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 * *
마차 안의 분위기는 수도로 향할 때와 사뭇 달랐다.
어떻게든 라이오넬을 보지 않으려 애쓰는 넬리와 달리 라이오넬은 시종일관 눈을 떼지 못했다.
시선은 탐스럽게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에 머물다 볼로 옮겨 갔다. 그 감촉이 얼마나 부드러웠는지를 떠올리자 라이오넬은 손끝이 간지러웠다.
만지고 싶은 충동이 치솟았지만 참았다.
대신 이따금 크게 깜빡이는 눈이나 마른침을 삼키고 오물거리는 입술을 바라봤다.
집요한 눈길을 견디지 못한 넬리가 달아오른 귀를 괜히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혹시 할 말 있으세요?”
할 말은 없었다. 그저 시선을 뗄 수 없어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늘 때문에 비교적 짙어 보이는 초록색 눈동자를 응시하던 라이오넬이 느리게 대답했다.
“아니.”
넬리가 다시 책을 봤다. 문자 그대로 정말 보기만 했다. 라이오넬은 그 페이지만 벌써 4시간째 보고 있다고 말해 주려다 입을 다물었다.
자신도 4시간째 가만히 앉아 있는 넬리만 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탓이었다.
자각하자마자 라이오넬은 애써 다른 곳에 시선을 두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다시 그녀에게로 돌아왔다.
마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몸이 쑤시는지 넬리가 눈살을 찌푸렸다. 자그마한 주먹이 허리를 퉁퉁 두드렸다.
그 모습이 안쓰러웠다. 돌아가면 근육통 약이라도 바르라고 하려던 차에, 마차가 멈췄다.
“공작님. 도착했습니다.”
넬리의 표정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누가 봐도 당장 뛰어내리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내가 너무 빤히 보긴 했지.’
라이오넬이 가만히 앉아 드물게 제 행동을 반성했다.
넬리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재빠르게 마차에서 내렸다.
“공작님, 저는 먼저 들어가 볼게요. 여독 잘 푸세요.”
“우리가 같이 산다는 걸 잊은 모양이군.”
저를 두고 도망치려는 넬리가 못마땅해 한 말이었으나 내뱉고 나니 어조가 묘했다.
짐을 내리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두 사람에게 쏟아졌다.
넬리는 할 말이 너무 많아 도리어 아무 말도 못 하는 사람처럼 굳어서 입술만 달싹였다. 그녀의 등에 가볍게 손을 얹은 라이오넬이 성을 향해 걸었다. 넬리가 멍하니 걸음을 옮기며 더듬거렸다.
“같이……. 그게 무슨, 무슨,”
그녀는 고장 난 톱니가 헛도는 것처럼 연신 ‘무슨’만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그러다 라이오넬이 웃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일부러 놀리는 건가 싶어서 그를 흘겨봤지만, 붉어진 볼과 앙다물 입술 때문에 유감스럽게도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렇게 말씀하니까 꼭 동거하는 거 같잖아요!”
한껏 낮춘 그녀의 목소리가 라이오넬의 생각을 가로막았다. 그는 위험한 생각을 멈추고 장난스레 미소 지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
경악 어린 얼굴로 저를 올려다보는 게 제법 유쾌했다.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아, 라이오넬은 입안을 꾹 깨물었다.
그는 집사의 마중을 받으며 현관으로 들어갔다. 돌아보니 넬리는 같은 자리에 같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아직 허리가 아픈 것 같던데, 쉬기 전에 근육통 연고 바르도록 해.”
동거의 여파가 가시지 않은 머리에 허리 통증이라는 단어까지 들어오자, 넬리의 얼굴이 다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 * *
도대체 갑자기 왜 저러지? 최근에 잘 웃고 농담도 좀 하긴 했지만,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갑자기 너무 잘 자서 살짝 미쳤나?
아직도 크게 뛰는 심장께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짐을 들고 들어오던 메리가 나를 보더니 눈을 크게 깜빡였다.
