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제발 좀 망하세요 (64)화 (64/130)

64화

잘 벼려진 날이 목에 닿을 정도로 검이 가까워졌으나 아델하르트는 주춤거리는 기색조차 없었다.

아레트는 눈앞의 음유시인이 정말 눈이 먼 자라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라이오넬이라면 어떤 판단을 내렸을지 고민했다.

의심하고 감시를 붙일지언정 진짜 몸이 불편한 자일 수도 있다는 것을 감안해 일단 들여보내라고 했을 것이다.

아레트는 병사에게 눈짓했다. 병사가 고개를 끄덕이고 아델하르트에게 소리쳤다.

“문을 내려 줄 테니 들어오쇼!”

“기사단장님께 허락을 받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아델하르트는 다시 한번 안 보인다는 사실에 쐐기를 박았다.

병사가 축제 때까지 머물러도 괜찮다고 하자 아델하르트가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등 뒤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아레트 덱스터와는 스치듯 몇 번 마주친 게 다였다. 알아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마음을 놓고 있는데 별안간 아레트가 뒤에서 말을 걸었다.

“이름은?”

신분을 증명할 만한 게 없으니 간단한 신원이라도 조사할 생각이었다.

아델하르트는 다른 사람이 있는 줄 몰랐다는 듯 몸을 움찔거렸다. 그리고 아레트의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몸을 틀었다.

“누가 더 계십니까?”

“기사단장.”

“아. 하디거입니다.”

“여기 오기 전에 머물렀던 곳은?”

“수도에 있었습니다.”

“직업은?”

“음유시인입니다.”

“범죄 경력은?”

“없습니다.”

“들여보내 줄게. 축제 때까지 조용히 지내.”

“감사합니다. 소란 피우지 않겠습니다.”

아레트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음유시인의 눈이 안 보인다는 것을 깨닫고 소리 내어 대답했다.

“응. 병사 붙여 줄 테니까 안내받아.”

“감사합니다.”

아레트는 병사 한 명을 불러 붙여 주고 조용히 떠났다.

아델하르트는 병사의 도움을 받아 주의해야 할 것을 듣고 여관을 잡았다. 그는 짐을 풀고 마을이 어둠에 잠기길 기다렸다.

그리고 인기척이 들리지 않을 때를 틈타 여관 창문을 통해 조용히 나왔다.

프레르에게 보고 받았던 경비대의 순찰 시간과 경로를 떠올리며 들키지 않게 움직였다.

프레르의 오두막 앞에 도착한 아델하르트는 문을 두드리려다 말고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는 창문의 걸쇠가 잠기지 않은 걸 확인하고 벌컥 열었다.

“으악!”

프레르가 비명을 지르며 지팡이를 들었다.

“누구……. 왕자님?”

“어때, 엘링. 창문으로 들어오니까 멋져?”

“생각보다 별로네요.”

프레르가 지팡이로 머리를 긁적이며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간 떨어질 뻔했어요.”

아델하르트가 웃음을 터트리며 의자에 앉았다. 프레르가 자리에서 일어나 차를 끓였다.

“어떻게 벌써 오셨습니까?”

“무도회가 끝나자마자 말을 타고 달려왔지.”

“뭘 그렇게 서두르셨어요.”

“라이오넬이 성에 없을 때 들어오는 게 편해. 내가 궁전에 있는 줄 알 테니까. 나중에 눈먼 음유시인 하나가 들어왔다는 보고를 들어도 굳이 찾아와서 확인하진 않을 것 같아서 무리 좀 했지.”

“어쩐지 얼굴이 반쪽이 됐더라.”

찻잔을 꺼내 온 프레르가 아델하르트를 훑어보다가 맹한 목소리로 물었다.

“근데 변장은 그게 다예요? 머리만 갈색인데?”

“들어올 때는 안대도 쓰고 다리도 절뚝였어. 아레트 덱스터와 마주쳤는데 눈치 못 채더라.”

“기사단장이 왕자님 얼굴을 알아요?”

“전쟁에서 돌아왔을 때 스치듯 몇 번 본 적 있으니까, 아마 알겠지?”

