저었다.
거짓말하는 것 같진 않은데 이상하게 자꾸 꺼림칙하다.
어쨌든 도망치기엔 늦었다. 수다를 떨다가 분위기가 풀리면 몰래 나오고, 아니면 더 기다려야지.
내가 늦게까지 안 들어가면 라이오넬이 눈치챌 테니까. 데리러 올지도 몰라.
“프레르네는 오랜만인 거 같아.”
“요즘 맨날 하디거 집에서 만났으니까요.”
자리에 앉자 프레르가 움직이는 것을 보다가 문득 피곤해 보이던 라이오넬의 얼굴이 떠올랐다.
‘……생각해 보니 이상해.’
라이오넬은 쉽게 지치는 사람이 아니다. 게다가 오늘은 내 무릎을 베고 낮잠까지 잤다.
그런데 손님 배웅 좀 했다고 피곤한 기색을 내비치다니……. 그러고 보니까 두통도 있다고 했지.
증상만 약할 뿐이지 내가 죽었을 때와 똑같았다.
‘역시 난 독을 먹어서 죽었던 걸까? 그럼 라이오넬도 지금 중독된 상태라는 거잖아.’
손끝에 피가 통하지 않는 것만 같았다.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프레르가 차를 내려놓으며 내 앞에 앉았다.
“왜 그래요?”
“프레르. 혹시 톡 쏘는 맛이 나는 독 같은 거 있어?”
프레르가 그런 게 왜 궁금하냐는 얼굴로 날 보며 대답했다.
“아그튬반이 좀 톡 쏴요.”
“저번에 말해 준 그 독이지? 피곤해지고, 고통스럽게 죽는다던……. 혹시 먹으면 두통도 느껴?”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정말 독살당한 거라니…….’
뒤통수를 세게 맞은 것처럼 같았다. 나는 재빨리 고개를 저어 아득해지려는 정신을 붙잡았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내가 먹었어야 할 독을 라이오넬이 먹었다. 어지간한 독에 내성이 있다고 했지만 역시 불안했다.
“해독제는 어떻게 만들어?”
다급하게 물어보자 프레르가 일어났다.
“당장 필요한 거예요?”
“……응.”
“기다려 보세요. 만들어 드릴게요.”
그가 제법 빠르게 움직였다.
그를 믿을 수 있을까? 만약 프레르가 첩자라면 이때를 틈타 라이오넬을 독살하려고 할 수도 있는데.
아니야. 아직 첩자인 게 확실한 건 아니잖아. 죽이려면 진작에 죽였겠지.
1초에도 수십 번씩 생각이 왔다 갔다 했다.
안 되겠다. 지금 당장 라이오넬에게 가서 알려야겠어.
혹시 공작성에 해독약이 있을지 모르니까. 프레르가 만든 약을 먹는 건 최후의 수단이 되어야 한다.
도망치려거든 그가 다른 일을 하는 지금뿐이다.
“프레르. 나는 성으로 돌아가야겠어. 해독약 완성되면 가져다줘!”
그가 대답하기도 전에 빠르게 달려 문을 열었다.
뛰쳐나가려던 나는 단단한 몸에 부딪혀 가로막혔다.
고개를 들자 안대로 눈을 가린 얼굴이 보였다.
“안녕, 넬리.”
하디거가 프레르의 집에, 그것도 이 시간에 웬일이지?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다리를 절던 하디거가 멀쩡한 걸음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그가 손을 들어 안대를 벗었다. 검은 천에 가려져 있던 눈은 뽑혔다는 소문과 달리 멀쩡했다.
게다가 언젠가 한 번 본 적 있는 것 같은 하늘색이었다.
“우리 얘기 좀 할까?”
그가 눈매를 나긋하게 휘며 미소 지었다.
“언제부터 의심했어, 넬리?”
목구멍을 할퀴는 듯한 갈증을 무시하며 시치미를 뗐다.
“의심이라니?”
그러나 모른척한 게 무색하도록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하디거가 천천히 나에게 다가왔다. 그 속도에 맞춰 뒷걸음질 치며 뒷문이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가늠했다.
‘조금만 더 가면 될 것 같은데…….’
그가 조금이라도 한눈팔면 바로 뒤돌아 뛰자. 결심하기가 무섭게 하디거가 가발을 벗었다. 때를 놓치지 않고 뒤로 돌려는데,
“그렇게 말하면 겁먹잖아요.”
어깨 위로 손이 올라왔다. 약을 만들고 있던 프레르가 어느새 내 뒤에 서 있었다.
* * *
“각하. 피곤해 보이십니다.”
머리를 짚고 있던 라이오넬이 고개를 들었다.
레반스가 책상을 정리하며 라이오넬의 안색을 살피고 있었다.
“또 못 주무셨습니까?”
“아니.”
“과로하셨습니까?”
“아니.”
레반스는 거짓말하지 말고 들어가서 좀 쉬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 보니 만찬 때만 해도 라이오넬의 안색은 멀쩡했었다.
그가 급격하게 피곤함을 호소하기 시작한 건 손님들을 배웅하고 난 뒤였다.
음험한 데본더스가 무슨 짓이라도 한 걸까?
레반스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라이오넬에게 다가갔다.
“그러면 독이라도 드셨습니까?”
“아마.”
라이오넬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레반스의 눈이 경악으로 크게 벌어졌다가 한참 뒤에야 원래의 크기를 되찾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멀쩡하십니까?”
