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당황해 눈을 깜빡이자 라이오넬이 살짝 인상을 쓰며 말을 덧붙였다.
“그대 앞으로 온 드레스와 가면이 내 방에 있으니, 와서 확인하도록.”
“제 방으로 보내 주셔도 되는데.”
“아니. 내가 보관하지.”
내 건데 왜 자기가 가지고 있겠다고 한담.
뚱한 얼굴로 바라보자 라이오넬의 눈동자가 장난스럽게 휘었다.
잠깐, 장난스럽게? 고개를 기울이자마자 라이오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또 팔아 버리면 곤란하니.”
그러고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식당을 나갔다.
나는 멍하니 라이오넬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지금, 나한테 농담한 건가? 라이오넬이 그런 것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던가?
설마. 그럴 리가.
……그래. 내가 진짜 또 팔아 버릴까 봐 걱정한 거겠지.
애써 생각을 떨쳐 내며 내 몫의 딸기를 봤다. 괜히 라이오넬의 시뻘건 눈동자가 떠올라 냉큼 집어 먹어 없애 버렸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으로 오라고 할 거면 같이 올라갈 것이지.’
뚱한 마음에 입술을 삐죽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냐. 라이오넬에게 뭘 바라겠어. 아무것도 바라지 말자.
마음을 다잡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가볍게 노크하자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가니 소파 테이블 위를 다 덮을 정도로 커다란 상자가 보였다.
“이게 대공께서 보내신 드레스예요?”
라이오넬이 고개를 끄덕이고 집사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하인들이 와서 상자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연한 노란색 드레스가 들어 있었다.
펼치지 않아도 어깨에서 가슴으로 이어지는 부분에 장식된 새하얗고 풍성한 레이스가 보였다. 나는 화려한 자수를 구경하다가 나도 모르게 감탄했다.
“정말 아름답고, 음…… 거추장스럽게 생겼네요.”
라이오넬이 짧게 웃었다.
옆에 서 있던 집사님이 라이오넬을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그리고 놀란 표정으로 한동안 라이오넬을 응시했다.
그를 힐끗 본 라이오넬이 인상을 찌푸렸다가 나와 눈을 마주쳤다.
“어울리는 보석은 있나?”
고개를 저었다.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끄덕였다.
“내가 알아서 준비하지.”
“보석이 꼭 필요할까요?”
“그런 것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무시하는 놈들이 많으니까.”
“전 괜찮아요.”
“내가 안 괜찮아. 내 관리인이 무시당하도록 둘 순 없지.”
내 관리인이라는 말에 괜히 살갗이 간지러운 기분이었다. 라이오넬의 시선이 닿은 볼을 문질렀다.
눈을 피하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라이오넬이 화제를 전환했다.
“입어 봐.”
몸에 맞게 재봉해야 하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딘지 모르게 흐뭇해 보이는 집사님을 따라 옆방으로 들어갔다. 곧 하녀들이 옷 갈아입는 것을 도와주고 시침질을 한 뒤 다시 옷을 갈아입혀 주었다.
나는 하녀들을 뒤로한 채 라이오넬이 있는 방으로 돌아왔다.
“그럼 언제 출발해요?”
“일주일 뒤.”
수도는 멀지 않으니 마차를 타고 3, 4일만 가면 될 것이다.
게다가 수도로 가는데 관리인이 공작과 같은 마차를 탈 일도 없으니, 없, 없나? 없겠지?
* * *
착각이었다.
일주일 뒤, 수도로 출발하기 위해 편한 복장을 하고 현관으로 간 내 앞에는 커다랗고 휘황찬란한 마차가 서 있었다.
“저는 하인들하고 같은 마차를 타고 갈게요.”
“없어.”
뭐가 없어! 네 자리 따윈 없어. 이런 건가?
흔들리는 눈으로 라이오넬을 보자 그가 설핏 웃으며 에스코트하려는 듯 손을 뻗었다.
“호위와 하인들은 말을 타고 간다.”
