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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제발 좀 망하세요 (85)화 (85/130)

85화

* * *

아델하르트는 등 띄우기가 시작될 무렵 광장을 벗어났다.

천천히 걸어 자신이 머무는 오두막으로 향했다.

축제 때는 좀 덜할 줄 알았는데. 여전히 감시하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는 새삼 라이오넬의 병적인 의심에 혀를 내두르며 오두막 문을 열었다.

감시자가 돌아가는 게 느껴졌으나 하디거는 긴장을 풀 수 없었다.

불 꺼진 집 안에 사람이 있었다.

그는 문을 닫고 류트의 목 부분을 검 손잡이처럼 움켜쥐었다. 근육을 긴장시킨 채 서 있는데,

“뭐 하십니까?”

맹한 목소리가 말을 걸었다. 긴장이 툭 풀렸다.

“엘링. 암살자인 줄 알았잖아. 불 꺼 놓고 음침하게 뭐 해?”

“주인 없는 집에 불 켜져 있으면 수상하잖아요.”

“여기까지 오는데 아무도 못 봤어? 감시는 나한테만 붙어 있나 보네.”

“왕자님 행색이 좀 수상하긴 하죠.”

“……편하게 대하랬다고 요즘 나를 너무 편하게 대하는 거 아니야?”

프레르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델하르트는 웃음을 터트리고 프레르가 앉아 있는 자리를 확인했다.

불을 밝혀도 커튼에 그림자가 생기지 않는 자리였다.

그는 램프에 불을 켜고 안대를 벗었다.

“축제에는 안 갔나 보네.”

“그러는 왕자님은 재미있게 즐기다 오셨나 봅니다.”

“넬리만 구경하다 왔지 뭐. 춤은 잘 추는데 체력이 형편없더라.”

프레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하품했다.

“이제 축제도 끝났는데 어쩔 생각입니까?”

“그러게.”

아델하르트가 의뭉스럽게 웃으며 턱을 괬다.

“저는 조만간 아버지 병세가 악화되었다는 핑계 대고 빠지려고요.”

“그건 안 되겠는데.”

“시기 봐서 빠지라면서요.”

“응. 원래 핑계를 대고 버티다 이주민 받으면 몇 주 더 머물며 넬리를 꼬시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들킨 것 같단 말이야.”

“알터우드 공작이랑 정면으로 마주치기라도 했어요?”

“아니. 넬리한테.”

잠깐 놀란 표정을 지었던 프레르가 흐리멍덩하면서도 건방지게 미소 지었다.

“첩자질 아무나 하는 거 아니죠?”

“……그래. 잘났어.”

“어쩌다 들켰는데요?”

“그건 모르겠는데 요즘 부쩍 날 수상하게 여기는 것 같아.”

“역시. 눈도 안 보이는데 다리까지 저는 건 좀 과했어요.”

“다리는 절지 말 걸 그랬나?”

시답지 않은 농담을 하면서도 아델하르트는 머리를 굴렸다.

라이오넬이 잠잠한 걸 보니 아직 신분은 들통나지 않았다. 아니면 넬리가 하디거의 정체를 숨겨 주고 있는 것이거나.

어쩌면 그녀 역시 제 수상한 친구의 정체를 밝혀내지는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단순히 수상하다고 생각하는 단계라면 넬리가 완전히 알아채기 전에 스스로 정체를 밝히는 게 나았다.

친분이 어느 정도 쌓인 상태니까 적당한 이유를 대면 사이가 틀어지진 않을 것이다.

아델하르트는 생각을 정리하고 프레르에게 짧게 설명했다.

“그런 이유로 축제가 끝나자마자 신분을 밝힐 생각이야.”

“저는 여기 더 있고요?”

“그래야지.”

프레르는 별다른 불만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떠나고 나면 너한테 감시가 몰릴 수 있으니까 각별히 조심하고.”

“안 그래도 요즘 목초지 주변에 기사들이 자주 얼쩡거리더라고요. 저 없을 때 집에 들어갈까 봐 보초를 세워 뒀어요.”

“보초? 누구한테?”

“새한테요.”

* * *

라이오넬은 아직 놓지 않은 손을 내려다보며 넬리의 설명을 들었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그녀는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싶어서 영지 관리인이 되어 3년간 죽을 듯이 일하다 진짜 죽었다. 그리고 눈을 떴는데 관리인이 된 첫날로 돌아와 있었던 것이다.

