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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제발 좀 망하세요 (77)화 (77/130)

77화

문을 열자 안경을 쓰고 있는 라이오넬이 보였다. 붉은 눈동자가 잠시 파우트에게 닿았다가 금세 서류로 돌아갔다.

파우트는 어슬렁어슬렁 안으로 들어가 리지의 자리에 앉았다.

그제야 서류에 얼굴을 처박고 있던 레반스가 고개를 들었다.

“일 도와주러 온 거야?”

파우트가 힐끗 레반스의 책상을 봤다. 축제가 일주일밖에 남지 않아서인지 책상 위는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쌓인 서류와 잉크로 거뭇해진 레반스의 손을 보며 파우트가 진저리를 쳤다.

“아니. 전혀. 그냥 오늘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고 해서 왔는데.”

레반스의 미소가 짙어졌다.

“재미있는 일이 생겼으면 선술집에 가서 수다나 떨 것이지. 집무실에는 왜 왔어. 염장 지르러?”

일이 많아 예민해진 모양이었다. 전쟁터에서도 종종 봤던 모습이기에 그는 당황하지 않고 뻔뻔하게 받아넘겼다.

“뭐, 겸사겸사.”

얄밉게 씩 웃은 그가 고개를 돌려 라이오넬을 봤다.

‘지금쯤 ‘놀이터가 필요하면 아들 손 잡고 광장에 가서 흙 놀이나 해.’ 같은 독설이 들려야 하는데?’

그는 파우트에게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가끔 피식피식 웃는 게 꼭 허파에 바람이 든 사람 같았다.

파우트가 레반스에게 눈짓으로 ‘각하 왜 저러시냐?’라고 물었지만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는 의문을 잠시 미뤄 두고 찾아온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운을 뗐다.

“그것보다 영지가 아주 뜨겁던데. 옆 나라 대공님 덕분에.”

레반스는 생긋 웃더니 다시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일말의 관심도 없는 눈치였다. 누가 호응을 해 줘야 대화를 이끌 텐데, 파우트로서는 난감한 일이었다.

‘리지 데려올걸.’

파우트는 잠깐 후회했다가 슬쩍 목소리를 높였다.

“관리인님도 관심 가지던데. 누구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생기셨나?”

“하하. 어쩌라…….”

“넬리를 만났나?”

라이오넬의 질문이 레반스의 목소리를 끊어 냈다. 파우트는 회심의 미소를 지우며 목을 가다듬었다.

“크흠! 제가 만난 건 아니고, 리지가 만났나 봅니다.”

“흐음.”

라이오넬이 다리를 꼬고 깍지 낀 손을 무릎 위에 올려 두었다. 이야기를 들어 보려는 것이었다.

신이 난 파우트가 냉큼 의자를 끌고 라이오넬 근처로 갔다. 그리고 영지 한복판에서 있었던 일을 간략히 설명하고 말을 이었다.

“톰이 연애 소설 같은 거 좋아하지 않습니까? 눈앞에서 소설 같은 일이 펼쳐졌으니 신이 나서 떠들었을 겁니다.”

“그랬겠지.”

“그때 관리인님이 자기는 소박한 고백이 좋다고 했답니다.”

파우트가 임무를 끝낸 사람처럼 뿌듯하게 웃었다.

하지만 라이오넬은 여전히 파우트를 보고 있었다. 듣고 있으니 계속하라는 뜻이었다.

파우트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끝입니다.”

라이오넬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안경을 벗어 두고 피곤한 눈을 문질렀다.

“기분은 어때 보였다거나 고민이 있어 보인다는 말은 없었나?”

며칠간 넬리의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마주칠 기미만 보여도 넬리가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라이오넬이 마음만 먹는다면 그녀를 만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일단 내버려 두기로 했다.

자신이 그랬듯 넬리에게도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느낀 게 무엇이든, 그것에 이름을 붙이고 어떻게 행동할지 방향을 결정할 시간 말이다.

저와 같은 마음일 거란 보장은 없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놓아줄 생각은 없으니까.’

속도만 달라질 뿐이다. 그녀가 같은 마음이라면 빨리 다가가고 마음이 없다면 천천히 다가갈 것이다.

‘그래도 보고 싶은 건 별개의 문제지만.’

