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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제발 좀 망하세요 (60)화 (60/130)

60화

“내 돈주머니를 가지고 도망쳤었는데.”

“정말 착각하신 게 맞네요. 저는 궁핍하던 시절에도 절대 절도는 하지 않았거든요.”

“착각이 아닙니다. 얼굴을 똑똑히 보았는데 착각일 리가.”

“……그럼 제가 누군지 말씀해 보세요.”

“그럼 잠시 귀 좀.”

남자가 가까이 다가왔다. 경계하며 뒤로 물러나자 남자가 멈춰 섰다.

주변이 시끄러우니까 근처에서 작게 말하면 될 텐데. 아니면 벽 쪽으로 자리를 옮기던가. 굳이 귓속말을 해야 하나?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자 남자가 별안간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곁에 있더니 의심병까지 옮은 모양이네요.”

의심병이라는 말에 번뜩 라이오넬이 떠올랐다.

라이오넬, 돈주머니, 초대장?

세 단어가 퍼즐 맞추듯 끼워졌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는 까맣게 잊고 있던, 나를 초대한 유일한 사람이 떠올랐다.

‘아델하르트 왕자님?’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가면무도회에서 정체를 말하는 건 실례되는 행동이니까.

대신 최대한 정중하게 항의했다.

“그건 제 주머니였어요. 심지어 전 재산이었다고요.”

“이제 기억이 나시나 보군요.”

첫 만남이 강렬했다는 말로 어떻게 왕자님을 떠올리냐고!

지금은 가면으로, 그때는 후드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는데.

목소리를 듣긴 했지만 고작 말 몇 마디 하는 걸 엿들은 수준이었다. 게다가 말투도 달랐다. 그때는 이렇게 정중한 투가 아니었다.

속으로 투덜거리는데 왕자님이 불쑥 말을 걸었다.

“그럼 제가 위험에서 구해 준 것도 기억나신 겁니까?”

“아! 네. 그때는 경황이 없어 감사의 인사를 드리지 못했어요.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게 빚을 지셨군요.”

구리다.

제대로 된 대화는 처음인데 다짜고짜 빚부터 씌우려 하다니.

고마운 건 둘째 치고 말려들면 귀찮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제 주머니를 위협하신 것 때문에 딱히 빚처럼 느껴지진 않는데요.”

“돈보다는 목숨이 우선 아닙니까?”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얄밉다. 근데 맞는 말이라 반박을 못 하겠어!

“맞아요. 목숨이 우선이죠.”

“그럼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겠습니까?”

“무슨 부탁인데요?”

“어려운 건 아닙니다.”

판단은 내 몫이지. 빤히 바라보자 그가 목소리를 냈다.

“단둘이 차나 한잔하며 담소를 나눴으면 하는데. 어려운 부탁입니까?”

어렵진 않다. 하지만 내 돈주머니를 위협했으니 딱 절반 정도만 들어줄 예정이었다.

“차 말고 술은 어떠세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왕자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코웃음을 쳤다. 가면으로 가리고 있음에도 불쾌해하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아까는 하하 호호 잘만 웃어 대더니. 뭔가 입맛에 안 맞았나 보다.

그냥 왕자님의 부탁을 수락하고 차를 반 잔만 마시고 나와야겠다.

싫으면 차를 마시자고 하려는데 왕자가 성큼 다가왔다.

“생각보다 적극적이시군요. 좋습니다.”

말투는 달콤한데 목소리에는 온기가 없었다. 나는 그에게 따라오라고 눈짓했다.

먼저 걸음을 옮기며 테라스로 향하면서 시종이 들고 다니는 샴페인 두 잔을 챙겼다.

커튼이 쳐지지 않은 테라스 문을 발로 슬쩍 밀었다. 왕자가 고개를 기울이면서도 문을 잡아 줬다.

나는 들어가자마자 샴페인을 내밀었다.

“여기 술이요.”

왕자님이 얼떨결에 샴페인을 받아 들었다.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으니 무슨 표정을 하고 있는지 하나도 모르겠네. 하지만 따로 보자고 한 이유가 있겠지.

라이오넬과 사이도 안 좋은 것 같으니까 엮이지 말아야겠다.

