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저야말로 공작 부인을 가까이에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침묵이 흘렀다. 숨 막히는 분위기에 슬쩍 고개를 돌렸다. 나를 보고 있었는지 라이오넬과 시선이 마주쳤다.
눈을 몇 번 깜빡이자 그가 미소를 지으려다 말았다. 그러고는 귀부인에게 싸늘한 목소리로 재촉했다.
“바쁘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영지는 이미 확인하신 것으로 아는데.”
듣는 사람의 등골이 다 서늘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당사자인 귀부인은 아무렇지 않은 듯, 입술로 우아한 곡선을 그려냈다.
“그렇게 경계하지 말아요, 알터우드 공작.”
“이만 돌아가 주시면 생각해 보겠습니다.”
라이오넬이 저러는 걸 보면 위험한 사람인가 보다. 하긴. 그 여왕님의 시녀로 있을 정도면 만만치 않게 무서운 분이실 거야.
괜히 시선을 내리깔고 불그스름한 홍차를 바라봤다. 눈 마주치지 말아야지!
“페퍼 양.”
다짐이 무색하게 바로 공작 부인의 눈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대는 야망이 있는가?”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라이오넬을 보았다. 한 달 전만 해도 바로 복수를 떠올렸겠으나 지금은……. 모르겠다.
“없습니다.”
“저런. 재능 있는 젊은이가 야망이 없어서야.”
묘하게 사람의 신경을 긁는 어조였다. 라이오넬이 저런 식으로 말했다면 ‘야망 같은 거 없을 수도 있죠!’라고 투덜거렸을 텐데.
상대가 상대인지라 그냥 웃어넘겼다.
“야망까진 아니더라도 원하는 바는 있겠지? 목표도 없이 일하진 않을 테니 말이야.”
왜 자꾸 저런 질문을 하나 싶어 그녀를 보았다. 혈색 좋은 얼굴에는 고상한 미소만이 떠올라 있을 뿐이었다.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순순히 대답했다.
“돈을 버는 게 목표입니다.”
공작 부인의 미소가 짙어졌다.
“아니지. 돈은 수단일 뿐 목적이 될 순 없네.”
그것참 돈이 목적인 사람이 들으면 서운해하겠네. 입술을 삐죽이려다가 그대로 말아 물었다.
라이오넬의 입꼬리가 움찔거렸다. 웃음을 참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나는 그를 보지 않으려 애쓰며 복수가 끝난 뒤에 하려 했던 일을 떠올렸다.
“시골에 작은 집 한 채를 살 예정입니다.”
“시골에?”
“네. 갓 구운 빵 냄새를 맡으며 아침을 맞이할 수 있는 곳으로요. 테라스에 흔들의자를 놓을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고요. 돈 걱정 없이 놀고먹는 게 제 꿈입니다.”
생각만 해도 행복하다. 액상 비료 배합법도 알았으니 식물도 가꿔 볼까?
정원에 무슨 꽃을 심을지 고민하는데 옆에서 코웃음 소리가 들렸다. 라이오넬이 필사적으로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지금 내 꿈을 비웃는 건가? 눈빛으로 불만을 표출하려다 아차 싶어 눈동자를 제자리에 뒀다.
“이것 참, 어렵게 되었군.”
공작 부인의 미소가 모호하게 변했다.
“유능하고 처세술이 좋다 하여 아델하르트 왕자와 비슷할 줄 알았는데…….”
아델하르트 왕자와 비슷하다니. 미친 사람처럼 웃으며 잘 알지도 못하는 나에게 교제하자고 헛소리하던 사람과 내가?
구겨지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는지 공작 부인이 소리 내어 웃었다.
“제법 귀여운 아가씨로구나.”
아까는 비꼬다가 이번엔 칭찬하다니.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다. 감사하다고 인사하며 고개를 들었는데 표정이 생각만큼 온정적이지 않았다.
고개를 기울이다가 그냥 생각하는 걸 멈췄다.
파악하려고 해 봤자 괜히 머리만 아플 뿐이다. 어차피 다시 볼 일도 없을 테니까!
마침 공작 부인도 나에 대한 흥미가 식었는지 라이오넬에게 말을 건넸다.
