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제발 좀 망하세요 (87)화 (87/130)

87화

라이오넬을 데려갈 수 없으면 차라리 옆에서 못 먹게 하는 게 나았다. 메리에게 괜찮아졌다고 말하려는 순간, 라이오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 저도 몸이 좋지 않아 먼저 일어날 생각이었습니다. 로저. 손님들 배웅할 때 부르도록.”

“예, 주인님.”

라이오넬이 앞서가고 나는 메리에게 기대 그를 뒤따랐다.

만찬장에서 어느 정도 멀어지자 라이오넬이 걸음을 멈췄다.

“먼저 방에 가 있어.”

“라이오넬은요?”

“할 일이 있어서. 금방 방으로 갈게.”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축하려는 메리에게 괜찮다고 말한 뒤 혼자 걸었다.

방으로 들어왔지만 불안함 때문인지 마음 편하게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다시 라이오넬한테 가야겠다고 결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였다.

문이 열렸다. 라이오넬이 멀쩡한 안색으로 들어오며 메리에게 말했다.

“이제 됐으니 가 보도록.”

“네. 공작님.”

메리가 뒤로 물러났다. 그녀는 걱정스러움 반, 흐뭇함 반인 눈으로 나를 보다가 방을 나갔다.

라이오넬이 내 옆에 앉았다. 그는 내 어깨에 팔을 둘러 끌어안고는 조심스럽게 볼이며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저……. 사실 아픈 데 없어요.”

“알아. 그래도 기대고 있어.”

군말 없이 몸을 의지한 채 생각에 잠겼다.

샐러드는 열대 과일이 들어간 드레싱을 썼으면 톡 쏘는 맛이 날 수 있다.

그런데 딸기 콩포트는 그냥 딸기를 설탕에 졸인 거잖아. 톡 쏘는 맛이 날 수 있나?

게다가 예전에 나는 먹자마자 죽었잖아. 라이오넬은 괜찮아 보이는데…….

“라이오넬. 어디 아픈 데 없어요?”

갑자기 무슨 말이냐는 듯 그가 웃었다.

“딸기 콩포트에 독이라도 들어 있을까 봐 걱정했나?”

“맛이 이상했다면서요.”

“그랬지. 어지간한 독에는 내성이 있어서 괜찮아. 콩포트도 맛만 본 정도고.”

라이오넬이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었다.

“창백해. 좀 쉬어야겠어.”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나를 떨어트려 놓고 옆으로 물러났다.

이번엔 자기가 베개가 되어 주겠다는 듯 허벅지를 툭툭 두드렸다. 옆으로 누워 조심스럽게 머리를 올려놓자 그가 웃었다.

그리고 종을 울려 하인에게 집무실에 있는 서류를 가져오게 했다.

“일하려고요?”

“축제도 끝났으니, 해야지.”

……정말 대단하다. 종이 넘기는 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나도 일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일어나려는데 라이오넬이 손바닥으로 내 눈을 덮었다.

“아직 창백해.”

“멀쩡해졌는데!”

그가 손을 잠깐 치웠다가 장난기 어린 얼굴로 고개를 젓고는 다시 내 눈을 덮었다.

손끝이 이마와 머리카락의 경계를 살살 어루만진다.

간지러워 도리질 치다가 그의 손을 잡아 내렸다.

순순히 잡혀 줬으면서 다시 올라와 내 얼굴을 덮으려고 하길래 깍지 낀 채 배 위에 올려놨다.

정면으로 돌아눕자 라이오넬의 얼굴이 바로 보였다.

‘그냥 기분 탓이었나?’

딸기 콩포트에 독이 들어 있었다면 지금쯤 증상이 나타났을 것이다.

하지만 라이오넬은 평온해 보였다.

‘다행이다.’

안도의 숨을 내쉬며 몸에 힘을 풀었다.

얼마 되지 않아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주인님. 손님들 가신다고 합니다.”

라이오넬이 서류를 든 채로 일어났다.

나에게 같이 배웅할 거냐고 물었지만 고개를 저었다. 데본더스의 불길한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자리에 앉아 방을 나가는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멍하니 있다가 창밖에서 들리는 말발굽 소리에 걸음을 옮겼다. 창문가에 서서 마차들이 우르르 떠나는 것을 보고 아래로 내려갔다.

배웅이 끝난 것인지 라이오넬이 계단 쪽으로 오고 있었다. 잘생긴 얼굴이 방을 나설 때와 달리 조금 지쳐 보였다.

“데본더스 알터우드가 뭐라고 했어요?”

라이오넬이 고개를 저었다.

“그냥 좀 피곤하군. 머리도 아프고.”

“심해요?”

“조금 거슬리는 정도야.”

그와 함께 계단을 오르려는데 레반스가 현관으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레반스? 어쩐 일이에요?”

“축제도 끝났는데 밀린 일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보통은 다음 날부터 할 텐데 라이오넬이나 레반스나 대단하다.

라이오넬도 집무실에서 일할 생각인 것 같았다. 같이 있고 싶지만 일을 방해하는 건 명을 재촉하는 일이라 참았다.

대신 계단을 오르는 와중에도 몇 번이나 인상을 찌푸리는 걸 유심히 지켜봤다.

두통의 빈도가 잦은 모양이었다.

‘프레르한테 가서 두통약이나 받아 와야겠다.’

라이오넬이 집무실로 들어가는 걸 확인하고 나는 다시 아래로 내려왔다.

“넬리 님. 어디 가십니까?”

“프레르에게 가서 두통약 좀 받아 오려고요.”

“너무 늦지 않게 오십시오.”

“네. 다녀올게요!”

