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안 그래도 충분히 긴장하고 있는데요.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를 조금이라도 늘이기 위해 문에 바짝 붙었다.
라이오넬이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평소라면 혼자 휙 돌아서 소파로 갔을 텐데, 오늘은 미동조차 없었다.
“내가 잠을 못 자는 게 신경 쓰이나?”
넬리는 어이없다는 눈으로 라이오넬을 보려다가 그대로 굳었다.
‘신경 쓰이냐니!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안 되나?’
확실히 요즘 좀 신경 쓴 것 같긴 하다. 하지만 이건, 이건 그냥…….
“잠 못 자면 얼마나 힘든지 아니까요.”
그래. 동질감 때문이야. 라이오넬에게 동질감을 느낀다는 게 조금 불쾌하긴 하지만, 그를 걱정하는 건 절대 아니다.
혼란스럽고 놀란 속을 다독이는데 따뜻한 손이 천천히 손등을 감쌌다.
“마침 잘됐군.”
“뭐, 뭐가요?”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
“그러니까 뭘요?”
라이오넬이 내 손을 가볍게 말아 쥐고 성큼성큼 걸어 침대로 향했, 잠깐, 침대? 침대?!
몸을 뒤로 빼며 우뚝 멈춰 서자 라이오넬이 고개를 돌렸다. 내 얼굴에서 경악스러운 기색을 읽었는지 그가 몸을 틀었다.
물론 내 손은 놓아주지 않았다. 대신 그대로 소파로 걸어가 맞은편에 나를 앉혀 두었다.
“잠은 충분히 잤나?”
“다섯 시간 정도 잤어요.”
“그래.”
피곤한 얼굴로 대답하며 라이오넬이 팔걸이에 오금을 걸친 채 정자세로 누웠다. 기다란 다리가 소파 밖으로 삐져나왔다.
그가 눈을 감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거기 있어.”
“네?”
“내가 잠들 때까지.”
“네?”
두 번이나 반문했지만 제대로 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가 싶었다. 멍하니 눈만 깜빡였다. 그러다 허탈한 웃음이 튀어나왔다.
“공작님. 주무세요?”
“…….”
“공작님.”
“…….”
“라이오넬, 자요?”
“왜.”
잠긴 목소리에 어깨가 움찔 떨렸다. 하필 이름으로 막 불렀을 때 대답할 건 뭐람.
“저 정말 여기 있어요?”
“그래.”
“왜요?”
그는 인상을 찌푸리더니 팔로 눈 위를 덮었다. 이내 고른 숨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자? 진짜? 나를 여기 두고? 진짜 잔다고? 그 라이오넬이?
슬그머니 일어나 그의 주변을 얼쩡거렸다. 보통 이러면 깨야 할 텐데 그는 미동조차 없었다. 눈 위를 가린 팔을 치우고 손을 흔들어 봐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의 머리맡에 서서 무방비하게 잠든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경각심 없어진 게 누군데.”
투덜거렸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오히려 가슴께가 뭉클했다.
‘이러면 꼭 나를 신뢰해서 무방비한 모습을 보이는 것 같잖아.’
불신의 역사를 꿈으로 되짚은 직후라 그런지 괜히 코끝이 시큰했다. 이대로 있으면 복수하려는 마음이 약해질 것만 같았다.
인상을 찌푸리고 서 있다가 나가야겠다 싶어 몸을 돌렸다.
그때, 뒤에서 고통에 신음하는 소리가 들렸다.
뭐지? 어디 다쳤나?
문득 라이오넬의 목에 생겼던 상처가 떠올랐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암살자의 침입이 잦았다고 했었지.
‘내가 모르는 사이에 또 습격을 받았나?’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다녔으니 보이지 않는 곳을 다쳤다면 내가 몰랐을 수도 있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라이오넬에게 다가갔다. 그는 어느새 옆으로 돌아누워 웅크리고 있었다. 나는 그 앞에 쪼그려 앉았다.
“공작님. 괜찮으세요?”
대리석처럼 건조하기만 하던 얼굴이 땀에 젖어 있었다.
혹시 열이 오른 건가 싶어 이마를 짚었다. 뜨겁긴커녕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심장이 덜컥 주저앉았다.
다급하게 손수건을 꺼내 식은땀을 닦아 냈다.
몸을 살펴봤지만 피가 배어 나오는 곳은 없었다.
‘아픈 게 아니라 악몽을 꾸고 있는 건가?’
그의 어깨를 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공작님. 일어나 보세요. 공작님. 라이오넬!”
순간 그가 눈을 번쩍 떴다. 단단한 손이 내 손목을 움켜잡고 끌어당겼다. 나는 엎어지지 않기 위해 반사적으로 그의 머리 옆을 짚었다.
옅게 헐떡이는 숨결이 볼을 스칠 만큼 얼굴이 가까워졌다.
어디를 보고 있는 것인지 불분명하던 눈동자에 서서히 초점이 돌아왔다. 그러나 혼미한 정신을 드러내기라도 하듯, 눈빛은 여전히 묘연하기만 했다.
“넬리?”
“네.”
“그대가 왜 전쟁터에 있지?”
잠이 덜 깬 목소리로 라이오넬이 느리게 물었다.
전쟁터? 무슨 전쟁터? 고개를 기울이며 라이오넬의 얼굴을 똑바로 내려다봤다. 물에 잠긴 보석처럼 처연하게 빛나던 붉은 눈동자가 서서히 내리 감겼다.
“나를 배신하기 위해 왔나? 타티아손처럼, 나를…….”
고통스러운 목소리도 함께 잦아들었다. 그는 아까처럼 신음하며 몸을 웅크렸다.
“……나를 원망하려고.”
배신과 원망.
