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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제발 좀 망하세요 (84)화 (84/130)

84화

“여전히 없습니다.”

“만나는 사람은?”

“요즘 들어 관리인과의 만남은 뜸해졌고, 목장지기와는 아주 가끔 어울립니다.”

“흐음…….”

“계속 주시하겠습니다.”

“됐어. 축제도 곧 끝날 테니 쫓아내면 그만이다.”

“예.”

라이오넬의 시선이 다시 넬리에게로 향했다.

아직 한 곡이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체력이 다 한 건지, 그녀는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영지민들은 넬리의 손을 끌어당겼다.

하지만 그녀가 지친 얼굴로 손사래를 치자 순순히 놔주었다.

안도의 숨을 내쉰 넬리는 슬쩍 하디거를 보았다가 라이오넬에게로 몸을 틀었다. 그리고 아레트를 발견했다.

라이오넬이 넬리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각하. 명령하실 일이라도.”

“없다.”

대화가 끝났음에도 아레트가 눈치 없이 서 있자 어느새 돌아온 레반스와 파우트가 그의 팔을 한쪽씩 붙잡았다.

“그럼 각하. 저희는 가 보겠습니다.”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아레트가 무표정한 얼굴로 질질 끌려갔다. 그 와중에도 넬리에게 고갯짓으로 인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넬리도 고개를 숙여 그 인사를 받고 라이오넬 옆에 앉았다.

“무슨 이야기 했어요?”

“내가 그대에게 푹 빠졌다더군.”

“그, 그, 그게 무슨!”

앉은 채로 펄쩍 뛴 그녀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고 눈을 연신 깜빡였다.

“파우트 씨가 그랬죠? 하여튼 사람 놀리는 데 선수예요. 저번에도 막 저한테 라이오넬하고 무슨 관계냐고 물어보고 그러더라니까요. 얼굴만 마주쳤다 하면 물어봐요!”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라이오넬은 넬리의 얼굴을 시선으로 덧그리다가 갈증이 일어 손을 뻗었다.

땀에 젖은 이마를 소매로 닦아 준 그가 낮게 읊조렸다.

“틀린 말은 아니야.”

“네?”

못 들어서 되물은 것인지 놀라서 되물은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라이오넬은 자리에서 일어나 넬리에게 손을 뻗었다.

“이만 돌아가지.”

“벌써요?”

“충분히 지친 것 같은데.”

“그렇긴 한데, 등 띄우기는 안 하려고요? 제일 중요한 행산데!”

걱정을 적은 등은 강에 띄워 흘려보내고, 소원을 적은 등은 하늘로 띄워 보낸다.

축제에 참석한 적 없는 넬리도 이 시간이 되면 관리소 창문 밖으로 떠다니는 등을 구경하곤 했다.

잘 보이진 않았지만 장관이라 한 번도 빼먹지 않았다.

‘이번에는 참여해 보고 싶었는데…….’

넬리가 입술을 삐죽였으나 라이오넬은 별다른 말 없이 허리를 숙여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넬리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라이오넬 옆에 섰다. 그러나 눈으로는 연신 강과 성을 번갈아 보았다. 누가 봐도 돌아갈지 등 띄우기를 보러 갈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조용히 따라오던 그녀는 성문을 지나 폐쇄된 서쪽 탑으로 들어서자 걸음을 뚝 멈췄다.

눈앞에는 달팽이 등껍질처럼 말린 계단이 펼쳐져 있었다.

멍하니 정면을 보던 넬리가 힘없이 말했다.

“라이오넬. 저 지쳤는데요?”

“알아.”

춤추느라 진을 다 뺀 그녀에게 계단까지 올라가라고 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꼭 보여 주고 싶은 게 있었다.

라이오넬은 넬리를 가볍게 안아 들었다. 그리고 그녀가 발버둥 치기 전에 성큼 계단을 올라갔다.

“으악!”

갑자기 훅 높아진 시야에 넬리가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몸을 뻗대려다가 눈을 질끈 감고 라이오넬의 목을 끌어안았다.

발버둥 치면 안 된다. 라이오넬이 발을 삐끗하기라도 하면 둘 다 뼈가 와장창 부러질 것이 분명했다.

상상만 해도 눈앞이 아찔했다.

“넬리. 그렇게 꽉 끌어안으면 숨이 안 쉬어지는데.”

라이오넬이 멀쩡한 목소리로 걸어 올라가며 말했다. 한 층을 다 올라가고 평평한 부분이 나오자 넬리가 라이오넬의 팔을 찰싹 때렸다.

“그럼 내려 주세요!”

“지쳤다면서.”

“아니요! 완전 멀쩡해요! 전력 질주도 할 수 있어요!”

넬리가 붉어진 얼굴로 항변했다.

라이오넬은 유쾌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가 웃음을 터트리자 넬리의 눈빛이 샐쭉하게 변했다.

“안 믿는 거죠?”

“믿어.”

넬리가 눈을 크게 뜨고 몇 번 깜빡였다.

라이오넬은 당장이라도 눈꺼풀 위에 입 맞추고 싶은 것을 참았다. 그리고 제 충동을 들키지 않기 위해 그녀를 내려놓았다.

“전력 질주도 할 수 있겠지. 한 다섯 칸 정도.”

새초롬한 표정으로 라이오넬을 보던 넬리가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갔다.

그리고 정확히 열 칸 위에 발이 닿자마자 의기양양하게 뒤를 돌아봤다.

전력 질주도 아니었고, 가쁜 숨을 억지로 참는 것도 눈에 보였다. 그런데도 그 모습이 또 귀여워, 라이오넬은 졌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금세 위로 올라가 넬리의 속도에 맞춰 걸었다.