집사님께 행선지를 알리고 밖으로 나왔다.

꽈당이를 타고 목초지에 도착했다. 울타리를 열어 꽈당이를 친구들에게로 보내고 나는 오두막으로 갔다.

창가에 작은 새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참새처럼 생겼는데, 내가 다가가도 도망가질 않았다. 팔을 뻗으면 닿을 거리인데도 새는 총총거리며 창가를 뛰어다녔다.

‘사람을 안 피하다니 신기하네.’

잠시 바라보다가 문을 두드렸다.

“프레르, 나 넬리야!”

순간, 새가 갑자기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올랐다.

“으악!”

깜짝 놀라 움츠렸다. 퍼덕이는 소리가 순식간에 멀어졌다.

‘나한테 달려드는 줄 알았네!’

놀란 마음을 다스리고 다시 문을 두드렸다.

“프레르. 안에 없어?”

잠긴 창문 너머, 닫힌 커튼 사이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램프를 켜 두고 나가면 불이 날 수도 있는데. 저러고 어딜 갔담?

어쨌든 집에는 없는 것 같은데 불을 켜 두고 나간 걸 보면 멀리 안 갔을 것이다.

기다릴 생각으로 문 옆에 쪼그려 앉았다.

어둠에 잠겨 무릎에 볼을 기대고 멍하니 길을 지켜봤다. 얼마 지나지 않아 뭔가가 빠른 속도로 달려왔다.

프레르였다.

‘엄청 빠르네.’

그는 당나귀만큼 빠른 속도로 달려와 순식간에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었다. 잘 훈련받은 사람처럼 가볍고 깔끔한 동작이었다.

호흡은 거의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는 땀을 대충 닦고 숨을 크게 한 번 내쉬는 것으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러고 보니 늑대가 나타났을 때도 저랬지.’

마을에서 경작지까지 뛰어왔었는데도 힘들어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그 상태로 도망치는 나를 가볍게 붙잡았었다.

왜 이제야 저 모습이 아레트와 겹쳐 보이는 걸까?

아레트가 당나귀를 타고 도망치던 나를 쫓아왔던 날, 훈련받으면 저렇게 달릴 수 있을까 기대하는 나에게 말했다.

‘약골은 죽습니다.’

하지만 프레르는 멀쩡히 살아 있다. 훈련을 이겨 냈다는 뜻이다.

그러고 보면 그는 여느 목장지기와 달랐다.

전서구에 관해 잘 아는 것도 그렇고, 약과 관련된 전문적인 지식을 잘 아는 것도, 귀족에 대해 잘 아는 것도 일반적인 목장지기라고 할 수 없었다.

‘설마 프레르도 첩자인 거야?’

로만이 첩자여서 의심조차 하지 못했다.

설마하니 같은 자리에 첩자가 연달아 들어왔었으리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겠어?

게다가 그는 아무리 봐도 해로워 보이지 않았다. 전생에서도 별다른 말썽 없이 떠났었다.

‘데본더스 때문에 예민해진 탓인가? 아니면 라이오넬에게 의심병이라도 옮았나?’

불안이 가시질 않는다. 본능이 도망치라고 경종을 울리는 것 같았다.

그가 첩자인지는 알 수 없으나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복잡한 생각이 그대로 드러났을 얼굴을 가리기 위해 잠시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넬리?”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프레르가 내 앞에 서 있었다.

물끄러미 바라보자 그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맹하니 물었다.

“왜 그러고 있어요?”

“두통약 좀 받으려고. 노크해도 기척이 없길래.”

“아항.”

“불 켜 놓고 갔길래 금방 돌아올 것 같아서 기다리던 중이야. 프레르는 언제 온 거야?”

“방금요. 못 보셨어요?”

“응. 졸았나 봐. 어디 다녀와?”

“잠깐 산책이요.”

거짓말이다. 누가 산책에서 전력 질주로 돌아와. 방문자가 있다는 걸 알고 서둘러 돌아온 게 분명하다.

하지만 어떻게?

혹시 창가에서 총총거리던 작고 평범하게 생긴 새가 알려 줬나?

새가 날아간 방향하고 프레르가 달려온 방향이 똑같았으니 그럴 가능성이 컸다.

“약 어디 있는지 찾아봐야 하는데. 들어와서 기다려요.”

프레르가 문을 열고 먼저 들어가라는 듯 눈짓했다.

“아니야. 그냥 갈래.”

“두통약은요?”

“프레르 기다리면서 좀 앉아 있었더니 괜찮아졌어.”

일단 돌아가자. 의심스러운 프레르가 제조한 약을 먹이느니 차라리 책에서 두통에 좋은 약 같은 걸 찾아보는 게 안전하겠어.

“다음에 봐, 프레르!”

일부러 발랄하게 인사하고 몸을 돌렸다. 그를 등지자마자 다급하게 눈으로 꽈당이를 찾았다.

‘괜찮아. 침착하게, 평소처럼 행동하자.’

작은 새가 내 머리 위로 날아갔다.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천천히 걸었다.

울타리로 다가가자 친구의 당근을 뺏어 먹고 있는 꽈당이가 보였다.

울타리 문을 열고 꽈당이를 불렀다. 꽈당이를 타면 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으로 가는 거야.

입안이 바싹 마르는 게 느껴졌다. 숨을 느리게 내쉬며 울타리 문에 손을 올렸을 때였다.

턱, 손목이 붙잡혔다.

“여기까지 왔는데. 차라도 마시고 가세요. 벡시아드리아 라렐리우스도 친구들하고 잘 놀고 있잖아요.”

프레르의 허리춤에서 단도가 날카롭게 반짝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