전부 내가 품고 있는 것이라 속이 덴 것처럼 뜨겁고 따가웠다. 반사적으로 물러나자 커다란 손이 손목에 딸려 왔다.
가볍게 흔들어 봐도 라이오넬의 손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살살 비틀어 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여전히 내 손목을 구명줄처럼 움켜쥐고 있었다.
“공작님. 주무세요?”
대답은 없었다. 대신 귀를 기울이자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진짜 자요? ……라이오넬.”
이름을 부르면 아까처럼 벌떡 일어날 줄 알았는데 여전히 반응이 없다.
나는 몇 번 더 탈출을 시도하다가 포기했다. 아플 정도는 아니었으나 찰싹 달라붙은 손은 떨어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결국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손이 묶여 있었기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기껏해야 라이오넬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게 다였다.
‘자는 얼굴은 천사 같네.’
소파 모서리에 팔꿈치를 세우고 턱을 괴었다. 항상 올려다보던 얼굴을 내려다보려니 기분이 묘했다.
‘조금 창백한 것 같은데.’
파리한 낯빛에 어울리지 않게 표정만은 평온했다. 가만히 바라보는데 라이오넬이 뒤척였다.
그가 몸을 옆으로 돌렸다. 손목이 여전히 붙잡혀 있던 터라, 팔이 그의 팔 사이에 끼어 버렸다. 당연히 몸도 당겨져 더 가까워졌다.
소파 모서리에 반쯤 엎드려 몸을 걸치자 눈앞에 바로 라이오넬의 얼굴이 보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굴곡진 목선과 턱, 도톰하고 모양 좋은 입술이 보였다.
쥐고 흔들어서라도 깨울 생각이었는데 얼굴을 보니 마음이 약해졌다.
‘안 그래도 못 자는데 깨우지 말고 얼굴 구경이나 하자.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구경하겠어.’
붙잡힌 쪽 팔뚝에 머리를 편하게 기댔다.
세상에. 이목구비가 어쩜 저렇게 완벽할 수 있지? 신께서 미모를 주시고 인정머리를 가져가신 건가?
실없는 생각을 하며 눈을 깜빡이는데, 라이오넬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의 몸에 힘이 들어갔다. 자연스럽게 붙잡힌 팔이 꽉 조여들었다.
앓는 소리를 내도 라이오넬의 눈은 여전히 감겨 있었다. 반사적으로 그의 팔을 가볍게 몇 번 내리쳤다.
그러자 라이오넬이 작게 신음하다가 편안한 표정이 되었다.
‘때렸는데 왜 표정이 좋아지지?’
어이없어 가만히 쳐다보다가 다시 머리를 기댔다.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정적 속에서 라이오넬의 숨소리만 듣고 있으려니 잠이 쏟아졌다. 시야가 가물거리다 어두워졌다.
* * *
정교한 가발이 진짜 머리처럼 어깨 언저리에서 흔들렸다.
아델하르트는 원래 머리보다 긴 가발을 어색하게 매만지다가 눈가에 안대를 둘러 머리 뒤에서 꽉 묶었다.
밀가루로 피부를 창백하게 만들고, 허름한 옷을 입고, 한쪽 발을 절뚝였다. 류트를 등에 멘 채 긴 막대기로 앞을 짚으며 걸었다.
그렇게 알터우드 영지 외각 성벽에 가까워지자 보초를 서던 병사가 말을 걸었다.
“거기서 더 가면 성벽에 부딪힐 테니 멈추쇼.”
“감사합니다.”
아델하르트가 퍽 듣기 좋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병사는 그의 행색을 눈으로 훑더니 가볍게 혀를 찼다.
귀족에게 잘못 걸린 음악가 중에는 유난히 앞을 못 보게 된 이들이 많았다. 손목 대신 눈을 거둬 가는 일이 흔한 탓이었다.
대체로 계속 귀족 가문에서 일했으나 종종 쫓겨나는 이도 있었다. 그들은 흉한 눈을 천으로 가리고 떠돌아다니며 구걸을 하곤 했다.
“보아하니 안 좋은 일을 당한 모양인데, 알터우드 공작령에는 무슨 일이요?”
“저는 음유시인입니다. 축제 기간에는 음유시인과 상인들 출입이 자유롭다고 해서 왔습니다.”
“그렇지. 근데 아직 축제가 열리려면 한참 남았소.”
“이런. 제가 날짜를 잘못 알았나 보군요.”
아델하르트가 탄식하며 낭패 어린 미소를 머금었다. 보는 사람이 다 안타까울 정도였다.
보아하니 저 눈과 다리로는 더 이상 인근 도시에 가기도 힘들 것 같았다.
허가된 기간이 아닐 때 알터우드 공작령에 들어오려면 신분이 확실해야 한다. 신분 패는 귀족들의 전유물이었기에 평민들은 촌장같이 공신력 있는 자들에게 받은 신분증명서나 추천장을 들고 다녔다.
하지만 거지꼴을 한 음유시인은 그마저도 없어 보였다.
병사는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신분을 증명할 건?”
“없습니다. 멀리서 왔는데,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시무룩한 목소리로 부탁하자 병사는 차마 내쫓을 수가 없었다. 그는 작게 욕지거리를 중얼거리다가 몸을 돌려 다른 병사에게 소리쳤다.
“이봐! 누가 가서 기사단장님 좀 모셔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레트가 소리 없이 외벽 밖으로 나왔다. 그는 무심한 얼굴로 아델하르트를 응시했다.
빤히 보는 시선이 볼에 달라붙었다. 얇은 천 너머로 새까만 눈동자가 보였다.
‘유령처럼 다니는 건 여전하군.’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레트는 품에서 조용히 검을 꺼내 아델하르트를 향해 내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