“아! 그러고 보니 그 소식 들었나요, 알터우드 공작?”
“말씀하십시오.”
“아델하르트 왕자 이야기가 나와서 떠올랐답니다. 곧 그의 최측근이 가진 영지에서도 이국의 작물을 수확한다고 하던데요.”
라이오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공작 부인은 나를 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알터우드 공작의 숙부도 이국의 작물 재배에 성공했다고 하더군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름 화기애애했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두 곳이나 작물 재배에 성공했다고? 죽기 전에는 단 한 곳도 성공하지 못했었는데.
혹시 아직 영지 내에 첩자가 있는 걸까?
하지만 그 시기에 모르는 사람이 들어온 적은 없다.
그럼 도대체 누가……?
“페퍼 양.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가?”
공작 부인의 목소리가 상념을 끊어 냈다.
고개를 번쩍 들자 붉은색 눈동자가 보였다. 불안한 눈으로 라이오넬을 봤다. 그는 알 수 없는 무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심장이 툭 떨어져 발치에 굴러다니는 듯했다.
내가 생각해도 가장 의심스러운 사람은 나다. 작물에 몰래 물을 대기도 했으니까. 게다가 내 입으로 검증된 방법이 아니라고 말했다.
라이오넬이라면 내가 작물에 무리해서 실험하고, 결과를 다른 사람에게 넘겼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아니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그의 성격상 분명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공작님…….”
“할 말은 끝나셨습니까, 에트킨 부인?”
라이오넬이 싸늘한 목소리로 내 말을 끊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공작 부인은 미소 띤 얼굴로 나를 빤히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쫓아내지 않아도 가려고 했어요, 알터우드 공작.”
“배웅은 집사가 할 겁니다.”
“필요 없답니다.”
굳어서 삐걱대는 다리를 움직여 억지로 일어났다. 에트킨 부인이 다가와 내 어깨를 고운 손으로 감쌌다.
“페퍼 양. 그대와도 자주 봤으면 하네.”
“영광입니다.”
무슨 정신으로 인사를 올렸는지도 모르겠다. 복잡한 머리를 어느 정도 정리했을 때, 공작 부인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라이오넬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 눈을 감고 있었다. 찌푸려진 미간에는 짜증과 피곤함이 뒤섞여 있었다.
의심이 깊어지기 전에 말해야 해. 주먹을 말아 쥐고 그에게로 몸을 틀었다.
“라이오넬.”
그의 눈동자가 구슬처럼 굴러 내게 닿았다.
“제가 한 게 아니에요.”
라이오넬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마 그의 표정을 볼 자신이 없었다.
이상한 일이다. 분명 의심받는 건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라이오넬과 타티아손에 대해 이야기 나눈 뒤로 서로를 더 이해하게 되었다고 생각한 탓일까? 코끝이 시큰거렸다.
내가 그의 외로움을 알아차린 것처럼 그도 내 외로움을 알아차렸다. 이번에야말로 서로를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나 보다.
그런데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눈앞이 흐려져 이를 악물었다.
이러면 안 돼. 울어서 해결되는 건 없다는 거 알잖아. 라이오넬이 나를 의심한다면 울 게 아니라 복수심을 불태워야지.
“넬리.”
거친 중저음이 고개를 들게 했다. 동시에 겨우겨우 참고 있던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라이오넬이 가볍게 혀를 차고는 검지로 내 눈 밑을 조심스럽게 훑었다. 잠시 손끝을 움찔거린 그가 주먹을 가볍게 말아 쥐며 손을 내렸다.
“알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에 생각이 멈췄다.
“……네?”
멍청하게 되묻자 라이오넬이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었다.
“그대가 아닌 걸 알아. 그러니 그만 울도록 해.”
“하지만 아까 화난 것처럼…….”
“빨리 가라고 장단 맞춰 준 것뿐이야.”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하겠다. 뭐에 장단을 맞춰 줬다는 거람?
훌쩍이며 서 있는데 라이오넬이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리고 제 옆에 있는 의자를 빼냈다. 다가가 앉자 하인이 따뜻한 차를 새로 가져다주었다.