나는 냉큼 샴페인을 단숨에 들이마셨다.

“술 한 잔 끝! 이제 빚은 청산했으니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도움을 주신 것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그리고 왕자님이 붙잡기 전에 냉큼 테라스를 빠져나가려 했다.

“하하하하!”

등 뒤에서 커다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놀라서 뒤돌아보자 왕자가 재빠르게 손을 뻗어 커튼을 닫아 문을 가렸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왕자와 마주했다.

아델하르트 왕자가 한 걸음 물러나며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술을 마시자기에 유혹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요.”

앗. 너무 정색했다. 뒤늦게 입꼬리를 조금 끌어당기긴 했지만 내가 느끼기에도 어색했다.

“그럼 진짜 가 볼게요.”

“그렇게 도망칠 필요가 있습니까?”

“아시다시피 공작님이 의심이 많아서요.”

“그럼 좀 더 신뢰해 주는 곳으로 오는 건 어때요?”

이게 목적이었구나!

왜 자꾸 질척거리나 싶었는데, 속이 다 시원하다.

“그 미소는 수락한다는 뜻입니까?”

“아니요.”

다시 정색하자 왕자님의 고개가 아주 미약하게 옆으로 꺾였다가 돌아왔다.

“이유는?”

“해야 할 일이 있어요.”

“그게 뭐든, 라이오넬보다 제가 더 도움이 될 겁니다.”

“그럴 리 없어요.”

“너무 단호한 것 아닙니까?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는 건데.”

“장담할 수 있어요. 라이오넬이 있어야만 하는 일이거든요.”

복수에 대상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람.

대화가 뚝 끊겼다. 별안간 분위기가 가라앉은 것 같았다.

왕자님의 표정을 살피고 싶었지만 보이는 것이라고는 투명한 하늘색 눈동자뿐이었다.

왕자는 나를 빤히 보다가 정원 너머로 샴페인을 쏟아 버렸다.

가면을 들어 올려 마실 줄 알았는데 조금 의외였다.

“그럼 다른 방식으로 인연을 맺는 건 어떻습니까?”

왕자가 난간에 샴페인 잔을 올려 두고 내게 다가왔다.

차가운 손끝이 내 볼을 스치듯 훑었다.

“부끄러워 숨겼지만, 사실 넬리 양에게 아주 관심이 많습니다.”

“……농담이시죠?”

“설마요. 첫눈에 반했습니다.”

이 사람 진짜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거짓말을 하네.

역시 행동이 구려. 엮이면 분명 곤란한 일이 생길 거야.

빨리 떨쳐 내고 라이오넬에게 갈 생각을 하는데 왕자가 눈을 맞추며 천천히 내 손등에 키스했다. 그래 봤자 닿는 것은 가면뿐이라 별 감흥이 없었다.

“랜더스 공께 넬리 양을 초대해 달라고 한 것도, 고심해서 드레스와 가면을 고른 것도 전부, 첫눈에 반했기 때문입니다.”

“음……. 감사해요.”

“감사하면 저와 진지하게 만나 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무서워서 고맙다는 말도 함부로 못 하겠네!

그냥 있으면 입술이 삐죽 튀어 나갈 것 같아, 볼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잡힌 손을 빼냈다.

“죄송하지만 사양할게요.”

그가 나를 빤히 바라봤다. 가면에 가려 제대로 알 순 없지만 대충 거절하는 이유를 묻는 것 같았다.

“제가 준 술에 입도 대지 않으셨잖아요. 저는 저를 불신하는 데다가 얼굴도 보여 주지 않는 사람과 교제할 정도로 순진하지 않거든요.”

테라스의 입구는 커튼으로 가려 놓아 아무도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끝내 가면을 벗지 않았다.

가면을 벗었다고 해도 그와 교제할 일은 없었겠지만.

“그럼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이번에야말로 왕자가 붙잡기 전에 재빨리 빠져나왔다.

뒤에서 탄성 같은 게 들렸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바로 가면무도회에 참석한 데다가 쓸데없는 대화로 긴장한 탓에 매우 피곤했다.

가능하다면 빨리 돌아가서 쉬고 싶었다.

