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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제발 좀 망하세요 (66)화 (66/130)

66화

프레르가 목장지기로 복귀한 뒤로 내 오두막은 줄곧 비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계속 성에 머물렀다.

사용인이 집안일은 전부 해 주고 식비도 들지 않는데 성을 두고 오두막으로 들어갈 리가.

팔아 버릴 생각으로 중개인에게 오두막을 맡겼다. 하지만 이주민이 없는 탓인지 집이 작고 동떨어져서 그런지, 사겠다는 사람은커녕 세 들겠다는 사람도 없었다.

‘일주일 전만 해도 안타까웠던 사실이 이렇게 고마울 줄이야.’

* * *

일이 끝나자마자 바로 마을로 향했다.

아는 얼굴들과 인사하며 광장에 들어서는데 어디선가 류트 소리가 들렸다. 광장 한쪽에 안대로 눈을 가린 남자가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축제 때가 아니면 듣기 힘들었는데.’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실력도 상당한 것 같았다. 사람도 꽤 몰려 있는 게, 제법 오래 연주한 모양이었다.

“어? 관리인님.”

“파우트 씨, 안녕하세요. 저분은 처음 보는 얼굴인 것 같은데, 누구예요?”

“이틀 전에 들어온 음유시인.”

“이주민은 안 받지 않나요?”

“아레트가 들여보내 준 모양이던데. 축제 기간을 잘못 알았다나 봐.”

“공작님도 아세요?”

“모를 리가. 어차피 떠날 사람이니까 잠깐 있는 건 상관없다고 생각했나 보지.”

파우트 씨가 푸하하 웃으며 내 어깨에 팔을 걸쳤다. 제법 오랜만에 본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시 음유시인을 보았다.

아름답게 이어지는 선율을 듣고 있는데 파우트 씨가 툭 물었다.

“그나저나 광장엔 어쩐 일이야? 나랑 한잔하러 나온 거야?”

“아!”

갑자기 원래 목적이 생각나 어깨에 걸쳐진 팔을 치웠다.

“중개인에게 가 보려고요.”

“집 팔렸어?”

“아니요. 취소하고 거기서 살 거예요.”

“뭐? 왜?!”

커다란 목소리에 음악이 뚝 끊겼다. 주민들도 파우트 씨 쪽을 힐끔거렸다.

어휴. 정말 못살아. 나는 얼굴을 가린 채 후다닥 시선에서 벗어났다.

더 있어 봤자 연주에 방해만 될 것 같아 음유시인의 나무 상자에 돈을 넣고 자리를 피했다.

그대로 중개인에게 향하는데 파우트 씨가 옆에 따라붙었다.

“각하하고 싸웠어?”

“아니요.”

“그럼 갑자기 성을 왜 나와? 그러면 안 되는데?”

“왜요?”

“어, 왜냐하면, 그게, 위험하니까. 거기 외진 곳이라 순찰도 잘 안 돌지 않나?”

“그건 그렇긴 한데…….”

“게다가 혼자 살면 얼마나 신경 쓸 게 많은데.”

옆에서 계속 저러니 흔들린다. 나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고개를 흔들고 걸음을 멈췄다. 파우트 씨를 보내야 마음 편히 중개인에게 갈 수 있겠어.

“집에 안 가 봐도 돼요? 퇴근 시간도 지났는데 제롬이 걱정하지 않을까요?”

“잠깐은 괜찮아.”

“안 괜찮아요. 계속 쫓아오면 저번에 집에 늦게 들어간 거, 술 마시다 그런 거라고 제롬한테 이를 거예요.”

“치사하게 아들을 가지고 협박을…….”

파우트 씨가 장난스럽게 배신감을 드러냈다. 안 받아 줄 거란 의미로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그는 뒷덜미를 문지르더니 순순히 포기했다.

“어쨌든 관리인님. 집 팔면 안 돼! 성에서 나오지도 말고. 다음에 만나면 꼭 다 같이 한잔하고.”

파우트 씨가 크게 소리치며 멀어졌다. 그에게 대충 손을 흔들어 주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중개인의 집은 광장 근처였기에 금세 도착했다. 문을 두드리자 중개인이 밝은 표정으로 나왔다.

