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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제발 좀 망하세요 (75)화 (75/130)

75화

“그런 분이 왜 상단을 하세요?”

“아마 문화적 차이가 아닌가 싶습니다.”

아투뉴 왕국의 귀족들은 직접 돈을 굴리는 것에 관여하지 않는다. 경작이야 영지의 일이니 그렇다 치지만, 경작물을 팔아 수익을 내는 건 관리인이나 집사에게 맡겼다.

특히 상단 일은 천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타국의 대귀족이실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어쩐지 하대가 자연스럽더라니.’

“저 뭐 실수한 거 없겠죠?”

“걱정하지 마십시오. 잘못하신 게 있으면 아마 별관에서 유령이 되셨을 겁니다.”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나도 모르게 목이 잘 붙어 있나 확인하는데 집사님이 미소 지었다.

“농담이었습니다.”

“……진담이었죠?”

집사님이 미소 지은 채 아무 말도 안 하시다가 몸을 돌리셨다.

“그럼 저는 이만.”

그러더니 빠르게 자리를 뜨셨다.

저러니까 진담인 것 같잖아! ……별관 쪽으로 얼씬도 하지 말아야겠다. 괜히 심기를 거슬렀다가는 목이 달아나겠어.

잠깐, 그럼 같이 오신 분은? 가족이라고 했으니까 대공가의 분이시겠지?

관리소로 돌아가 감독관들에게 혹시라도 만나면 깍듯하게 대하라는 말부터 했다.

그리고 일이 끝난 뒤 하디거의 오두막으로 달려갔다.

“하디거!”

문을 연 그가 일단 몸을 비켜 주었다.

“넬리? 오랜만이네?”

“으응. 좀 신경 쓸 게 있어서.”

머릿속에 떠오른 라이오넬의 얼굴을 재빨리 치웠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우리가 오랜만에 본 것보다 중요한 게 있단 말이야?”

능청스러운 질문에 그를 슬쩍 노려보고 본론을 꺼냈다.

“그 와인 상단 이름, 래블런 맞지?”

“응.”

“확실해?”

“그럼. 나 못 믿어?”

“믿지! 그냥 좀……. 아! 혹시 상단주가 귀족이야?”

“귀족이라고? 처음 듣는 말인데.”

모르는 눈치다. 근데 왜 이렇게 불안하지? 분명 복수가 망했을 때 느낌하고 분명 똑같았는데!

고개만 갸웃거리는데 하디거가 자리를 권했다. 그는 자연스럽게 저녁을 준비하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아마 귀족이 후원하고 있긴 할걸? 그렇지 않고서야 그 끔찍한 와인으로 왕가와 거래할 수 있었을 리가.”

“왕가? 저번에 귀족들한테 들었다고 하지 않았어?”

“……폐하께서 드시고 입을 헹구셨을 정도라고 그랬거든. 그 귀족이.”

느린 칼질이 잠깐 멈췄다. 찰나였지만 분명히 보였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평소와 달리 위화감이 느껴지는 침묵이었다.

‘귀족이 혀를 내두르면서 한 말의 내용이 저거였겠지. 폐하께서 드시고 입을 헹구셨다는 거.’

위화감을 털어 내고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이었다.

“그럼 혹시 라피레온이라고 알아?”

“……아니.”

“이번에 온 상단주가 라피레온, 그러니까 카스터 제국의 대귀족이랬는데.”

“와인 상단 이름이 래블런인 건 확실해?”

하디거가 칼질을 멈추고 뒤를 돌았다. 뭔가 이상하다는 투였다.

불안감이 엄습했다. 역시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어. 그럼 어떡하지? 구매한 와인이 너무 맛있어서 여왕님 마음에 쏙 들면?

그러고 보니 라피레온 님은 여왕님 취향까지 알고 있었잖아! 허세 부리는 건 줄 알았는데……. 망했다.

“편지에 상단주 이름 적혀 있지 않았어?”

“이름이야 적혀 있었지. 근데 타국의 귀족을 알게 뭐람. 우리나라 귀족도 잘 모르는데!”

설마 하디거가 알려 준 래블런과 내가 계약한 상단이 전혀 다른 곳이진 않겠지?

“하디거! 혹시 상단 이름 적어 줄 수 있어?”

“왜?”

이유를 묻는 말투에 평소와 달리 경계심이 섞여 있는 것 같았다.

“……철자만 비슷한 다른 상단인가 싶어서.”

“그래.”

이상해. 나는 하디거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봤다.

평소와 똑같은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이상하다. 대답이 너무 짧아 대화가 잘 이어지지 않는 것도 그렇고.

“하디거.”

“응?”

“우리 친구 맞지?”

“갑자기?”

그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물으며 손을 더듬어 쟁반을 꺼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감자 샐러드와 잘 썰어 놓은 빵을 가지고 식탁으로 향했다.

“그냥 물어봤어.”

하디거가 식탁에 앉았다. 그의 얼굴은 분명 정면을 향해 있는데 어쩐지 나를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앞에 음식을 내려놓고 그의 손을 끌었다. 그리고 음식과 식기가 있는 위치를 알려 준 뒤 내 몫을 가져와 항상 앉던 자리로 돌아갔다.

소소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식사를 마치자마자 하디거가 펜과 종이를 가져왔다.

“자. 여기 래블런 상단 이름.”

“고마워!”

“만약 이름이 비슷한 다른 상단이고, 와인이 여왕님 마음에 들면 어떡할 생각이야?”

“그건 이제 생각해 보려고. 오늘도 저녁 고마웠어!”

“조심히 가.”

하디거의 배웅을 받아 밖으로 나오며 종이를 접어 손에 쥐었다.

성으로 돌아가기 위해 꽈당이 위에 올라탔다. 고삐를 잡으려 하자 손아귀의 종이가 바스락거렸다.

