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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제발 좀 망하세요 (72)화 (72/130)

72화

* * *

식탁에 볼만 기댄 채 몸에 힘을 빼자 팔이 아래로 축 늘어졌다. 무기력하게 있는데 프레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왜 저러고 있어요?”

“왔어?”

“넬리. 갓 잡힌 해파리 같아요.”

“프레르는 프레르 같아.”

고개를 들자 프레르가 맹한 눈으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기분 나빠 해야 하는지 아닌지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웃긴데 웃을 의욕이 없다. 힘없이 웃다가 한숨을 내쉬며 다시 늘어졌다.

“……정말 왜 저래요?”

프레르가 하디거 옆에 앉아 바싹 붙었다.

하디거가 한쪽 발로 주변을 더듬더니 프레르의 의자 다리를 찾아냈다. 그대로 의자를 밀어내 프레르와 거리를 벌린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하디거를 대신해 프레르의 궁금증을 풀어 주었다.

“여왕 폐하 눈 밖에 나려면 어떡해야 할까?”

“알아내서 반대로 하려고?”

하디거가 농담조로 물었다.

“나 심각해.”

“폐하 밑에서 일하게 되면 영광 아니야?”

“영광이지. 영광이긴 한데, 너무 부담스러워. 내가 특출나게 유능한 것도 아니고.”

“넬리는 본인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어요.”

프레르가 뭘 알아! 그건 다 복수 실패의 부산물 같은 거란 말이야!

엉엉 울고 싶은 걸 참지 않고 식탁에 엎드렸다.

하디거가 손을 길게 뻗어 내 등을 토닥였다.

“들은 이야기가 있긴 한데.”

“뭔데?”

그가 손을 치우자마자 몸을 벌떡 일으켰다. 하디거는 고민하는가 싶더니 식탁에 팔꿈치를 세우고 턱을 괴었다.

“폐하께서 와인을 좋아하시거든. 좀 특별하게, 과하다 싶을 정도로.”

프레르는 우리 이야기에 흥미 없는지 스튜를 끓이겠다며 자리를 피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멈춘 하디거에게 물었다.

“그럼 와인을 특별하게 신경 써야 하나? 잘 보인 다음에 정중하게 거절하는 거야!”

“아니. 오히려 반대야.”

“반대라니?”

하디거는 한 백작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백작은 제법 유능했다. 영지나 가꾸며 소소하게 살고 싶어 했으나 여왕께서는 그가 수도로 올라와 자신을 돕길 원했다.

회유하기 위해 직접 영지를 방문했는데 와인이 너무 맛없더랬다. 그런데 그 백작은 와인이 맛없는 것도 모른 채 있었다고.

여왕은 백작을 더는 회유하지 않고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와인 맛을 모르는 자가 어찌 국정에 대해 알겠는가. 곁에 두지 않겠다.’

이거다! 마침 와인 업체도 추려만 놨지, 결재를 올린 건 아니었다. 나는 환하게 웃다가 문득 걱정되어 물었다.

“벌을 받진 않았대?”

하디거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못한 것은 없으니까.”

흐흐흐 하고 웃으려다가 하디거가 놀랄까 봐 참았다. 어쨌든 길이 보인다. 돌아가자마자 와인부터 바꿔야지!

“하디거는 어떤 와인이 제일 맛없었어?”

“래블런. ……나는 마셔 보지 못했지만 끔찍하다고 들었어.”

“얼마나?”

“귀족들이 대화하다가 혀를 내두를 정도로.”

좋아. 래블런. 기억해야지.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와인 목록을 뒤져 봤다. 그동안 공작성과 거래한 와인 상단 목록에는 비슷한 이름조차 없었다.

“흐흐흐.”

오랜만에 기분 좋게 웃으며 침대에 누웠다.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출근 준비를 마치고 식당으로 내려갔다. 라이오넬이 조금 피곤한 낯으로 서류를 보고 있었다.

“라이오넬, 좋은 아침이에요!”

라이오넬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나를 한동안 지그시 응시하더니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숙여 서류를 읽었다.

