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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제발 좀 망하세요 (69)화 (69/130)

69화

“공작님과 왕자님, 데르사트 왕국에서 망명 온 왕족이 절친한 사이였다던데.”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내가 물어본 것에 최선을 다해 대답해 주고 싶은지 기억을 더듬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꽤 장난꾸러기였대.”

상상이 안 된다. 어렸을 때도 오금이 저릴 것 같은 눈빛으로 쳐다봤을 것 같았는데!

“가정 교사가 오기 전에 궁으로 도망치듯 놀러 오거나 숨는 건 흔한 일이었다더라. 장난치고 나서는 큰 소리로 웃으면서 사과해서 어른들이 혼내지도 못하게 만들고 말이야.”

“공작님이?”

하디거가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밖에 나가는 걸 좋아해서 집에 붙어 있는 날이 없었대. 가족보다는 친구들과 있는 시간이 더 많았고. 뭘 하든 함께했다던데. 믿기 힘들지?”

“응.”

“근데 사실이야. 공작님이 자랄 때 곁에 있던 사람한테 들은 이야기거든.”

“그랬던 사람이 어쩌다…….”

제대로 웃지도 못하게 됐을까? 왜 사람을 못 믿게 되었지?

산책하는 것 외에는 밖에 나가지도 않던데. 왜 그렇게 무리해서 영지를 성장시키는 것에 매달리는 걸까?

라이오넬에 대해 알고 싶었던 건데 오히려 궁금한 것만 늘어났다.

하디거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 불쑥 물었다.

“더 궁금해?”

궁금하다. 내 인생에 세 번의 전환점이 있었던 것처럼, 라이오넬의 인생에도 전환점이 있었을 것이다.

중대하지만 결코 유쾌하지 않은 전환점이.

하지만 그건 다른 사람을 통해 알아볼 만한 게 아니었다.

“궁금하긴 한데, 안 들을래.”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았다.

* * *

넬리는 떠났지만 아델하르트는 여전히 식탁에 앉아 있었다. 그는 턱을 괴고 추억에 잠겨 있다가 안대를 끌어 내렸다.

‘알터우드 공작령에 남아 해야 할 일이 뭔지 떠볼 생각이었는데…….’

발랄하던 사람이 축 처져 있는 게 신경 쓰여 기분을 맞춰 주려다가 도리어 휘말리고 말았다.

그래도 말을 놓은 건 큰 수확이다. 친구라는 말에 눈에 띄게 기뻐했으니 그걸 이용하면 속내를 캐내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조급해할 필요는 없다.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아 있으니까.

그는 넬리가 떠나기 전 끓여 주고 간 차를 내려다봤다. 컵을 손끝으로 훑으며 넬리의 처진 어깨를 떠올렸다.

‘너무 오래 시무룩해하지 않으면 좋겠는데.’

그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넬리는 다음 날 원래의 활기를 되찾았다. 축제 준비가 바쁜지 전처럼 자주 오지는 않았지만 종종 들러 밥을 먹고 갔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화제를 꺼내려다 보니 좀처럼 알터우드에 남아 있는 이유를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렇게 며칠을 더 소비했다.

아델하르트는 음유시인이라는 가짜 신분에 걸맞게 주기적으로 광장에 가 악기를 연주했다.

그날도 깨어나는 대로 느긋하게 준비해 밖으로 나갔다. 광장에 앉아 앞에 상자를 펼쳐 놓고 있을 때였다. 근처에서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파우트 씨, 어떻게 됐어요?”

“성공했어. 관리인님 쪽은?”

“성공했습니다.”

“그럼 곧 이쪽으로 지나가시려나?”

“예. 동선 확인했습니다. 저쪽에 수레도 준비되어 있어요.”

“리지는 잘하겠지?”

“걱정하지 마세요. 넘어트리고 부수는 데 소질 있잖아요.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거예요.”

넬리를 지칭하는 단어에 아델하르트는 돌아가려는 고개를 애써 고정하며 귀를 기울였다.

뭔가를 꾸미는 목소리였다. 아델하르트는 눈만 굴려 주변을 둘러봤다. 분위기가 평소보다 조금 어수선했다. 드문드문 사람들이 뭉쳐 귓속말하는 게 보였다.

넬리의 평판이 좋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어디나 시기하는 자들은 있기 마련이다.

그중에 라이오넬의 부관이었던 파우트와 소피가 포함되어 있다는 건 의외지만 말이다.

‘넬리에게 경고라도 해 줘야겠어.’

그냥 돌아가려고 했는데 몇몇 사람이 둘러앉아 아델하르트를 기다리고 있었다. 연주하러 온 사람이 관객을 두고 갑자기 가 버리면 뒤에 있는 두 사람이 수상하게 여길지도 모른다.

아델하르트는 주변을 정리하는 척했다. 그러면서 항상 휴대하는 짧은 칼날을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그는 조율하다가 의도적으로 현 몇 개를 끊어 냈다.

“아.”

뒤에 있던 두 사람이 돌아보는 게 느껴졌다. 아델하르트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한숨을 내쉬고 악기를 정리했다.

칼날은 돈을 받기 위해 펼쳐 두었던 상자를 닫으면서 그 안에 떨어트려 숨겼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매끄러운 은폐였다.

“오늘은 음악 못 듣는 건가?”

기다리던 사람 중 하나가 혼잣말처럼 물었다.

“집에 가서 현을 바꿔 오겠습니다.”

그가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할 때, 파우트와 소피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그들은 어딘가로 달려가더니 몸을 숨겼다.

갑자기 뒤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사라지자 아델하르트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느리게 움직였다.

