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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제발 좀 망하세요 (74)화 (74/130)

74화

“직접 안 가시고요?”

“네. 할 일이 많아서요. 오전에도 다녀왔고요.”

그리고 허탕만 쳤지. 집무실에 갔을 때 라이오넬은 자리에 없었다.

요즘은 감시도 안 붙여 놓으면서 어떻게 알았는지 갈 때마다 코빼기도 안 비췄다. 그냥 우연이 겹친 건가 했는데 이틀째 이러니 의심할 수밖에.

심지어 어제는 저녁 식사에도 나오지 않았다. 일이 바빠 가볍게 때운다던데 집무실에 갔더니 또 없었다.

라이오넬을 찾겠다고 400개가 넘는 방을 다 뒤지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고, 정말 답답하다. 답답해.

‘그러니 저쪽에서 찾게 만들어야지!’

의기양양하게 소피에게 서류를 떠넘겼다.

……그리고 결재된 서류가 돌아왔다. 이걸 허락해 줬다고?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넬리 님, 어디 가세요?”

“이런 터무니 없는 예산안을 허락하다니, 가서 따져야겠어요!”

“예? 그거 레…….”

소피를 뒤로하고 무작정 꽈당이의 등 위에 올라탔다. 라이오넬의 집무실로 가서 예의상 문을 두어 번 두드리고 곧장 열었다.

“네, 넬리 님?!”

리지가 벌떡 일어나더니 책상 밑으로 숨었다.

술주정 부린 게 아직 민망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리지를 달래 줄 시간이 없었다. 내가 집무실을 둘러보는 동안 후다닥 밖으로 도망치는 그녀를 내버려 두고 고개를 돌렸다.

라이오넬은 없고, 집무실엔 레반스뿐이었다. 그는 평소처럼 생글거리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눈 밑이 거뭇했다.

“넬리 님.”

“레반스 님. 정말 공작님께서 이 예산안을 허락하셨나요?”

“결재는 제가 했습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자 그가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억지 미소를 지었다.

“리지가 하도 넬리 님이 하시는 일에는 다 뜻이 있다고 야단법석이라서요.”

“……리지가 좀 그런 면이 있죠?”

“많이요. 종교라도 세우신 줄 알았습니다.”

“어휴…….”

“후우…….”

동시에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런데 라이오넬은 어쩌고 레반스가 처리했어요?”

레반스는 대답하기 곤란하다는 듯 웃었다. 원래 라이오넬의 개인적인 사정에는 입을 잘 열지 않는 사람이라 그러려니 했다.

‘그래. 어디 언제까지 안 보이나 두고 보자.’

나는 콧김을 훅 내뿜고 밖으로 나왔다.

* * *

제럴드가 일을 빨리 처리하긴 했는지 와인 상단 래블런에서 며칠 만에 답장이 왔다.

우리 일정을 생각해서 답장을 보내자마자 출발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우리나라에도 와이너리가 있다기에 그냥 지부장이나 보낼 줄 알았는데 상단주가 직접 온다고 해서 놀랐다.

그래도 오는 손님을 마다할 순 없어 일단 상단주의 인상착의와 이름을 확인했다.

‘와인만 맛없지 꽤 성실하고 믿을 만한 상단인가 보네.’

상단은 마차를 끌고 올 테니 아마 사흘 정도 걸릴 것이다.

답장에 기본적인 가격표를 넣어 보내 줬는데 한 병당 가격이 어마어마했다.

‘와인 한 병 팔면 맥주 7000잔은 마실 수 있겠네.’

놀라운 건 과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알 게 뭐람. 나를 죽어라 피해 다닌 게 괘씸해서라도 돈으로 심술 좀 부려야겠다. 명분 없는 소비도 아니니까 괜찮아!

라이오넬은 며칠째 얼굴도 안 보이더니 이제는 일이 바빠 제대로 만나지 못했다. 아마 그것까지 계산하고 피해 다닌 것 같지만 말이다.

좋든 싫든 만찬 때는 보게 될 테니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그래도 돈은 왕창 쓸 거지만!’