“관리인님. 어서 오세요. 안 그래도 오늘 찾아뵈려고 했어요.”

중개인을 따라 현관으로 들어섰다.

“혹시 집을 산다는 사람이 생겼나요?”

“매매는 아니고 세 들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어서요. 같이 관리인님께 가려고 했죠. 이쪽으로 올 테니까 들어와서 기다리셨다가 만나보고 가세요.”

“그러면 좋은데, 어떡하죠. 매물을…….”

취소할 생각으로 왔다고 말하려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끼어들었다. 뒤를 돌아보자 중개인이 양해를 구하고 문을 열었다.

찾아온 사람은 아까 광장에서 봤던 음유시인이었다.

“마침 왔네. 앞에 관리인님 계세요.”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히다. 속으로 감탄하는데 음유시인이 이름을 밝혔다.

“아, 하디거입니다.”

내가 앞에 있다는 말을 들어서인지 그가 방향을 살짝 틀었다. 내가 서 있는 쪽은 아니었다. 나는 조용히 그의 앞으로 자리를 옮겨 인사했다.

“넬리 페퍼예요.”

“여기서 이러지 말고 앉아서 이야기해요.”

중개인이 먼저 안으로 들어서며 손짓했다.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가려다가 하디거 씨를 돌아보았다.

지팡이가 바닥을 더듬다가 콘솔 다리에 툭 걸렸다. 위에 있는 꽃병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저렇게 들어오다가는 분명 뭐라도 하나 깨트릴 것이다.

“안내해 드릴까요?”

“그래 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하디거 씨가 내민 손을 잡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자 그가 절뚝거리며 따라왔다.

걸음을 더 조심하며 거실로 들어섰다. 중개인이 생각하지도 못했다는 듯 소파 근처에 서서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대충 미소 지어 준 뒤 하디거 씨를 이끌었다.

“한 걸음 앞에 테이블이 있으니까 정강이 조심하세요.”

“네. 감사합니다.”

그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대답하며 테이블을 피해 소파에 앉았다. 나는 그의 맞은편, 중개인 옆자리에 앉았다.

“관리인님은 친절하신 분이시군요. 쫓겨날 걱정은 안 해도 되겠습니다.”

……들어오기도 전에 쫓겨날 예정인데.

괜히 양심이 쿡 찔려 어색하게 웃으며 중개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혹시 제 오두막 말고 다른 집 나온 건 없나요?”

“다른 곳도 있긴 한데, 가격이…….”

중개인이 말끝을 흐리며 하디거 씨를 힐끔거렸다.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그가 쓴웃음을 입에 물었다.

“제가 마음에 안 드십니까?”

“아니요! 처음 뵙는데 마음에 들고 안 들고 가 어디 있겠어요. 그냥, 마침 제가 그 집을 써야 해서요.”

“아…….”

낮은 미성이 안타깝게 흐려졌다.

“사정이 있으셨군요. 그런데 다른 집은 이미 처음 왔을 때 알아봤습니다.”

“맞아요. 잠깐 머물 사람이 쓰긴 가격이 부담스럽지.”

중개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하디거 씨의 말을 거들었다. 잠깐 머물 사람이라는 말이 가슴에 꽂힌다.

어쩌지. 고민하며 입을 꾹 다무는데 하디거 씨가 옆에 세워 뒀던 지팡이를 들었다.

“저는 신경 쓰지 마세요. 노숙은 익숙하니…….”

노숙한다는데 어떻게 신경을 안 써! 나는 일어나려는 하디거 씨를 붙잡았다.

“잠깐만요!”

하디거 씨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정말 노숙하실 생각은 아니시죠?”

“여관은 너무 비싸서요.”

하긴. 여관에서 5일 묵는 돈이 내 오두막 월세랑 비슷하니까. 축제 때까지 머물려면 여관에서 지내진 못하겠지.

어쩌지? 그냥 세 줄까? 몸도 불편하신 것 같은데 노숙하다가 험한 일이라도 당하면 어떡해.

그래도 라이오넬하고 매일 얼굴 맞대는 건 부담스러운데!

양손에 얼굴을 묻고 있는데 하디거 씨가 낮은 미성으로 조곤조곤 말을 걸었다.