“어디 아프세요?”
“아니요. 그냥 심장이……. 너무 쿵쾅거려서요.”
“넬리 님, 혹시…….”
메리가 짐을 내려놓고 뭔가 기대하는 눈으로 다가왔다. 나는 그녀와 눈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라이오넬이 선 넘는 장난을 쳐서 화가 났나 봐요.”
“…….”
기대로 반짝이던 눈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옆에 삽을 두고 손으로 흙을 파는 사람을 보는 듯한 눈빛이다.
메리가 체한 사람처럼 가슴을 두드렸다. 깊게 한숨을 내쉬고 몸을 돌리는가 싶더니 별안간 고개를 홱 틀어 나를 봤다.
“넬리 님. 방금 공작님을 이름으로 부르신 건가요?”
원래 화나면 이름으로 불렀는데. ……프레르 앞에서만 그랬나?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잠깐 움찔했다가 고개를 저었다.
이제 허락받았으니까 찔릴 것도 없지!
순순히 끄덕이자 메리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녀가 드물게 생긋 웃고 짐을 정리했다.
나는 조금 더 앉아 있다가 심장 박동이 원래대로 돌아온 뒤에야 메리를 도왔다.
어젯밤 입었던 옷이 손에 걸렸다. 바닥에 오래 앉아 있었던 탓인지 밑단이 조금 지저분했다.
그러고 보니 손목이 안 아프네. 몇 시간이나 붙잡혀 있어서 멍이라도 들 줄 알았는데 신기하다.
‘조금 뻐근하긴 하지만 이 정도면 양호한 편이지.’
손목을 돌리고 있는데 민망한 기억이 끼어들었다.
손바닥으로 짚었던 단단한…….
‘그만! 그만 생각해, 넬리 페퍼!’
머리를 감싸고 양 볼을 찰싹찰싹 두드리자 엄한 생각이 날아갔다.
여전히 볼이 뜨겁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하지만 절대 설렌 건 아니다.
낭만적인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근육 한 번 만졌다고 설레면 너무 변태 같잖아! 하물며 상대가 라이오넬인데! 절대 그럴 리 없지.
‘이건 그냥 놀란 거야. 그래. 그렇고말고.’
진정하기 위해 가슴을 연신 쓸어내렸다.
“이건 어디에 둘까요?”
메리가 고급스럽게 장식된 상자 하나를 가져왔다. 그린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들어 있는 상자였다.
보자마자 목걸이를 걸어 주던 손길이 떠올랐다. 고개를 저어 실체 없는 감촉을 털어 내고 힘없이 부탁했다.
“아무 데나, 안 보이는 곳에 둬 주세요. 옷장 깊숙이라든가, 서랍 맨 아래라든가, 그런 곳에요.”
“네.”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모르겠다. 기계적으로 손을 움직여 짐 정리를 마치고, 씻고, 누웠다. 허리가 아파 연고를 꺼냈다. 또 라이오넬이 떠올랐다.
‘미쳤어, 정말.’
허락도 없이 요동치는 심장을 혼내 준 뒤 약을 바르고 침대에 누웠다.
푹 자고 일어나자 다행히 아무렇지 않았다.
‘그래. 그럼 그렇지.’
너무 피곤해서 부정맥이라도 왔었던 모양이다. 아니면 잠 깬다고 홍차를 너무 많이 마셨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아침을 먹으러 내려갔다. 언제나 그렇듯 라이오넬은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왔군.”
“네.”
좋아. 평소와 별다른 거 없는 인사다. 안도의 숨을 내쉬고 자리에 앉았다.
이제 조용히 밥을 먹고 출근을 하면 완벽……,
“잠은 잘 잤나?”
“네.”
어깨와 등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제발. 긴장하지 마. 심장도 뛰지 마. ……그런데 심장이 안 뛰면 죽잖아. 그럼 적당히만 뛰자. 눈치껏. 적당히.