3일이나 걸리는 곳에 말을 타고 간다고? 놀란 눈으로 일행을 바라봤다.
호위는 일곱 명 정도 있었으나 사용인은 극히 적었다.
라이오넬을 보필할 하인 한 명과 메리. 그렇게 두 명뿐이었다.
뒤에 짐마차가 하나 있긴 했지만 정말 소박하기 그지없는 일행이었다. 공작이 이렇게 가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가만히 보고 있자 라이오넬의 목소리가 들렸다.
“굳이 말을 타고 가겠다면야, 말릴 생각은 없지만.”
말 못 타는 거 알면서.
보석에 어린 빛처럼 그의 눈동자에 장난기가 잠깐 반짝였다.
요즘 따라 부쩍 친근하게 구네. 도대체 왜 저러는 거람. 저번에 목을 치료해 준 것 때문에 그런가?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헷갈리게 하지 말라더니. 헷갈리게 하는 사람이 누군데.’
속으로 투덜거리며 그를 잠깐 노려보다가 손을 겹쳤다.
그리고 그대로 힘을 주어 그의 손을 내리고 혼자 성큼성큼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에스코트를 거부했는데도 라이오넬은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는 마차에 올라 의자 중앙부에 앉았다. 마차가 넓어서인지 창문 쪽에 바짝 붙으니 어색하게 마주 보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
“출발해.”
마차가 작게 덜컹거리더니 움직였다. 온종일 책 같은 거나 보며 마차에 앉아 있는 건 곤욕이었다.
찌뿌둥해 미치겠다. 엉덩이도 아프다.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라이오넬을 보았다. 그는 출발할 때와 다름없는 자세로 보고서를 읽고 있었다.
“할 말 있나?”
시선을 느꼈는지 라이오넬이 서류를 내려놓았다.
“아니요. 심심해서요.”
설핏 웃은 그가 내게 종이 뭉치를 내밀었다.
“일하면 심심할 겨를이 없겠지.”
질겁한 눈으로 쳐다보자 라이오넬이 웃음을 터트렸다.
눈앞에서 성벽보다 두꺼워 보이던 무표정이 허물어졌다. 생각보다 시원하게 올라가는 입꼬리에 시선이 갔다.
멍하니 있다가 조용히 허벅지를 꼬집어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그렇게 웃으셔도 일은 안 할 거예요.”
“유감이군.”
라이오넬이 전혀 유감스럽지 않은 얼굴로 심드렁하게 말했다.
진짜 일을 시킬 생각은 없었나 보다. 안심하며 등받이에 몸을 기대는데 라이오넬이 불쑥 말을 꺼냈다.
“그대가 발명한 피로 회복제를 대량으로 생산해서 팔 생각이야.”
랜더스 공께서 마시고 효과를 보셨으니 나를 부르셨겠지. 이미 입소문을 탔을 것이다.
아마 소문이 안 났더라도 이번에 무도회가 지나면 소문이 나겠지. 그걸로 사업을 하면 제법 큰 돈을 만질 수 있을 테고.
영지의 시가지 규모를 키우는 데 충분한 자금 역시 마련할 수 있다.
물론 그러면 라이오넬을 도와주는 꼴이 된다.
“제가 싫다고 하면요?”
“거부권은 없어. 하지만 사업이 진행되면 그대의 몫은 나눠 주도록 하지.”
역시 그럴 줄 알았다. 그가 이런 기회를 놓칠 리 없지.
돈은 싫지 않지만 라이오넬이 잘되는 건 싫은데. 핑계 댈 만한 게 없을까?
“하지만 저는 약 제조법을 모르는걸요?”
“이미 목장지기가 제조법을 넘기고 몫을 나눠 받기로 했다.”
도대체 언제 물어본 거람?
그때 프레르에게 받아 왔다고 말하지 말걸. 아니다. 어차피 영지에 약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은 한정적이니까 말 안 해도 알았을 거야.
게다가 목장지기는 큰돈을 만질 일이 없으니까. 거절할 리가 없지.