보고 싶다라니. 제 생각이 생소하면서도 간지러워 웃음이 흘렀다. 천장을 향해 치솟는 입꼬리가 낯설어, 라이오넬은 볼을 문질러 웃음을 지웠다.

그리고 파우트를 보며 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파우트는 머쓱하게 웃을 뿐이었다.

“못 들었습니다.”

“……나가.”

“예.”

파우트가 터덜터덜 밖으로 나갔다. 그 모습을 보던 레반스가 라이오넬에게 물었다.

“들어 보니까 옆 나라 대공께서 다녀갔다는데 괜찮은 겁니까?”

허락도 없이 침입한 것이라면 외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 만약 사이가 좋지 않다면 침입으로 간주해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는 사안이었다.

그러나 라이오넬은 상단주에게 언질을 들었다. 대공비를 찾으러 대공이 잠깐 왔다 갈 것 같으니 문을 열어 달라는 것이었다.

“미리 양해를 구했어.”

“예.”

레반스는 다시 서류를 보았다. 라이오넬도 안경을 썼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다시 내려놓았다.

파우트가 넬리 이야기를 하고 가서인지 얼굴이 아른거린다. 도저히 집중을 할 수 없었다.

“산책.”

“다녀오십시오.”

라이오넬은 고개를 끄덕이며 집무실을 나섰다.

* * *

왜 나왔을까?

꽈당이를 타고 돌아다니며 멍하니 생각했다.

아직 영지민들이 남아 수확이 끝난 밭을 수습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내가 굳이 살펴보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다시 돌아갈까?’

관리소가 있는 쪽을 돌아봤다가 고개를 저었다. 또 라이오넬이 떠오르면 어떡해.

이미 떠올렸구나!

머리를 거세게 흔들어 잘난 얼굴을 떨쳐 냈다.

다른 생각. 다른 생각 하자.

맞아. 와인은 어떡하지? 모르고 맛있는 와인을 주문했으니 여왕님 눈 밖에 날 다른 방법을 고민해 봐야 하는데.

‘원래는 라이오넬과 상의할…… 라이오넬 생각 하지 말라고!’

머리를 콩콩 두드리고 고개를 저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하디거의 오두막 근처까지 와 있었다. 꽈당이의 짓이었다.

“꽈당아. 너 나한테 불만 있니?”

저번에는 라이오넬한테 데려가더…… 그래. 마음대로 해라, 머리야. 라이오넬을 떠올리든 말든 마음대로 해.

한숨을 내쉬고 꽈당이 등에서 내렸다.

“근처에서 놀고 있어.”

꽈당이 등을 몇 번 쓰다듬어 주고 하디거의 오두막을 바라봤다.

아직 그에 대한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라이오넬에게 섣불리 말할 수도 없었다.

‘차라리 로만 때처럼 뭔가를 정확히 봤다면 고민하지도 않았을 텐데.’

괜히 말했다가 라이오넬이 감시를 시작하고, 그걸 하디거가 눈치채면 분명 나와 프레르부터 의심할 것이다. 그와 가깝게 지내는 사람은 우리 둘밖에 없었으니까.

그가 첩자가 아니라면 사이가 틀어지고, 첩자라면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하디거의 오두막으로 다가갔다. 창문은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다.

‘그러고 보면 커튼을 열어 놓은 적이 없었지.’

그의 행동을 하나씩 되짚다가 노크하는 것을 깜빡하고 문을 열었다. 잠겨 있을 줄 알았는데 그냥 열렸다.

식탁에 앉아 종이 한 장을 들고 있던 하디거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시죠?”

그가 문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나야. 넬리. 미안해. 노크하는 걸 깜빡했어!”

“도둑인 줄 알고 깜짝 놀랐네. 들어와, 넬리.”

그가 평소처럼 미소 지으며 손을 더듬어 제 옆의 의자를 꺼냈다.

나는 그가 빼 준 자리에 앉았다. 시선이 하디거가 들고 있는 종이로 향했다. 미처 글자를 읽기도 전에 하디거가 종이를 자연스럽게 접어 품에 넣었다.

“뭐 하고 있었어?”

“편지가 왔는데, 읽을 수가 있어야지.”