“사정이 있는 분께 떼를 쓸 정도로 막무가내는 아니니 너무 고민하지 마세요.”

저렇게 좋은 사람을, 미인계 하나 피하자고 길바닥에 내앉혀야 할까? 넬리 페퍼. 너 그런 사람이야? 그러고도 두 발 뻗고 편안하게 잘 수 있겠어?

나는 입술을 꾹 깨물고 하디거 씨를 붙잡았다.

“계약할게요.”

“동정은 감사하지만, 저 때문에 곤란해지실까 봐…….”

“아니에요. 그냥 혼자 살아 보고 싶어서 오두막을 쓰려던 거니까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그래. 어차피 하디거 씨는 축제가 끝나면 떠나실 거니까. 그까짓 라이오넬의 미인계, 몇 달을 못 버티겠어?

슬쩍 라이오넬의 얼굴을 떠올려 봤다. 자신감이 심장과 함께 쿵 떨어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버틸 수 있겠지?

내 심정도 모른 채, 중개인이 밝은 얼굴로 계약서를 가져왔다.

“역시 관리인님. 내심 이러다 노숙자 생기는 건 아닌가 걱정했어요. 관리인님이 그럴 리 없는데. 하하하.”

“하하.”

어색하게 따라 웃으며 계약서를 받았다. 먼저 한번 훑어보고 가만히 앉아 있는 하디거 씨에게 물었다.

“읽어 드릴까요?”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계약서를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읽어 준 뒤 고개를 들었다.

“혹시 조율하고 싶은 부분 있으세요?”

“세를 일주일에 한 번 직접 드리고 싶습니다.”

“일주일이요?”

“예. 축제 때까지 머물 예정이라고는 해도, 보시다시피 떠돌이다 보니 어떻게 될지 몰라서요.”

자신을 떠돌이라고 지칭하는 게 자연스러워 보였다. 일자리를 찾아 전전하던 기억이 떠올라 입안이 떫었다.

예고 없이 범람하는 기억을 지우고 다시 하디거 씨를 봤다.

‘그러고 보니 다리를 절었지.’

돈을 직접 주려면 성이나 관리소로 와야 하는데, 성은 함부로 들어올 수 없다. 그렇다고 오두막이 관리소와 가까운 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광장과도 동떨어져 있었다.

마차를 빌려 관리소로 오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그나마 오두막과 목초지가 가까우니 당나귀를 빌리면 편할 텐데…….

“혹시 당나귀 탈 줄 아세요?”

“아니요. 눈과 다리가 이래서.”

“그럼 제가 매주 금요일에 퇴근하면서 들를게요. 그때 세를 주세요.”

“역시 친절하시군요.”

칭찬에 괜히 민망해져 목을 가다듬었다. 수정한 계약서를 읽어 주자 하디거 씨가 지장을 찍었다.

* * *

하디거와는 빠르게 친해졌다.

나는 라이오넬과의 식사 자리를 피하고 싶었고, 하디거는 종종 나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핑계가 생긴 건 달가웠지만 그래도 안 친한 사람 집에 혼자 가긴 어색하고 민망했다. 그래서 그나마 제일 가까운 곳에 사는 이웃인 프레르를 데려갔다.

음유시인이기 때문인지, 전국을 돌아다녔기 때문인지, 하디거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알았다. 게다가 프레르와도 죽이 잘 맞아 식사는 항상 즐거웠다.

정원 벤치에 혼자 앉아 있는 라이오넬과 가끔씩 마주치는 건 전혀 즐겁지 않았지만 말이다.

“오늘도 음유시인한테 다녀온 모양이지?”

“네.”

“자주 만나는군.”

“친해졌거든요.”

그는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슬금슬금 방으로 돌아가려는데 라이오넬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넬리.”

“네?”

“따라와.”

그러더니 집무실로 들어갔다. 영지 관련해서 할 이야기가 있나? 발을 억지로 움직여 따라 들어갔다.

레반스와 리지는 퇴근했는지 책상이 전부 비어 있었다. 라이오넬 책상에는 서류가 널브러져 있었으나 정작 그는 벽난로 근처, ‘ㄷ’자 모양으로 배치된 소파에 앉아 있었다.

다가가 맞은편에 앉자 라이오넬이 일어나 내 옆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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