발걸음도 가볍게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잠깐 나에게 시선을 둔 그가 서류를 집사에게 넘겼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

“네! 좋은 생각이 났거든요.”

주변을 둘러봤다. 하인들도 제법 있었고, 라이오넬 근처에는 집사님도 있었다.

여왕님께 고의적으로 맛없는 와인을 대접하겠다는 건 사람이 많은 곳에서 할 말은 아니었다.

귓속말하기 위해 라이오넬 쪽으로 몸을 기울였는데 그는 내가 다가간 만큼 멀어졌다. 내가 몸을 원래대로 하자 그의 몸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빤히 봤지만 이쪽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었다.

“잠깐 귀 좀 빌려줘요.”

그제야 라이오넬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무 말도 없기에 허락의 의미인가 싶어 다가갔더니 또 쓱 멀어진다.

뭐야. 왜 저런담?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봤다. 곧 애피타이저가 나오고 라이오넬의 고개는 다시 돌아갔다.

내가 뭘 잘못했나? 화난 것 같진 않은데. 라이오넬이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그냥 말해.”

“다른 사람이 들으면 안 될 것 같아서요.”

그제야 라이오넬이 내 쪽으로 몸을 기울여 주었다. 그마저도 평소보다 반 박자 느렸다.

옆으로 숙여 주긴 했는데 여전히 귀가 좀 멀리 있었다. 의자를 그쪽으로 당겨 앉아 상체를 쭉 빼고 손으로 입 옆을 가렸다.

“여왕님이 와인을 좋아하신다고 하셔……, 응?”

말이 아직 안 끝났는데 라이오넬이 벌떡 일어났다. 고개를 한껏 젖혀 위를 올려다봤다. 라이오넬의 몸이 미묘하게 반대쪽으로 틀어져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라이오넬?”

그는 일어난 상태로 냅킨을 들어 입을 닦았다. 식사가 끝났다는 뜻이었다. 애피타이저도 안 먹었으면서!

“저 아직 말 다 못 했는데.”

“원하는 대로 해.”

뭘 듣지도 않고 원하는 대로 하래? 나랑 말도 하기 싫다는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무시할 수는 없는 법이다.

얼마 전까지는 믿는다느니, 빼앗기지 않을 거라느니 사람을 홀려 놓고선!

완전히 돌아선 라이오넬의 뒤통수를 흘겨봤다.

“제가 공작님 재산 거덜 내면 어쩌려고요?”

“그래도 되고.”

그는 기어이 돌아보지도 않고 식당 입구로 향하다가 몇 걸음 떼지 않아 멈춰 섰다.

“아침 거르지 말고 출근하도록 해.”

여전히 나를 등진 채였다. 그리고 그대로 식당을 나가 버렸다.

갑자기 태도를 싹 바꾼 게 서운하고 속상했다. 진짜, 확 거덜 낼까 보다. 씩씩거리며 아침을 다 먹고 관리소로 향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인사하니 출근해 있던 몇몇 감독관들이 인사해 주었다. 마침 제럴드도 있어 그에게 다가갔다.

“제럴드. 혹시 래블런이라는 와인 상단 들어 봤어요?”

제럴드가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희 쪽과는 거래한 적 없지만 유명합니다.”

역시. 악명이 자자한가 보다.

“축제 만찬 때 쓸 와인 그쪽과 거래하고 싶은데 연락 가능할까요? 수량하고 가격은 상의해서 정하고 싶어요.”

“주소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근데 외국 상단이라 편지로 거래에 대해 조율하려면 일정을 맞추기 촉박할 수도 있습니다.”

“먼 나라인가요?”

“카스터 제국의 상단입니다.”

“옆 나라네요. 그럼 만나서 상의하는 게 낫겠어요. 초청장도 같이 보내 주실래요?”

“예. 제가 전부 작성해서 보내겠습니다.”

“고마워요.”

제럴드는 바로 문서를 작성하기 시작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편지를 부치겠다며 외출했다. 흐뭇한 얼굴로 배웅하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수확 철이 다가와서 그런지 처리할 일이 어마어마했다.