연주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아델하르트의 등 너머를 보며 이야기를 나눴다.

“어? 관리인님이잖아?”

“옆에 공작님도 계셔.”

“수확제 때 여왕 폐하께서 오신다던데. 그거 때문에 직접 둘러보러 나오셨나?”

아델하르트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걸음을 옮겼다. 그때, 뒤에서 긴 비명이 들렸다.

“꺄아악!”

말을 보고 놀란 리지가 몸을 홱 돌리다가 넬리와 부딪힌 것이었다. 놀란 건 진짜였지만 넬리를 라이오넬 쪽으로 떠미는 손길은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악!”

넬리가 짧은 비명과 함께 넘어지려 했다. 그는 반사적으로 넬리를 받아 냈다.

“괜찮나?”

넬리가 고개를 푹 숙인 채 끄덕였다.

“다친 곳은?”

이번엔 고개를 가로저었다. 머리가 명치께를 스쳤다. 라이오넬은 또다시 이름 붙이지 못한 감정을 느꼈다.

요즘 들어 자주 속이 간지러워 이제는 퍽 친근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는 숨을 깊게 내쉬었다.

주변이 웅성거리기 시작하자 아델하르트가 뒤로 돌았다.

얇은 천으로 눈을 가려 놨기에 넬리의 표정까지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라이오넬의 품에 안겨 있는 것은 똑똑히 보였다.

밀착된 몸과 허리를 감싼 팔이 신경에 거슬렸다.

그는 찌푸렸던 얼굴을 펴고 아무것도 안 보인다는 양 주변에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누군가 상황을 설명해 줬지만 아델하르트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대신 머리로 소피와 파우트가 나눈 대화를 되짚었다.

‘넬리를 위험에 빠트리려는 게 아니라 라이오넬과 엮어 주려는 건가?’

왜 그런 짓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둘이 연애 감정으로 얽히면 빼앗기 힘들어질 텐데.’

아델하르트는 자신에게 설명해 준 사람에게 고맙다고 인사한 뒤 몸을 돌렸다.

계획에 차질이 생겨 짜증이 났지만 기분이 어떻든 라이오넬과 정면으로 마주치는 건 피해야 했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절뚝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가 적당히 멀어졌을 즈음, 넬리가 고개를 들었다.

환한 대낮에 라이오넬의 얼굴을 지척에서 마주하자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넋을 놓고 있다가 웅성거리는 소리에 라이오넬을 밀어냈다.

일단 옆에 서긴 했지만 이대로는 민망해서 걷지도 못할 것 같았다.

어떻게든 신경을 다른 쪽으로 돌리기 위해 두리번거리던 와중에 반가운 뒷모습을 발견했다.

“하디거!”

라이오넬이 넬리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갈색 머리에 류트를 맨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절뚝거리는 걸음을 보는데 넬리가 멀어지는 게 느껴졌다.

“저, 인사 좀 하고 올게요!”

그녀는 대답도 듣지 않고 몸을 돌려 달려갔다.

넬리가 옆까지 따라가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아델하르트가 몸을 살짝 틀었다.

라이오넬은 그를 주시했다. 안대와 앞머리가 얼굴의 반을, 단발의 갈색 머리카락이 얼굴 옆면을 가리고 있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콧대가 전부였다.

톤이 높은 넬리의 목소리가 드문드문 들렸다. 하지만 음유시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라이오넬은 천천히 그들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나 근처에 가기도 전에 대화가 끊겼다.

“그럼 저녁에 봐, 하디거!”

고개를 끄덕인 아델하르트가 절뚝거리며 멀어졌다. 동시에 넬리가 뒤를 돌았다.

그녀는 라이오넬을 보고 잠깐 걸음을 멈췄다가 다가왔다.

“어……. 저쪽부터 둘러보실래요?”

“그러지.”

라이오넬은 넬리가 옆에 설 때까지 기다리다가 걸음을 옮겼다.

“거의 매일 보는 얼굴이 일하는 도중에 달려갈 정도로 반갑나 보군.”

넬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라이오넬을 보았다. 그는 그제야 제가 한 말이 질타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나무라는 건 아니야.”

“네.”

“오늘 저녁도 음유시인에게 갈 생각인가?”

“도움받을 일이 있어서요.”

“어떤?”

“만찬 때 쓸 와인 고르는 거 도와주기로 했어요.”

“음유시인보다는 내가 더 잘 알 텐데. ……아니면 레반스나. 집사도 있군.”

“라이오넬은 바쁘잖아요. 다른 두 분도 축제 준비 때문에 바쁘고요.”

“그 정도 시간은 있어.”

넬리가 눈을 깜빡이다가 이리저리 굴렸다.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건 라이오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이 왜 친구를 빼앗긴 어린애처럼 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면 파우트에게 물어봐. 술에 조예가 깊으니까.”

“그냥 술꾼인 게 아니고요?”

넬리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어렸다. 라이오넬 역시 작게 웃었다.

리지는 분위기가 풀어진 둘을 흐뭇한 얼굴로 보고 있었다. 그러다 멀리서 염탐하고 있는 파우트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이만 빠지라는 듯 손짓했다.

리지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기회를 엿보다가 대화가 끊겼을 때 입을 열었다.

“저, 공작님, 꺅!”

그리고 돌부리에 발이 걸려 뒤돌던 라이오넬 쪽으로 넘어졌다. 순식간에 리지의 머릿속에 수십 가지 생각이 스쳤다. 그러나 남는 건 하나뿐이었다.

이대로 공작님 품으로 넘어지면 망한다.

리지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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