“게워 냈다.”
“언제 게워 내셨습니까?”
“만찬장에서 나오자마자.”
먹는 독은 바로 게워 내면 몸에 흡수되는 양을 줄일 수 있다. 레반스가 안도한 얼굴로 긴 숨을 내쉬었다.
“어떤 독인지는 아십니까?”
“조사하라고 했으니 곧 나오겠지.”
“어디 들어 있던 겁니까?”
“딸기 콩포트.”
레반스는 넬리가 자신의 딸기 콩포트 푸딩을 라이오넬의 샐러드와 바꿔 주던 장면을 어렵지 않게 떠올렸다.
넬리가 라이오넬과 음식을 바꾸지 않았더라면 독은 그녀가 먹었을 터였다.
“넬리 님을 노린 거군요.”
“그래.”
“본인도 압니까?”
“아직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야.”
“그래도 곧 눈치채겠군요.”
두 사람의 대화가 잠깐 끊긴 순간, 문을 두어 번 두드리더니 아레트가 안으로 들어왔다.
라이오넬이 안경을 벗어 내려놓으며 물었다.
“알아냈나?”
“예. 딸기 콩포트에…….”
“꺄아아악!”
높고 날카로운 비명이 아레트의 목소리를 집어삼켰다.
라이오넬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몸이 조금 휘청거리자 레반스가 놀라 부축했다.
곧 집무실을 열고 하인이 뛰어들어 왔다.
“공작님! 시, 시체가……!”
하필 이런 때에 시체라니. 만일 독을 넣은 사람이 자결한 것이면 일이 복잡해진다.
그는 레반스를 밀어냈다. 이를 악물어 두통을 가라앉히고 하인을 따라갔다.
하녀 휴게실에 마른 체구의 여자가 죽은 채 뉘어 있었다.
그녀의 목에 선명하게 난 밧줄 자국을 바라보는데 아레트가 정황을 살피고 라이오넬에게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편지 한 장이 들려 있었다. 유서였다.
[갑자기 신임을 얻는 관리인을 질투해 아그튬반으로 독살하려 했습니다. 들킬 게 두려워 자결합니다. 죄송합니다.]
짧은 글 밑에는 하녀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각하께서 드신 딸기 콩포트에 들어 있던 독도 아그튬반이었습니다.”
손아귀에 있던 유서가 처참하게 구겨졌다. 범인이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으니 수사를 진행할 명목이 없다.
넬리에게 독을 먹이도록 사주한 놈이 완벽하게 꼬리를 자르고 도망간 것이다.
‘점점 교묘해지는군.’
제 목숨을 노린 거라면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넬리를 노렸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라이오넬은 급격하게 밀려오는 피로와 두통을 애써 무시하며 아레트에게 명령했다.
“지금 당장 독의 출처를…….”
정확히는 명령하려 했다. 말을 끝맺지 못하고 그의 몸이 무너졌다.
“각하!”
레반스가 놀라 달려들었다. 그러나 움직임은 아레트가 더 빨랐다. 그는 라이오넬을 들쳐 업고 방으로 달렸다. 레반스가 빠르게 그를 따라갔다.
소란을 들은 집사가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레반스와 함께 라이오넬을 아레트의 등에서 내려 침대에 눕혔다.
집사가 맥박과 호흡, 피부를 살피는 걸 보며 레반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분명 아까 다 게워 내셨다고 했는데…….”
“독소가 완전히 배출되지 않고 남아 있는 모양입니다.”
집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레반스가 방을 박차고 나갔다.
* * *
뒷문으로 가는 길목마저 프레르에게 막혔다. 나는 어깨를 잡힌 채로 주변을 둘러봤다.
옆에 제일 큰 창이 있긴 했지만 그 앞에는 침대가 놓여 있었다.
프레르보다 빠르게 움직일 자신도 없을뿐더러 장애물까지 있으니 창문으로 도망칠 순 없었다.
‘어떡하지?’
손끝이 차갑게 굳는 게 느껴졌다.
날 어쩌려는 걸까? 정체를 눈치챘으니 죽여서 증거를 없애려고 하지 않을까?
힘겹게 숨을 쉬고 있는데 하디거가 다가오며 곤란한 듯, 미안한 듯 웃었다.
“왜 이렇게 겁먹었어. 무서워하지 말라고 미소도 유지하고 있는데.”
그가 장난스럽게 검지로 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이미 공포에 질릴 대로 질린 상태라 그런가 그 모습에 소름이 끼쳤다.
“흡!”
입을 꾹 다물고 숨을 참는데 프레르가 내 어깨를 잡은 채로 걸어 탁자로 향했다.
“웃으니까 더 무서워하죠.”
“그런 말 못 들어 봤는데. 잘생긴 걸 보면 긴장이 좀 풀리지 않나?”
“자기 입으로 할 소립니까?”
나를 의자에 앉히면서 프레르와 하디거가 평소처럼 농담을 주고받았다. 도망가지 못하게 하려는 듯 내 옆에 바짝 붙어 앉은 건 평소 같지 않았지만 말이다.
장난스러운 대화로 내 긴장을 풀려는 거겠지? 방심한 순간에 목숨을 노릴지도 모른다.
아니면 친근한 척해서 정보를 빼 가려고 하거나…….
머릿속으로 그들의 의도와 도망칠 방법을 궁리하고 있을 때, 하디거가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열심히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