“조심할 필요는 없겠네요.”

“맞아. 라이오넬만 조심하면 돼. 변장했어도 정면에서 마주치면 눈치챌 테니까.”

“아항.”

프레르가 그의 맞은편에 앉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넬리 페퍼는 어떻게 친해지시게요? 만만치 않을 텐데.”

“안 그래도 한번 거하게 차였어.”

아델하르트는 샴페인을 단번에 비우던 넬리를 떠올리며 미소 지었다.

“네가 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이라고 했는지 알겠더라.”

길거리에서 치근덕거리는 치한을 보듯 저를 보던 초록색 눈을 떠올리자 유쾌함을 참을 수 없었다.

그는 별안간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이상한 사람이야.”

프레르는 아델하르트의 미소를 빤히 바라봤다. 그 시선을 느낀 아델하르트가 표정을 갈무리했다.

“어떻게 하면 좋은지 네가 조언 좀 해 봐.”

“흠…….”

프레르가 차를 홀짝이다가 불현듯 떠오른 기억에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종종 엄청 예리하니까 의심스럽게 행동하지 마세요. 들키면 냉큼 공작한테 알려서 위장한 보람도 없게 만들걸요.”

“그런 당연한 거 말고 다른 건 없어?”

프레르가 멍한 표정으로 과거를 회상했다.

“자기를 이방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어요. 동질감을 형성하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요.”

“그건 좀 쓸 만하네.”

“아! 그리고 불쌍한 척하면 잘 먹혀요.”

아델하르트가 무슨 말이냐는 듯 애매한 미소를 띠고 고개를 기울였다. 프레르가 대답하기 귀찮다는 듯한 표정으로 차를 홀짝였다.

* * *

강렬한 햇살이 감은 눈꺼풀 밑을 비췄다.

라이오넬은 평소와 달리 개운한 기분을 느끼며 눈을 떴다.

수면 부족과 악몽의 여파로 일어나자마자 머리가 깨질 것 같았던 평소와는 전혀 다른 아침이었다.

‘이렇게 자 본 적이 언제였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부모님이 의문의 마차 사고로 돌아가신 뒤로는 제대로 자지 못했다.

그는 조금 더 자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작게 들리는 숨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라이오넬은 검을 찾기 위해 머리맡으로 손을 뻗으려 했다. 그러나 그의 손에는 이미 다른 것이 쥐어져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바닥에 앉아 소파에 비스듬히 엎드려 잠든 사람이 보였다.

‘넬리 페퍼.’

라이오넬은 일어나지 않고 생각에 잠겼다. 드문드문 기억이 이어졌다.

그는 언제나처럼 과거의 망령에 시달렸었다. 그때 누군가 이름을 불렀다.

‘일어나 보세요, 공작님. 라이오넬.’

그를 악몽에서 건져 올린 목소리는 분명 넬리의 것이었다. 반쯤 잠에 취한 상태로 그녀와 대화를 나눈 것 같은데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막 악몽이 시작되려 할 때 그를 다독이던 다정한 손길만큼은 이상하리만치 생생했다.

사실 다독임이 아니라 아픈 팔을 빼내기 위한 공격이었지만, 라이오넬은 알지 못했다.

“으음…….”

넬리가 인상을 찌푸리며 눈꺼풀을 움찔거렸다.

라이오넬은 그 작은 움직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떨리던 속눈썹이 느리게 팔랑였다. 이내 눈꺼풀이 열리고, 몽롱한 눈동자가 새싹처럼 피어났다.

아침 햇살이 깃든 눈동자는 얕은 물처럼 투명하게 반짝였다.

라이오넬은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잊었다. 연녹색 홍채에 새겨진 옅은 갈색과 금빛 무늬에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공작님. 깨셨으면 손목 좀 놔주세요.”

“……아.”

라이오넬이 한 박자 늦게 멍한 소리를 내며 손에 힘을 뺐다.

“자는 사람 힘이 왜 그렇게 세요?”

넬리가 앓는 소리를 내며 제 손을 마구 주물렀다. 투덜거리는 목소리나 입술이 사랑스러웠다.