잔뜩 벼르고 있었기에 며칠 뒤 래블런 상단이 왔다고 했을 때 활짝 웃으며 한걸음에 달려 나갔다.

멀리서 붉은 머리의 화려한 모자를 쓴 미인이 마차에서 내리는 게 보였다. 미리 전달받았던 상단주의 인상착의와 똑같았다.

그녀의 뒤로 분홍색 머리의 아가씨가 한 명 더 내렸다. 조금 더 속도를 내 두 사람 앞에 섰다.

“허억, 상단주, 후우…….”

너무 꽈당이만 타고 다녔나 봐. 오랜만에 뛰었더니 숨이 너무 가빠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일단 두 사람을 살폈다.

“라피레온 님! 어서 오세요! 편지로 인사드렸던 영지 관리인 넬리 페퍼예요. 이렇게 공작님을 털러 와 주셔서…….”

“털러 와 주셔서……?”

아차. 숨이 너무 가쁜 나머지 본심이 튀어나왔다.

나는 재빨리 말을 바꿨다.

“아니, 털러가 아니라, 제 마음의 짐을 덜었다고요! 계약에 관한 얘기는 성에서 하시겠어요? 제가 아주 거금을 들여서 별관을 싹 고쳐 놨답니다!”

말을 마치고 분홍 머리 아가씨를 보았다. 마침 눈이 딱 마주쳤다.

“그런데……. 이쪽 분은?”

“내 가족이죠. 같이 오게 됐는데 상관없죠?”

“오히려 환영이죠!”

접대해야 할 손님이 늘면 비용도 그만큼 늘기 마련이니까! 활짝 웃자 라피레온 님의 얼굴에 재미있다는 듯한 미소가 스쳤다.

그녀는 몸을 돌려 제 일행과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밝게 웃던 얼굴이 돌아서며 냉철하게 변했다.

절대 손해 보지 않을 것 같은, 그야말로 상단주에 어울리는 표정이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득실을 따져야 하기 때문에 잔뜩 긴장했겠지만 나는 아니지!

“이쪽으로 오세요.”

그녀를 안내하며 별관 안으로 들어섰다. 전부 최고급으로 꾸몄는데도 별다른 감흥이 없어 보였다. 다만 주변을 돌아다니는 사용인들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관리인.”

“네! 라피레온 님. 편하게 넬리라고 불러 주세요.”

그녀의 손가락이 공작가의 하인들을 가리켰다.

“난 내 사람만 곁에 둬. 공작가의 하인들은 치워 줬으면 하는데.”

하대가 굉장히 자연스럽다. 심기를 거스르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가 흘렀다.

“거래가 끝난 뒤에 집사님께 전달해 둘게요.”

말을 하고 하인들에게 눈짓했다. 눈치 빠른 하녀가 허리를 숙여 인사한 뒤 다른 사용인들을 이끌고 빠져나갔다.

곧 래블런 상단의 하인들이 별관을 채웠다. 그녀가 손짓으로 제 하인 한 명을 불렀다.

“차를 가져오렴.”

“예, 주인님.”

주객이 전도된 기분이지만 차 맛이 너무 훌륭해 잊고 말았다. 놀란 눈으로 보고 있는데 라피레온 님이 말을 걸었다.

“그럼 본격적으로 이야기해 볼까요?”

“좋아요. 보내 주신 구매 목록은 살펴봤어요.”

“마음에 드는 상품은?”

나는 챙겨 온 상품 목록지 가장 상단에 있는 와인을 손가락으로 쿡 찍었다.

“이걸로 100병 구매할게요!”

“그래도 되겠어요? 물론 래브런에서 취급하는 와인은 전부 최상품이지만, 만찬 요리나 손님의 취향을 파악해서 고르는 게 더 나을 텐데.”

“아니요. 비싼 게 최고예요!”

“비싼 게 최고라……. 그럼 결정하기 전에 이것도 살펴봐요.”

라피레온 님이 손을 까딱이자 대기하고 있던 하인이 다른 목록지를 가져왔다.

“원래 함부로 꺼내 놓지 않는데, 특별히 보여 주는 거예요.”