눈을 느리게 깜빡이는데 누가 내 옆에 서는 게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새하얀 가면이 보였다.

‘거절했는데 왜 또 따라온 거야! 이 왕자님 생각보다 끈질기시네?’

옆으로 슬쩍 물러나 그를 노려봤다. 그러자 이번엔 내 앞에 섰다.

“한 곡 추시겠습니까?”

웃는 소리가 유독 커다래서 정체를 들킨 것인지, 귀족들이 이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무도회에서 왕자님과 춤이라니……. 그런 건 일곱 살 때도 꿈꿔 본 적 없단 말이야!

도망가고 싶다. 방으로 돌아가서 끝내주게 푹신한 침대에 드러눕고 싶어.

어떻게 거절해야 잘 거절했다고 소문이 날까? 속으로 고민하고 있는데 불쑥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미안하지만 나와 선약이 있어서.”

라이오넬이었다. 이쪽도 춤출 만한 사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저 집요한 왕자보다는 나았다. 발도 마음대로 밟을 수 있고.

사실 안 밟고도 출 수 있지만 흔한 기회가 아니니 최대한 많이 밟아 둘 예정이었다.

“그랬죠, 선약.”

“실례하지.”

라이오넬이 옅은 비소를 머금은 채 잠시 왕자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리고 나를 에스코트하며 플로어로 갔다.

나는 잠깐 뒤를 돌아보았다가 그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말했다.

“아까 그분, 왕자님이세요.”

“알아.”

“그런데 반말해도 돼요?”

라이오넬이 가볍게 웃으며 내 등을 감쌌다.

나는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반대쪽 손을 맞잡았다.

“웃음소리가 여러 번 들리던데.”

“웃음이 많으시던데요. 사는 게 즐거우신가 봐요.”

“……웃음이 헤픈 편이긴 했지.”

왕자님께 헤프다는 표현을 쓰는 게 옳은 걸까?

잠깐 그런 생각이 스쳤지만, 뭐 어때. 없는 자리에서는 폐하 욕도 한다는데.

물론 나는 안 하지만!

“저번에 보니까 사이가 안 좋아 보이시던데요.”

“지금은 그렇지. 어렸을 땐 세 명이서 곧잘 어울렸는데…….”

라이오넬의 목소리가 어슴푸레한 그리움에 잠겼다.

세 명 중 남은 한 명은 누굴까? 저렇게 말하는 걸 보면 왕자님과 꽤 친했던 것 같은데, 왜 멀어졌을까?

궁금증이 치솟았지만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리 음악과 소음이 대화 내용을 가려 준다고 한들, 사람이 많은 곳에서 물어볼 만한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랜더스 공을 못 뵙고 가겠네요.”

“아까 잠깐 뵈었는데, 안 그래도 그대를 찾으시더군.”

그냥 초대만 하고 잊으시길 바랐는데 유감이다. 그래도 잠깐 인사만 올리고 방으로 돌아가면…….

“홀을 나가시면서 내일 티 파티에 그대와 함께 참석하라고 하셨다.”

랜더스 공은 이미 무도회장을 떠난 모양이다. 게다가 티 파티에 나를 초대하기까지 했다.

‘싫어! 이제 그만 영지로 돌아가고 싶어.’

할 수만 있다면 바닥에 드러누워 집에 보내 달라고 발버둥이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입을 꾹 다물고 한숨을 삼키는데 라이오넬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얼굴만 비치고 바로 돌아가면, 표정을 좀 풀 텐가?”

“제 표정이 어떤데요?”

표정은 몰라도 목소리는 어떤지 알겠다. 듣기만 해도 우울해질 정도로 시무룩했다.

“도토리 빼앗긴 다람쥐 같아.”

“왜 비유가 항상…….”

“항상?”

“아니에요.”

“그래서, 얼굴만 내비치고 돌아가는 건 싫은가?”

“아니요! 좋아요. 제발 그렇게 해 주세요.”

라이오넬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곡이 완전히 끝났다.

그제야 라이오넬의 발을 밟지 못한 걸 깨달았다. 짧게 탄식하는데 왕자님이 기다렸다는 듯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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