대충 종이와 고삐를 같이 움켜잡았다. 꽈당이가 출발하자 몸이 가볍게 흔들렸다.

뒤를 돌아 오두막을 봤다. 하디거와 나눈 대화가 천천히 떠올랐다.

‘그런데 내가 상단에 편지를 보냈다고 말한 적 있었나?’

한동안 만나지도 않았는데, 있을 리가. 등줄기가 서늘하다. 로만이 비둘기를 날리는 걸 보았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아니야. 아니겠지.’

그렇게 속을 다독이면서도 생각은 자꾸 다른 쪽으로 튄다. 그러고 보면 하디거는 과거에는 없던 사람이었다.

나는 출입 관리에 관여하지 않았다. 죽기 전에는 바빠서 축제에도 제대로 참석하지 못했다.

그러니 그때 들렀던 음유시인들의 이름과 얼굴을 다 아는 건 아니었다. 심지어 그중에는 눈이 먼 사람들도 간혹 있었다.

하지만 축제 한 달 전에 온 사람은 없었다.

의심하지 않은 이유는 복수 실패의 여파로 많은 게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만 해도 어떤가. 원래라면 오지 않았을 여왕님의 시녀가 방문했다. 심지어 지금은 별관에 타국의 대귀족이 묵고 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찝찝하지?’

꽈당이가 멈춰 섰다. 어느새 정원 안까지 들어온 모양이었다. 여기만 지나면 본성의 현관이 나온다.

“고마워, 꽈당아. 마구간 가서 쉬어.”

검은 갈기를 쓰다듬어 주자 꽈당이가 귀를 몇 번 팔랑였다. 그러더니 몸을 돌려 혼자 마구간으로 향했다.

머리가 복잡하다.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정원 벤치에 앉았는데, 저 멀리 별관 근처에서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라이오넬!”

큰 소리로 부르자 그가 고개를 돌렸다. 잠시 멈칫하긴 했으나 이내 방향을 틀어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를 피해 다닌 게 아니라던 집사님의 말이 사실인 모양이다.

벌떡 일어나 빠르게 걸어가자 그의 얼굴에 잠시 미소가 스쳤다.

“왜 이렇게 얼굴 보기 힘들어요?”

목소리에 서운함이 잔뜩 묻어 있어서 내가 말해 놓고도 당황해 눈을 깜빡였다.

괜히 목을 가다듬는데 라이오넬의 빤한 시선이 느껴졌다.

왜 또 저렇게 딸기 콩포트 우유 푸딩 보듯이 쳐다보고 그런담!

볼이 달아오르는 것 같아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반면에 라이오넬은 한 걸음 다가왔다. 나보다 다리가 긴 탓인지 물러나기 전보다 거리가 더 가까워졌다. 고개만 들었다 하면 마주치는 붉은 눈동자에 괜히 어쩔 줄 몰라 눈을 굴렸다.

“어…….”

심장이 너무 거세게 뛴다.

침묵이 불편해서 그런가? 딱히 잘못한 건 없으…… 없나? 없기는. 있지. 있고말고.

“저, 라이오넬.”

“말해.”

“죄송해요.”

사과가 뜬금없었는지 라이오넬이 고개를 기울였다.

“사과할 만한 일이 있었나?”

“네. 사실 라이오넬이 저를 피하는 줄 알고 홧김에…….”

관리인이 사적인 감정으로 돈을 낭비하는 건 옳지 못한 행동이다.

라이오넬이 진짜 나를 피했던 거면 나도 뻔뻔하게 나갈 수 있었겠지만 이건 오해였으니까.

어차피 라이오넬에게 보고서를 올리면 들통난다. 그 전에 이실직고하는 게 나았다.

“와인을 엄청 많이 샀어요.”

혼날 줄 알고 눈을 질끈 감았는데 앞에서 웃음 참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었다. 미소는 보이지 않았지만 눈빛이 평소보다 부드러웠다.

‘그러니까, 왜 자꾸 저렇게 딸기 콩포트 푸딩 보듯이 나를 보냐고!’

슬금슬금 눈을 피하려는데, 그가 말을 걸어 마주 볼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거금을 들이긴 했더군.”

뜨끔해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폐하를 모시는 자리니 과하지 않아. 그 정도로 준비하지 않으면 예의가 아니지.”

어휴. 다행이다. 안도의 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오넬이 내 등에 손을 얹고 본성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브라슈테테의 주방장도 홧김에 고용한 건가?”

“아니요. 그건 사심으로 고용한 거예요. 제가 먹고 싶어서요.”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치자 라이오넬의 입꼬리에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곧 사라졌다.

“그런데 큰일이군.”

“뭐가요?”

“브라슈테테와 와인 모두 폐하께서 좋아하시는 거야. 그대가 준비한 걸 알면 더 탐내실 텐데.”

“흠. 그럴 줄 알고 래블런 와인을 고른 거예요.”

의기양양하게 라이오넬을 봤다. 그는 무슨 소리인지 이해를 못 하는 것 같았다.

“하디거에게 들었는데 래블런 와인은 맛이 끔찍하대요.”

“흐음…….”

라이오넬의 반응이 석연치 않다.

역시 불길해. 빨리 가서 확인해 봐야겠다. 잠깐 자리에 서서 그를 바라보다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곧장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서랍을 열어 래블런 상단에서 온 답장을 찾아내 꺼냈다.

손에 쥐고 있던 종이를 옆에 나란히 내려놓자 원하지 않던 결과가 눈에 보였다.

“세상에.”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라이오넬이 방문을 닫으며 안으로 들어와 의자 등받이에 팔을 올렸다. 다른 팔로 책상 위를 짚은 그가 편지와 종이를 들여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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