일부러 아무 생각이나 하며 소고기 스튜를 먹었다. 오래 조리한 것인지 입안에 넣자마자 고기가 녹아 사라졌다.
눈을 크게 뜨고 소고기를 하나 더 떠먹었다. 그러다 무심결에 고개를 돌렸는데, 붉은 눈과 시선이 맞닿았다.
“컥, 콜록!”
잘못 넘어가려는 고기를 기침으로 겨우 막고 물을 마셨다.
“잘 먹는군. 소를 좋아하나?”
“……부드러운 고기는 다 좋아해요.”
“그래.”
어색해. 어색해 죽겠어! 나는 또 눈치 없이 뛸 준비를 하는 심장을 노려보다가 벌떡 일어났다.
“저는 출근할게요! 공작님도 일 열심히 하세요.”
라이오넬의 왼쪽 눈썹이 움직였다. 뭐야. 뭐가 마음에 안 든 건데. 내가 부드러운 고기를 좋아하는 게 마음에 안 들었나?
어쨌든 도망치는 게 우선이다.
나는 꾸벅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려 빠르게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곧장 꽈당이가 있는 마구간으로 달려갔다.
“꽈당아!”
오랜만에 본 내가 반가웠는지 꽈당이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나는 꽈당이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뛰어서 그런지 고동 소리가 커졌다. 심장을 귓가에 가져다 놓은 것 같았다.
“꽈당아. 이대로는 안 되겠어.”
다짐하듯 말했지만 꽈당이는 관심 없다는 듯 주둥이로 내 허벅지를 툭툭 건드렸다. 시끄럽고 빨리 타라는 뜻인 것 같았다. 차가운 당나귀 같으니라고.
‘이왕 이렇게 된 거 좀 일찍 출근하자.’
위에 올라타자 꽈당이가 또각또각 걸음을 옮겼다. 막 정원에 들어서려는데 현관 쪽으로 난 정원 입구에서 라이오넬이 보였다.
다른 길로 가야겠다고 마음 먹자마자 그가 나를 발견했다. 무슨 영문인지 꽈당이가 걸음을 멈췄다. 그러더니 라이오넬에게로 걸어갔다.
아니야. 거기가 아니라 관리소로 가야 한다고!
“넬리.”
“하하. 공작님. 산책 나오셨나 봐요.”
“흐음…….”
지척에 멈춰 선 라이오넬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나를 들여다봤다.
“이름.”
그가 허리를 숙이자 황홀한 얼굴이 더 가까워졌다.
“허락했는데 왜 부르지 않지?”
내리깐 눈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짙은 눈매를 시선으로 따라 그렸다. 그러다 볼을 타고 흘러 입술에 닿았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제 보니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웠다. 꽈당이 위에 앉아 있다는 것조차 잊고 나도 모르게 상체를 뒤로 뺐다.
라이오넬이 뒤로 넘어가는 내 몸을 잡아 주었다. 상체를 원래대로 세웠지만 등을 감싼 손은 사라지지 않았다.
“볼이 붉어.”
“아까 뛰어서 그래요.”
“그래서, 이름은?”
“부를게요. ……라이오넬.”
불러 줄 테니까 제발 허리 좀 놔주세요! 애원하고 싶은 걸 참으며 발끝을 바라봤다.
별안간 라이오넬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 살짝 찌푸려진 미간이 보였다.
뭐야. 해 달라는 대로 해 줬는데 왜 저런 표정이람.
아니야. 차라리 저런 표정이 낫다. 지지 않고 눈싸움을 하듯 똑바로 바라보자 그가 설핏 웃고는 손등으로 내 볼을 가볍게 훑었다.
“열이 나는 것 같으니 무리하지 말도록 해.”
평소보다 낮은 목소리에 목덜미가 저릿했다. 얼굴을 빼며 고개를 끄덕이자 라이오넬이 뒤돌아 성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이제야 알겠다. 뭐가 목적인지는 모르지만 라이오넬은 지금 나한테 미인계를 쓰고 있는 거야!
‘성에서 나가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