한 모금 마시자 속이 좀 가라앉았다.
“폐하께서 그대를 원하시는 모양이야. 에트킨 부인은 그대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러 온 것이고.”
따뜻한 차로 달랬던 속이 다시 뒤집혔다. 차라리 탁자에 엎드려 엉엉 울고 싶었다.
이게 다 소문 때문이야! 실패한 복수에 이상한 소문이 더해져서 폐하의 관심을 산 게 분명하다.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모르겠다.
멍하니 있는 사이에도 라이오넬의 설명은 이어졌다.
“에트킨 부인은 타인의 본질을 알려면 그가 어떤 것에 분노하는가를 봐야 한다고 생각하는 부류지. 문제는 평소의 태도도 그렇다는 거야.”
손등으로 눈가를 훔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말투가 그러셨구나…….”
“그래. 솔직히 그대가 발끈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얌전하더군.”
저건 분명 놀리는 투다. 운 게 민망해 그를 잠깐 노려보았다.
“노려보지도 않고 말이야.”
“허벅지 꼬집으면서 참느라 기절하는 줄 알았어요.”
“비꼬지도 않고.”
“공작 부인이시잖아요. 제가 감히 어떻게 그래요.”
“나는 공작인데.”
맞다. 깨달은 표정을 짓자 그가 설핏 웃고는 차를 마셨다.
“라이오넬도 처음에는 대하기 어려웠어요.”
변명하듯 덧붙이자 그가 코웃음을 쳤다.
하긴. 지금의 라이오넬은 모르겠지. 하지만 죽기 3년 전, 그를 처음 만났을 땐 무서워서 말도 제대로 걸지 못했다.
그제야 과거로 돌아오고 난 뒤의 내 행동이 얼마나 방만했는지를 깨달았다. 그는 어쩌면 내 생각보다 훨씬 너그러운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을 의심하고 보는 태도와는 별개로 말이다.
“어쨌든. 신경을 긁어 대도 그냥 웃어넘기니 마음에 들지 않았겠지. 사이라도 틀어지게 만들 셈으로 의심할 만한 정보를 흘린 걸 테니 신경 쓰지 마.”
“……어떻게 신경을 안 써요.”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어. 첩자가 누구인지는 잡지 못했지만.”
“알고 있었다고요?”
라이오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왜 절 추궁하지 않았어요?”
그는 나를 빤히 보다가 눈을 내리깔았다.
“말하지 않았나? 그대가 아닌 걸 안다고.”
“날 감시했어요? 아니면 방이나 사무실을 수색해 봤다던가?”
“그대는…….”
라이오넬이 인상을 찌푸리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잠시 이마를 짚고 있다가 혼잣말처럼 탄식했다.
“그래. 전부 내 탓이지.”
그가 머리를 쓸어 넘기며 고개를 들었다.
“정황상-”
“정황이라고요?”
“-그대일 리가 없어. 그렇게 놀랄 일인가?”
라이오넬은 정황으로 상황을 판단하지 않는다. 그는 항상 확실한 증거를 원했다. 의심이 가실 때까지 확인하고, 또 확인할 수 있는 것들 말이다.
그런데 이건 마치……. 마치…….
“날 믿어요?”
내가 뱉은 말에 내가 놀라 입을 가렸다. 라이오넬은 금방 답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 위로 잠든 모습이 겹친다. 무방비하고 평온한 얼굴. 신뢰하지도 않는 사람을 앞에 두고 태평하게 잠들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있기야 있겠지만 라이오넬은 아니다. 절대 포함될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나는 이미 눈치채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복수만이 내가 과거로 돌아온 유일한 이유라고 생각해 외면했을 뿐.
내 생각에 라이오넬이 쐐기를 박았다.
“제법. 여러 의미로.”
마주친 눈에 거짓은 없었다.
“그러니 폐하께 빼앗기지 않아. 원하는 건 쉽게 포기하지 않는 분이시니 그대도 떠나고 싶지 않다면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 놓는 게 좋을 거야.”
그리고 깨달았다. 젊은 나이에 과로로 요절한 게 여전히 억울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미 복수는 망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