생산량과 품질을 확인하느라 정신없이 경작지를 돌아다녔다. 유난히 큰 작물은 진상품으로 빼 두었다.

그중에 내 팔뚝만 한 옥수수도 있었다. 영지민들도 이런 크기는 처음 본다며 다들 놀라는 눈치였다.

“어째 올해는 커다란 작물이 유난히 많은 것 같지 않아?”

“그러게. 다 관리인님 덕분이지!”

……제 실패한 복수 덕분이에요. 어색하게 웃으며 케일과 상추밭까지 둘러보고 돌아왔다.

전년도와 대비해 수확량을 확인하다 보니 퇴근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자리를 정리하는데 소피가 책상 앞에 섰다.

“넬리 님.”

“네?”

“오늘도 고생 많으셨어요.”

“소피도요.”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소피가 목을 가다듬었다.

“일 끝나고 한잔하실래요? 이번엔 리지도 있어요.”

그녀의 얼굴에 긴장한 기색이 비쳤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도 기사 출신들 사이에 꼈다가 혼자 어색해질까 봐 거절했었지.

이번에는 그런 핑계도 없는데 흔쾌히 그러자는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내가 망설이는 사이 소피의 어깨가 점점 아래로 처졌다.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희미하고 씁쓸한 미소가 양심을 내리쳤다.

“갈게요.”

소피의 얼굴이 단번에 밝아졌다. 그녀가 내게 팔짱을 끼고 힘차게 사무실 문을 열었다.

“갑시다!”

자리에 앉아 있던 제럴드와 톰이 벌떡 일어났다.

“넬리 님도 가시는 거예요?!”

“감사합니다!”

아니, 감사할 것까지야…….

어영부영하는 사이 제럴드, 톰, 소피에게 둘러싸여 선술집에 도착했다.

자리를 잡고 얼마 지나지 않아 리지가 들어왔다. 소피가 손을 흔들었다. 나를 발견한 리지가 유니콘이라도 목격한 사람처럼 굳었다가 무섭게 달려와 안겼다.

“억!”

역시, 리지 몸은 튼튼하구나. 갈비뼈가 짜릿해 인상을 쓰니 소피가 그녀를 떼어 냈다. 그리고 종업원을 향해 소리쳤다.

“여기 맥주 여섯 잔이요!”

“아니, 일곱 잔!”

굵은 목소리 하나가 끼어들었다. 파우트 씨가 우리 테이블 쪽으로 오고 있었다. 그는 톰과 제럴드 사이에 앉으며 호탕하게 웃었다.

“푸하하! 거봐. 내가 온다고 하면 올 거라고 했지?”

소피가 고개를 저었다.

“파우트 씨의 파 자도 안 꺼냈습니다.”

“뭐? 그런데 오셨단 말이야?”

파우트 씨가 놀랍다는 듯 나를 쳐다봤다. 소피가 나에게 딱 달라붙어 있는 리지를 가리켰다.

“리지도 온다고 했어요.”

“넬리 님……!”

리지가 양손으로 입을 막고 나를 보며 울먹였다. 제럴드가 맥주를 받아 나눠 주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것 봐. 내가 진작 리지 데리고 오자고 했잖아.”

“그런데 진짜 파우트 씨랑 따로 술도 마셨어요?”

정신없는 와중에 톰의 질문이 날아들었다.

“네. 로만이 목장지기로 있을 때, 오두막에서요.”

“그건 그냥 수상한 놈 감시하러 간 넬리 님과 우연히 마주친 거 아닙니까?”

“우우. 파우트 씨, 우우.”

톰이 장난스럽게 야유하자 소피와 제럴드도 합세했다. 리지는 무슨 일인지는 모르는 눈치였지만 일단 같이 야유했다.

나도 은근슬쩍 끼어 같이 야유하는 척하자 파우트 씨가 배신감 어린 눈빛을 보내다가 발끈했다.

“난 그때 그놈이 그런 놈인지도 몰랐거든?! 그리고 우연히 만났어도 같이 술 마신 건 마신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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