“지금, 그 말을 믿으라는 건가?”

라이오넬이 헛웃음을 터트리며 넬리를 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진지했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지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이성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믿지 말라고 소리쳤다.

라이오넬은 양손으로 제 머리를 쓸어 넘겼다.

“믿을 수 없겠지만 사실이에요. 복수한 거, 숨겨서 미안해요.”

먹먹한 목소리를 들으며 라이오넬은 넬리의 행적을 곱씹었다.

그녀는 첫날부터 라이오넬의 아픈 손가락인 파우트를 찾아내 일을 맡겼다. 라이오넬이 가장 좋아하는 디저트도 알고 있었다.

일한 지 일주일도 안 돼 영지에 필요한 것을 정확하게 짚어 냈다.

프레르 이후의 목장지기가 이상한 놈일 거라고 경고했고, 실제로 로만이 첩자임을 밝혀냈다.

‘처음엔 넬리가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어서 의심했었지.’

만일 그녀가 과거로 돌아온 것이라면 모든 게 설명된다.

이유 없이 그를 적대하던 시선이나, 싫어한다면서 친숙하게 대했던 것도. 전부.

하지만 용납할 수 없는 게 한 가지 있었다.

‘앞으로는 웃으면서 뒤에서는 복수의 칼을 갈고 있었다니.’

웃긴 건, 자신에게 복수하려고 했다는 것보다 넬리가 죽음을 경험했다는 것이 더 신경 쓰인다는 점이었다.

기만당했음에도 그녀가 죽는 순간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저도 모르게 상상하게 된다.

당장 작은 몸을 품에 가두고 괜찮다고 말하고 싶다가도, 마음을 온전히 연 상대에게 배신당할 뻔했다는 사실에 숨이 턱 막혔다.

‘지금 이 사실을 밝히는 이유가 뭐지?’

하늘을 수놓던 풍등은 꿈결처럼 허공에 흩어졌고, 그들의 주변에는 어둠이 내려앉았다.

라이오넬은 오랜만에 절망감을 느꼈다. 그는 땅이 꺼질 만큼 깊은 한숨을 내쉬며 몸을 틀었다. 난간에 팔꿈치를 세워 몸을 기대고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넬리를 이해해 보려고 했다.

과로 때문에 죽을 것 같다며 휴가를 신청했고, 불신이 가득한 말로 거절당한 날에 진짜 죽었으면 원한이 생길 만도 하다.

그래. 복수하고 싶었겠지. 그런데,

‘도대체 무슨 복수를 한 거지?’

그녀가 온 뒤로 영지민의 사기는 올랐고 알터우드령의 명성은 높아졌다. 수확량도 전년 대비 30%나 늘었다.

상황을 파악하고 나자 숨통을 옥죄던 절망감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는 힘없이 웃으며 허리를 펴 넬리를 마주 봤다.

“넬리. 고백을 거절하고 싶은 거라면 솔직하게 말해도 돼.”

“그런 게 아니에요! 저도 알아요. 제 말이 안 믿기겠죠. 과거로 돌아왔다는. 그런 허황된…….”

“과거로 돌아왔다는 건 믿어.”

“……네?”

“비현실적이고 가슴에 와닿진 않지만, 머리로는 이해했어.”

눈물을 겨우 참고 있던 넬리가 벙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복수했다는 건 믿을 수 없군. 조금 아픈 거짓말이긴 하지만, 그런 거로 포기할 수 있을 정도로 가벼운 마음이 아니야.”

대화가 너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튄 덕에 넬리는 단번에 라이오넬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기울이고 한참 있다가 입을 열었다.

“거짓말 아니에요.”

“그럼 말해 봐. 과거로 돌아와서 어떤 복수를 했지?”

“그건…….”

넬리가 대답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분위기가 너무 심각해서 처참하게 실패한 복수들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하지만 침묵이 길어질수록 라이오넬의 표정은 심각해졌다.

그는 허리를 숙여 넬리와 시선을 맞췄다.

“혹시 아직 복수에 성공하지 못한 건가?”

“……맞아요.”