“피로 회복제가 잘 팔릴까요?”
“그건 해 보면 알게 될 거야.”
라이오넬은 그러고 다시 서류를 보기 시작했다. 내가 뭔 짓을 해도 사업을 그만둘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래. 일단 하자고 하자.
가담해서 방해할 방법을 찾아보자! 만약 실패해도 돈은 남을 테니까 속이 좀 덜 쓰리겠지.
“알겠어요.”
라이오넬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밥을 먹기 위해 잠시 멈췄을 때를 제외하고는 계속해서 달렸다.
첫째 날은 인근 소도시의 영주가 대접해 주었다. 잠자리는 편했지만 낯선 곳이라 그런지 새벽에 잠깐 깨어났다.
라이오넬의 방문 밑으로 언제나 그렇듯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도 낯설어서 잠이 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말을 걸어 볼까, 하다가 할 말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괜히 어색하게 마주 앉아 있느니 산책이라도 하는 게 나았다.
‘좀 움직이면 잠이 오겠지?’
정원을 짧게 둘러보고 돌아왔을 때도 그의 방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나는 반쯤 눈이 감긴 상태였기에 그냥 배정받은 방으로 들어가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을 대접받고 마차에 올랐다. 라이오넬은 어제보다 더 피곤해 보였다.
“또 안 주무셨어요?”
라이오넬이 뭔가를 말하려는 듯 입을 반쯤 열었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는 눈을 감고 등받이에 기댔다. 미간이 찌푸려지며 눈썹 앞머리가 내려왔다.
저 표정, 익히 알고 있다. 예민해지면 나오는 표정이었다.
‘오늘은 괜히 말 걸지 말아야겠네.’
입을 꾹 다물고 창밖을 보거나 책을 읽었다.
라이오넬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허리와 목이 빳빳한 게 잠든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약을 주러 갔을 때도 소파에 저렇게 기대 있었지.’
그제야 집사님의 말이 떠올랐다. 라이오넬은 다른 사람을 감시하던 걸 그만뒀다. 그리고 그 뒤로 통 잠을 못 잔다고 했었다.
도대체 왜 다른 사람을 감시하지 못하면 잠을 못 이루는 걸까? 연인한테 배신당한 게 그렇게 충격적이었나?
저럴 거면 차라리 일을 하지. 일하고 있을 땐 좀 멀쩡해 보였는데.
“신경 쓰지 마.”
내 시선을 느꼈는지 라이오넬이 불쑥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빤히 봤나 보다. 민망함을 애써 뾰로통하게 감췄다.
“어떻게 신경을 안 써요.”
대놓고 골골거리고 있으면서! 눈앞에 병든 당나귀가 있어도 신경 쓰이겠다.
속으로 투덜거리다가 갑자기 드러난 붉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불만을 담아 똑바로 응시하자 그가 팔을 들어 제 얼굴을 덮었다. 팔 아래로 드러난 입매가 꾹 다물어졌다가 벌어졌다.
“신경 쓰지 마.”
아까와는 달리 무딘 날처럼 뭉툭한 말투였다.
피곤함이 묻어 나오는 힘없는 목소리. 얼핏 들으면 애원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목소리였다. 놀란 마음에 반사적으로 물었다.
“괜찮은 거 맞죠?”
라이오넬은 대답하지 않았다.
* * *
이틀째 밤에는 고급 여관에서 묵었다. 위태롭던 목소리가 걱정스러워 잠이 오지 않았다. 살짝 나가 보자 아니나 다를까 라이오넬의 방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문 앞에 섰지만 내버려 두라는 말이 떠올라 원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사흘째 밤에는 노숙하게 됐다.
메리와 모포를 깔고 자는 게 마음이 편할 것 같아 마차 밖으로 나가려 했는데 라이오넬이 정찰을 하겠다며 말을 타고 사라졌다.
그리고 해가 뜬 뒤에야 돌아왔다.
‘진짜 사람 신경 쓰이게 왜 저러고 있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