그가 장난스럽게 제 안대를 톡톡 두드렸다.

“그럼 내가 읽어 줄게.”

“이건 친구보다 더 가까운 사람한테만 보여 줄 수 있는 거라서.”

보이지도 않는데 무슨 내용인 줄 알고? 그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입을 다물었다.

의심이 깊어지기 전에 하디거가 말을 덧붙였다.

“편지 전해 준 사람이 어머니가 보낸 거라고 했거든.”

“어머니는 모르셔?”

“뭘?”

“네 눈이…… 음……. 그렇게 된 거.”

“…….”

“아시면 편지는 안 보내실 것 같아서.”

잠시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괜히 입안이 바싹 말랐다.

이상하게도 친구이니 더 의심해야 한다는 라이오넬의 말이 떠올랐다.

하디거는 분명 내게 뭔가를 숨기고 있다. 나도 그에게 말 못 하는 것이 있으니 뭐라 할 처지는 아니었다.

중요한 건 그 비밀이 나를 해칠 수 있을 만큼 위험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나도 모르게 문이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보고 있는데 하디거가 대답했다.

“전혀 모르시지.”

하디거가 의뭉스럽게 씨익 웃었다.

“그렇구나.”

가볍게 대답하고 턱을 괴었다. 그리고 빤히 하디거를 바라보았다.

그가 차를 준비하겠다며 일어났다. 절뚝거리며 움직이는 그를 끌어 다시 자리에 앉혔다.

“내가 할게!”

차를 끓이는데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넬리.”

“응?”

“이 시간엔 웬일이야? 일하고 있을 땐 안 왔었잖아.”

“산책하려는데 꽈당이가 제멋대로 네 집에 온 거 있지? 내가 너무 자주 왔나 봐.”

“너랑 프레르가 우리 집 식량을 많이 축내긴 했지.”

그가 장난스럽게 키득거렸다.

“축냈다고? 집주인한테 못 하는 말이 없네! 집값 올린다?”

“그럼 노숙해야겠네.”

평소처럼 의미 없는 장난을 주고받는 와중에도 마음이 무거웠다. 빨리 자리를 떠야겠다고 생각하며 하디거 앞에 차를 내려놓았다.

그때 문이 열리며 프레르가 들어왔다.

나를 발견하고는 잠깐 놀란 표정을 짓더니 하디거를 보았다. 앞에 보이지 않는 그와 눈빛으로 대화라도 하려는 듯이.

두 사람을 유심히 보다가 차를 한 잔 더 따라서 프레르에게 밀어 주었다.

“나는 이제 가 볼게.”

“넬리는 안 마시고 가요?”

“일하다 산책 나온 거라서.”

“아항.”

두 사람에게 인사하고 밖으로 나왔다.

관리소로 돌아와 평소보다 조금 늦게까지 일을 하고 성으로 향했다.

꽈당이를 마구간에 데려다주고 정원에 들어서는데 벤치에 누가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라이오넬이었다.

“오늘은 좀 늦었군.”

반사적으로 마주 서긴 했는데 눈을 못 마주치겠다. 못 본 척하긴 늦었다. 대충 대답하고 성으로 들어갈까?

그러면 꼭 피하는 것 같잖아! 이때까지 피하고 있긴 했지만!

“일이 많아서요.”

작게 대답하고 성 꼭대기만 바라보았다.

슬금슬금 게걸음으로 현관을 향해 가는데 라이오넬이 큰 걸음으로 다가왔다.

성에 가까워질수록 라이오넬도 나에게 가까워졌다.

결국 문 근처에 가 보지도 못하고 라이오넬에게 앞을 점령당했다. 나는 계획을 바꿔 그를 마주 보며 미소 지었다.

“라이오넬은 왜 여기 있어요? 산책 나온 거예요?”

“기다렸어.”

“누굴요?”

대답 대신 시선을 맞춰 온다.

심장이 갈비뼈 밑에서 다섯 살 난 애처럼 뛰어다녔다. 입술을 꾹 다물고 있는데 라이오넬이 눈짓으로 저택을 가리켰다.

같이 들어가자는 뜻이겠지? 걷기 시작하자 라이오넬이 나란히 따라왔다.

“와인은 어떡할 생각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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