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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제발 좀 망하세요 (68)화 (68/130)

68화

* * *

“넬리 님. 넬리 님!”

“……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제럴드가 걱정스럽게 물으며 내 앞에 종이를 내려놓았다. 나는 고개를 젓고 양 뺨을 가볍게 내리쳐 정신을 차렸다.

“아니요. 이건 뭔가요?”

“저번에 부탁하셨던 와인을 취급하는 상단 목록입니다.”

맞다. 만찬 때 쓸 와인 고른다고 부탁했었지. 대답 없이 눈을 깜빡이다가 아차 싶어 고개를 들었다.

“아! 감사해요. 수고하셨어요.”

제럴드 씨가 살짝 고개를 숙이고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고 둘만 남자 소피가 나를 힐끔거렸다.

“넬리 님. 종일 멍하시네요.”

고민이 있는 건 아닌데 기분이 계속 싱숭생숭하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라이오넬 때문이었다. 재채기처럼 원하지 않을 때, 막을 새도 없이 그의 얼굴이 생각났다.

더 큰 문제는 복수심이 불타오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충 ‘아, 슬슬 복수해야 하는데…….’ 이런 생각만 들지 적극적으로 계획을 짜고 싶진 않았다. 이게 바로 미인계의 위력인가? 방해도 이런 방해가 없다.

“그러게요.”

내가 듣기에도 힘이 쭉 빠지는 목소리였다. 고개를 드니 소피가 무슨 일인지 묻고 싶어 입이 간질거리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누구한테 털어놓고 싶긴 한데……. 입을 벌렸다가 고개를 저었다.

소피한테 뭐라고 말해. ‘내가 사실 공작님한테 복수하려고 했는데 의욕이 안 생겨서 심란해요.’ 이럴 순 없잖아.

“소피는 먼저 퇴근해도 돼요. 저는 와인 상단 살펴보고, 과수원 상태 보고서하고 이것저것 좀 더 보고 갈게요.”

소피가 고개를 끄덕이고 책상을 정리했다.

“저녁은 꼭 드시고 일하세요.”

“네. 들어가세요.”

소피와 인사하고 와인 상단 이름을 훑었다.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네.’

종종 마시긴 하지만 식사에 곁들이기만 할 뿐 와인에 조예가 깊은 건 아니었다. 여러 개를 늘어놓고 비교해 보라고 하면 뭐가 다른지 전혀 모를 자신이 있었다. 그 정도로 아무것도 모른다는 뜻이다.

‘조언을 구할 사람이 필요한데…….’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또 라이오넬의 얼굴이 뿅 튀어나왔다.

아냐! 라이오넬은 안 돼!

고개를 거세게 저어 그의 얼굴을 지우고 책상에 엎드렸다. 진정하자. 진정하고, 일단 다른 것부터 처리하자.

수확 시기가 가까워져 보고서가 많이 올라왔다.

오늘 종일 멍하니 있느라 보지 못한 게 태반이었다. 이 정도면 밤이 되어도 끝내지 못할 것 같았다.

‘들고 가서 해야겠다.’

가는 길에 하디거한테 들려서 밥도 얻어먹어야지. 서류를 가방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꽈당이 위에 엎어져 하디거의 집으로 향했다. 도착하자마자 꽈당이에게 당근을 하나 물려 줬다.

“꽈당아. 잠깐 놀고 있어.”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문을 두드렸다. 평소보다 빨리 문이 열렸다.

“응? 프레르도 있었네요?”

“밥 얻어먹으러 왔죠.”

“나돈데.”

안을 들여다보자 안대를 맨 채 천천히 칼질하는 하디거가 보였다. 그가 내 목소리를 들었는지 말을 걸었다.

“마침 다 되어 가는데, 잘 오셨습니다. 들어오세요.”

프레르가 식탁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며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갔다. 맞은편에 앉자 하디거가 스튜에 버섯을 넣는 게 보였다.

그는 스튜를 몇 분 더 끌이다가 그릇에 담았다. 집에 익숙해진 것인지 그의 행동에는 거침이 없었다.

“하디거는 가끔 보면 눈이 보이는 것 같아요.”

잠시 나와 눈을 맞춘 프레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하디거가 담아 놓은 스튜를 쟁반에 옮겨 담았다.

“그렇죠? 집에 있을 땐 저보다 잘 보이는 것 같다니까요.”

맹한 목소리에 하디거가 미소 짓고는 물을 꺼냈다. 나는 그를 대신해 물과 식기를 챙겨 식탁에 앉았다.

하디거가 느리게 걸어와 의자를 더듬어 빼내고 자리에 앉았다.

나는 그의 손에 식기를 쥐여 주었다. 그리고 나도 숟가락을 들었다.

“잘 먹겠습니다.”

스튜를 입에 넣는데 프레르가 하디거의 접시에 파이를 덜어 주며 나에게 물었다.

“넬리 님. 오늘 왜 이렇게 멍해요?”

하디거가 포크로 파이를 자르며 프레르의 말에 동조했다.

“그러게. 말투가 꼭 프레르 같네.”

프레르가 부루퉁한 표정으로 하디거의 접시 위에 있던 파이를 도로 가져갔다. 하디거의 포크가 빈 접시를 쿡 찔렀다.

그 모습을 보며 프레르가 웃음을 터트렸다.

안 보이는 거로 놀리다니! 깜짝 놀라 그에게 뭐라고 하려는데 하디거가 자연스럽게 프레르의 발을 콱 밟았다.

“이런. 앞이 안 보여서 그만.”

그러면서 생긋 웃었다. 프레르는 투덜거리며 다시 파이를 돌려주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무례한 장난 정도는 웃어넘길 수 있을 만큼 친밀해 보였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나만 빼고 언제 그렇게 친해졌어요?”