“그런데 갑자기 탑에는 왜 온 거예요?”

“보여 주고 싶은 게 있어.”

“……유령은 아니죠?”

라이오넬은 넬리를 본관으로 데려오기 위해 했던 변명을 떠올렸다.

그의 얼굴에 일순 장난스러운 기색이 스쳤다. 그러나 넬리가 창백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걸 보고 장난기를 지웠다.

“유령은 아니고, 올라가면 알게 될 거야.”

넬리가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단숨에 꼭대기까지 오르진 못했다. 수시로 멈춰 넬리가 숨 고르는 걸 기다렸다가 다시 천천히 올라갔다.

그렇게 마지막 계단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그녀의 입에서 작은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우와…….”

여전히 숨을 옅게 헐떡이면서도 넬리는 거의 뛰다시피 테라스로 가 난간을 붙잡았다.

유속이 느린 넓은 강 위로 수백 개의 등이 흐르고 있었다. 하늘에는 주황빛 풍등이 별의 움직임처럼 느리게 날아다녔다.

주황색 별로 이루어진 은하수가 하늘과 땅을 가득히 채워 흐르는 것만 같았다.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름다운 장면에 넬리는 넋을 놓았다.

라이오넬이 그녀의 옆으로 다가갔다.

“마음에 드나?”

“네!”

넬리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미풍에 갈색 머리카락이 가볍게 흔들렸다. 풍등의 주황빛이 침범해도 눈동자는 제 색을 잃지 않았다.

그 눈과 마주친 순간, 라이오넬은 깨달았다. 더는 이 충동을 숨길 수 없었다.

그는 한참 넬리를 바라보다가 그녀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축제를 준비하다가 문득 그대를 여기 데려와야겠다고 생각했어.”

“……왜요?”

“아름다워서.”

피하고자 한다면 충분히 피할 수 있을 정도로 느리게 다가가 입을 맞췄다.

라이오넬은 잠시 떨어졌다가 넬리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의 두 뺨을 물들인 붉은 빛이 기대 때문인지 등불 때문이지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그는 다시 다가가야 했다.

입술이 마주치려는 순간 그녀가 눈을 내리감았다.

명백한 허락이었다.

붉은 눈동자가 불빛처럼 일렁였다. 단단한 팔이 넬리의 허리를 휘어 감아 끌어당겼다.

라이오넬은 고개를 비틀어 넬리의 아랫입술을 머금었다.

느리게, 그러나 집요하게 넬리의 입술을 탐닉했다. 가는 허리가 뒤로 젖혀졌다. 커다란 손이 넬리의 등줄기를 타고 올라가 목덜미를 단단하게 받쳤다.

옷 위를 스치는 감각에 넬리가 고개를 젖혔다. 라이오넬은 잠시라도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 따라붙어 더 깊숙이 입을 맞췄다.

넬리가 내쉬는 숨을 모조리 집어삼킨 후에야 그가 입술을 떼어 냈다.

“좋아해, 넬리.”

더없이 소박한 고백이었다.

* * *

라이오넬에게 빼앗긴 숨을 보충하기 위해 헐떡이며 그가 방금 한 말을 상기했다.

‘날, 좋아한다고? 라이오넬이?’

뜨거운 환희에 휩싸여 여전히 머리가 어지러웠다.

몽롱한 기분으로 라이오넬을 바라봤다. 그는 마치 수천 개의 별 아래 서 있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이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꿈인가?”

멍하니 중얼거리자 라이오넬이 작게 소리 내 웃으며 내 볼을 감쌌다.

다가오는 그를 거부할 수가 없었다.

단단한 이가 아랫입술을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빨아당기는 느낌에 머리가 쭈뼛 서는 듯했다.

등줄기를 타고 기분 좋은 소름이 돋았다. 나도 모르게 그의 옷자락을 세게 붙잡았다.

“아직도 꿈 같은가?”

“아……!”

탄성이 터져 나왔다. 꿈이 아니다. 인정하자마자 가슴이 아플 정도로 거세게 뛰었다.

사실 마을에 나오고 나서부터 줄곧 위험했다. 축제 구경은 처음이라 자꾸만 마음이 들떴다.

밀착된 몸도, 깍지 낀 손도, 나를 바라보는 눈빛도 전부 평소보다 더 부드럽고 선명하게 느껴졌다.

라이오넬을 거부할 수 없었을 때, 이미 내가 그를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라이오넬.”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볼에서 그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여전히 가슴이 설렜지만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더 거리를 벌리려는데 그가 내 손을 붙잡았다.

“지금 당장 대답하지 않아도 좋아.”

“전…….”

그가 좋다. 인정하자 이 마음이 얼마나 큰지 느껴졌다.

그를 원한다. 이 마음을 그냥 ‘좋다’라는 한 단어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게 아쉬울 정도로. 사랑이라는 단어가 무색할 정도로.

하지만 양심이 내 입을 틀어막았다. 내 감정을 고백하기 전에 그에게 알려야 할 게 있었다.

“할 말이 있어요.”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한 목소리로 힘겹게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라이오넬이 내 턱을 끌어 눈을 맞췄다.

아름다운 얼굴에 불안이 안개처럼 끼어 있었다.

“제가 알터우드 공작령에 관리인으로 들어온 이유에 관한 거예요.”

이를 악무는지 수려한 턱선이 더 도드라졌다.

“말하지 않아도 돼.”

“아니요. 들어 주세요. 들은 뒤에 라이오넬이 어떤 처분을 내리든 받아들일게요.”

처분이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곧 턱에서 느껴지던 온기가 사라졌다. 하지만 맞잡은 손은 여전했다. 그 온기에 미약한 희망을 느끼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저는 복수하려고 관리인이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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