라이오넬은 한참 동안 넬리의 눈동자를 들여다봤다. 여전히 거짓말을 하는 기색은 없었다.

‘진짜 복수하려 했다고?’

그의 얼굴이 드물게 일그러졌다. 자취를 감췄던 절망이 다시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그 체력과 근력으로 기습은 불가능할 것 같고, 독살이라도 시도했었나? 아니면 일부러 내 마음을 얻고 짓밟을 생각이었나?”

목소리는 냉랭하고 차분했으나 눈동자는 제 색과 똑같은 핏방울을 흘릴 것만 같았다. 넬리는 제 심장이 갈가리 찢기는 것만 같았다.

“죽이겠다거나 마음을 짓밟겠다는 생각은 해 본 적 없어요!”

“…….”

“처음엔, 그냥, 농기구를 바꾸고 천막을 세우는 거로 돈을 잔뜩 쓸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실패해서…….”

“독살을 계획했나?”

“아니라니까요!”

넬리가 발끈해 소리쳤으나 라이오넬은 믿을 수 없었다. 그녀는 과거에 과로사 때문에 죽었다고 했다.

‘죽음에 대한 복수로 돈이나 탕진할 생각이었다고?’

가문을 기울게 할 정도로 천문학적인 비용이면 이해라도 할 텐데, 라이오넬의 기준에서 넬리가 지금껏 쓴 돈은 그야말로 푼돈이었다.

심지어 횡령한 것도 아니다. 그녀가 돈을 들여 산 물건은 여전히 공작가의 소유였다.

“하…….”

라이오넬이 한숨인지 웃음인지 모를 숨을 내뱉으며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넬리는 울먹이면서도 고해성사하듯 자신이 실패했던 복수들을 줄줄 읊었다.

“그런데, 라이오넬이 날 믿는다고 하는 순간 원망이 사라져서, 더는 복수할 수가 없었어요. 이야기를 나눌수록 이해되고, 안타깝고, 그래서. 그래서…….”

넬리의 말이 이어질수록 라이오넬은 허탈해졌다. 자신의 분노와 절망은 쓸데없는 것이었다.

배신감과 복수심에 친우의 목을 벤 자신과 달리, 넬리는 누군가 자신을 죽여도 복수한답시고 심술이나 부리고 말 사람인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심술부린 것에 죄책감까지 가질 사람이었다.

라이오넬의 적들은 항상 칼을 품고 있었다. 기회가 온다면 언제든 그를 헤칠 수 있도록. 그건 믿었던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단언컨대, 저에게 악감정을 품고도 이토록 해롭지 못한 사람은 넬리가 처음이었다.

“넬리.”

라이오넬의 목소리가 다시 다정한 기색을 띠었다.

넬리는 안도감에 긴장이 풀렸다. 그러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가까스로 참고 있었지만 그녀는 내내 두려웠다.

겨우 정 붙인 곳을 떠나야 할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라이오넬이 경멸 어린 눈으로 저를 보면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용서, 흡! 해 주는 거예요?”

“용서하고 말 것도 없어. 그대가 겪은 일에는 내 잘못도 있으니까.”

라이오넬은 훌쩍이며 묻는 넬리를 품에 안았다. 동시에 그녀가 울음을 터트렸다.

울음소리가 잦아들 때까지 라이오넬은 조금 어색한 손길로 그녀를 다독였다. 몇 분 되지 않아 넬리는 눈물을 완전히 멈췄다.

그러나 다 커서 아이처럼 운 게 창피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녀는 얼굴을 가린 채 라이오넬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다. 라이오넬은 놔주기는커녕 그녀를 더 꽉 끌어안았다.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뭔데요?”

“왜 하필 지금 비밀을 털어놓았지?”

“숨기고 라이오넬의 마음을 받아 주면, 기만하는 거잖아요.”

“그 말은…….”

“저도 좋아해요.”

넬리는 라이오넬의 품에 안긴 채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좋아하게 된 건지, 아니면 아주 오래전부터 좋아하고 있던 건진 모르겠는데……. 어쨌든, 좋아해요, 라이오넬.”

잔뜩 붉어진 얼굴로 횡설수설 고백하는 모습이 참을 수 없이 사랑스러웠다.

그래서 참지 않았다.

라이오넬은 그녀에게 또다시 입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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