“안 친해요.”

프레르가 뚱한 얼굴로 대답했다.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하디거가 능청스럽게 물었다.

“서운하세요? 우리 둘만 친해져서?”

나는 하디거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안대로 눈을 가려서인지 하디거의 표정은 종종 알아보기 어려웠다.

하지만 저게 농담인 건 안다. 시무룩해 있는 내 기분을 띄워 주려는 거겠지. 분위기에 맞추고 싶은데 이상하게도 웃음이 목구멍에 턱 걸렸다.

좁은 식탁에 사이좋게 모여 앉아 있으려니 불현듯 공작성의 넓은 식탁이 떠올랐다.

‘라이오넬은 혼자 먹고 있겠지?’

혼자 앉아 있으려면 조금 쓸쓸하겠……. 아니야!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머리를 털어 냈다. 기운 차려야지! 나 때문에 밥 먹다 체하겠다. 스튜를 떠먹으며 보란 듯이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맞아요. 프레르한테는 말도 편하게 하던데요?”

가벼운 목소리로 말하자마자 하디거가 기다렸다는 듯 말을 놨다.

“사실 친구하고는 반말하는 게 편해서. 넬리한테도 말을 편하게 하고 싶은데?”

“친구…….”

입 밖으로 나오는 단어가 생소하다. 다른 사람이 나를 친구라고 지칭한 적이 처음이라 그런가?

가라앉았던 기분이 조금 들떴다. 고개를 들었다. 하디거의 얼굴이 나를 향해 있었다.

“아니야?”

“맞아. 친구.”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하디거가 묘한 미소를 짓더니 턱을 괴었다.

어쩐지 그의 눈이 나를 빤히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물론 눈을 잃었다고 했으니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너무 친구 없는 티를 냈나?’

민망함에 고개를 돌려 프레르를 봤다.

“우리도 서로 말 편하게 할래요? 그래도 프레르가 제 첫 친구니까…….”

프레르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저었다.

“저는 존댓말이 편해요. 대신 그냥 이름으로 부를게요. 넬리는 말 편하게 해도 돼요.”

“응. 알겠어.”

스튜를 떠먹는데 자꾸만 헤실헤실 웃음이 나왔다. 괜히 목을 가다듬는데 하디거가 먼저 식사를 마치고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래서, 우리 넬리 친구의 고민은 뭘까?”

“말투가 그게 뭐야!”

유모나 보모가 할 법한 말투에 웃음이 터졌다. 그러다 라이오넬 생각에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리 친구라지만 복수심이 흔들린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털어놓기엔 설명할 게 지나치게 많은 고민이었다. 한 번 죽었다가 과거로 돌아와 복수하게 된 걸 믿어 줄지도 의문이고. 그래서 나는 다른 고민을 꺼냈다.

“그냥 수확제 만찬에 쓸 와인을 골라야 하는데 내가 와인에 대해 잘 몰라서.”

“여왕님이 오신다던?”

“어떻게 알았어?”

혹시 프레르가 말했나 싶어 그를 보았다. 그러나 프레르가 고갯짓을 하기도 전에 하디거가 입을 열었다.

“알터우드에 유능한 데다가 박식하고 인품이 훌륭한 관리인이 있다는 소문은 유명하니까.”

……순간 알터우드 공작령에 나 말고 관리인이 한 명 더 있는 건가 싶었다.

아무리 들어도 내 이야기는 아닌 것 같은데.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하디거가 말을 이었다.

“여왕님은 유능한 사람에게 관심이 많으셔.”

“그걸로 여왕님이 수확제에 오신다는 걸 유추한 거야?”

저 정도 추론 능력이면 음유시인보다는 보좌관으로 일하는 게 낫겠다. 하디거를 빤히 보는데 프레르가 심드렁하게 덧붙였다.

“유추는 무슨. 주워들었겠죠.”

“맞아. 거리에서 내 음악을 듣고 저택으로 초청하는 귀족이 제법 있어서. 그때 들었어.”

귀족들은 음악가나 하인들을 움직이는 가구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은밀한 대화가 아니면 있든 말든, 듣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를 마친 프레르가 하디거의 식기까지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빠르게 설거지를 마치고 벽에 세워 둔 지팡이를 들었다.

“저는 먼저 가 볼게요. 오리들 밥 줄 시간이라.”

프레르에게 손을 흔들어 준 뒤 조금 남은 음식을 마저 먹었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하디거를 보았다.

“그럼 하디거는 귀족들에 대해 많이 알고 있겠네?”

“그렇지.”

“혹시 공작님에 대해서도 들어 봤어?”

“라이오넬 알터우드 공작님?”

“응. 그냥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지금껏 그에 관해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점점 몰랐던 부분이, 연약한 부분이 보인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보는 라이오넬은 어떤지 궁금했다.

과거에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혹시 내가 오해하고 있는 부분은 없는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영지를 직접 둘러보는 경우가 드물었기에 영지민들은 그에 대해 잘 몰랐다. 요즘은 나도 소문을 수집하지 않아서 어떤지 모르지만, 내가 죽기 전에는 대체로 부풀려진 소문만 믿고 그를 두려워했다.

그렇다고 레반스나 아레트, 감독관들이나 기사들에게 라이오넬의 과거나 성격을 묻기엔 찜찜했다. 뒤를 캐고 다니는 것 같아 보일 테니까.

“내가 아는 건…….”

하디거가 운을 뗐다. 그는 여전히 턱을 괴고 있었다. 그러나 얼굴은 내가 아닌 다른 쪽을 향한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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