그러니까, 이건 그냥 순간적인 충동이 입 밖으로 나간 것뿐이다.

“이름으로 불러도 돼.”

“네?”

넬리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당황스러운 그녀의 심정을 대변하듯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그 사이로 하얀 치아와 선홍색 혀끝이 보였다. 라이오넬은 또다시 시선을 빼앗기려다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아직 잠이 덜 깼나.’

그는 마른 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몇 번 문질렀다.

“원래 불쑥 잘 부르지 않았나? 놀랄 일은 아닌 것 같은데.”

“그거야 그렇긴 한데…….”

마음대로 부르는 거랑 허락받는 거랑은 다르잖아요. 넬리는 뒷말을 삼켰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어차피 속으로는 맨날 라이오넬이라고 하니까. 실수로 툭 튀어나왔을 때마다 눈치 안 보고 좋지 뭐. 그런 생각이었다.

하지만 막상 허락을 받고 나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편 라이오넬은 항상 선을 긋던 넬리가 너무 쉽게 허락하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부드럽고 풍성한 붓으로 갈비뼈를 훑는 느낌과 비슷했다. 생소하고 낯간지럽다.

이 감정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알 수 없어 입을 다물자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그 와중에도 라이오넬의 시선은 넬리에게 향해 있었다. 집요한 눈빛이었다.

넬리는 자신이 딸기 푸딩이라도 된 것만 같았다.

‘일단 일어나야지.’

언제까지 바닥에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아침을 핑계로 자리를 피하든지 해야지.

생각을 마친 넬리가 몸을 반쯤 일으켰을 때였다.

허리 쪽에서 근육을 쥐어짜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으윽.”

넬리의 다리가 툭 꺾였다. 라이오넬은 반사적으로 잡고 있던 넬리의 팔을 끌어당겨 쓰러지는 몸을 받아 냈다.

하지만 그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게 있었다.

하나는 라이오넬은 아직 소파에 누워 있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으아악!”

넬리가 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잠이 들어서 몸에 힘이 다 빠진 채로, 꽤 오랜 시간을 말이다.

넬리는 라이오넬의 위로 툭 쓰러지고 말았다.

그의 목덜미 위로 얇고 풍성한 갈색 머리카락이 쏟아졌다.

넬리가 바르작거리자 머리카락이 라이오넬의 살갗을 스치며 비단처럼 흘러내렸다.

“잠깐, 움직이지 마.”

가라앉은 목소리에 넬리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라이오넬은 의문의 감정에 불꽃이 튀는 걸 느꼈다. 명치께가 무겁고 뜨거웠다.

그는 이를 악물며 넬리의 얼굴을 가렸다. 부드러운 이마와 양 볼이 손바닥에 닿았다. 공기에도 묘한 열기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넬리 역시 자꾸만 귓바퀴가 뜨거워졌다. 그녀는 일어나기 위해 반사적으로 바닥을 짚었다. 그러나 소파는 좁았고, 그녀가 짚을 만한 평평한 곳은 라이오넬의 가슴팍뿐이었다.

손길이 닿자 움찔거리는 게 선연하게 느껴졌다.

“저는, 저, 저는, 출발 준비할게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넬리가 저린 다리를 절뚝거리며 도망치듯 문으로 향했다.

라이오넬이 상체를 일으켰을 때, 그녀는 이미 방문을 열고 있었다.

넬리가 잠깐 뒤를 돌아보았다. 시선이 맞닿자 펄쩍 뛰기라도 할 듯이 놀라며 얼굴을 붉혔다.

라이오넬은 그녀를 붙잡고 싶었다. 끌어당겨 다시 제 위에 올려놓고 싶었다. 동시에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황당했다.

‘미친 건가?’

작은 헛웃음이 문 닫는 소리에 묻혔다.

그는 얼굴을 한번 쓸어내리고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서서히 달아오르던 자그마한 얼굴. 그 빛깔이, 온기가, 촉감이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라이오넬은 그 기억을 붙잡기라도 하려는 듯 손을 말아 쥐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