세상에. 사악한 와인 가격을 보며 혀를 내두를 뻔한 것을 겨우 참았다. 이 목록에 있는 와인 두 병이면 내 오두막을 사고도 조금 남는다.

“대량 생산되는 와인과 차원이 달라요. 선물용으로는 더없이 좋죠.”

멍한 정신에 라피레온 님의 목소리가 스쳤다. 가격을 다시 보자 정신이 아득해졌다. 도무지 제정신으로는 살 수 없는 가격이었다.

“선물은 취향을 알아야 하는데…….”

“아투뉴의 여왕님 취향이라면 제가 알아요. 디위나 크뤄르를 좋아하시죠.”

만찬에 오는 사람까지 조사했나 보다. 이 사람 진짜 장사 잘한다. 속으로 멍하니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디……. 이것도 한 병 살게요.”

“와인은 맛이 변하지 않도록 만찬 전날에 보내 줄게요.”

라피레온이 손을 까딱이자 하인이 계약서를 가져왔다. 그리고 내가 고른 와인의 이름, 수량, 가격을 적었다.

“계산은?”

“전표로 할게요.”

계약서와 전표를 주고받자마자 라피레온 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끝났으니 나가 봐.”

하인한테 한 소리인 줄 알았는데 그녀는 나를 보고 있었다. 눈만 깜빡이고 있자 라피레온 님이 손가락으로 문을 가리켰다.

얼떨결에 밖으로 나왔다. 잠깐 방문 쪽을 보다가 집사님을 만나기 위해 본성으로 들어갔다.

“집사님! 라피레온 상단주가 상단 하인을 쓰겠다고 해서요.”

“네. 말씀 들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거의 반사적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주인님을 찾으십니까?”

“아아니요?”

뜨끔해 고개를 바로 했다. 툭 튀어나온 입도 겸사겸사 바로 하고 집사님을 보자 서운함이 몰려왔다.

“벌써 얼굴 제대로 못 본 지 일주일하고도 삼 일이나 됐어요. 왜 절 피하는 걸까요?”

“넬리 님을 피하신다고요?”

집사님이 놀란 얼굴을 했다.

“주인님께서는 깊게 생각할 일이 있으면 방 밖으로 잘 안 나오십니다.”

“10일씩이나요?”

“일도 하셔야 하니까요. 요즘은 업무도 방에서 보셨습니다.”

“그럼 계속 방에 있었던 거예요? 노크해도 안 열어 주던데…….”

시무룩하게 중얼거리자 집사님이 달래는 듯한 목소리로 라이오넬을 변호했다.

“그럴 때는 사람도 잘 안 만나십니다. 절대, 넬리 님을 피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틀어박히기 바로 전날 아침 식사 때, 분명 저를 피하는 것처럼 행동했어요.”

“그건…….”

집사님이 잠시 고민하는 듯, 곤란한 듯 미소를 지었다.

“공작님 개인적인 문제라 말씀드릴 순 없습니다만 어쨌든 넬리 님에게 부정적인 감정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닙니다. 확실합니다.”

……큰일이다. 나 피하는 줄 알고 돈으로 심술부렸는데. 그냥 방에 틀어박혀 있는 거였다니!

지금 라피레온 님께 가서 물러 달라고 하면 물러 주실까? 그럴 리 없지. 진작에 집사님께 물어볼걸.

내가 안절부절못하는 걸 어떻게 해석했는지 집사님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아마 퇴근하실 즈음 별관 근처에 계시면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고민이 끝난 것 같던가요?”

“그런 건 아닙니다. 하지만 카스터 제국의 대귀족께서 손님으로 오셨으니 인사는 하시겠죠.”

“……누구요?”

“모르셨습니까? 별관을 호화롭게 고치시기에 아시는 줄 알았습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고개만 연신 갸웃거리고 있자 집사님이 설명을 덧붙이셨다.

“지금 별관에 오신 분은 카스터 제국 대공의 누이 되시는 분입니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불길한 기웃이 뒷덜미를 스쳤다.

이거, 그건데. 복수 망했을 때의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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