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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제발 좀 망하세요 (55)화 (55/130)

55화

“그러지 않아도 돼. 목이 마르지 않아서 그냥 둔 것뿐이니까.”

마음에 없는 소리는.

그를 가볍게 흘겨보며 몸을 일으켜 주스를 가져왔다. 그리고 몇 모금 벌컥벌컥 마신 뒤 그에게 내밀었다.

그가 이마를 짚고 한숨을 내쉬더니 주스를 받아 갔다.

정말 목이 마르지 않은 것인지 반쯤 남은 주스를 그대로 탁자에 내려놓았다. 다만 내 손이 닿지 않을 정도로 멀리 떨어트려 놓았다.

“마실 거니까 눈독 들이지 마.”

“맛이라도 봐 주시면 안 돼요? 제가 직접 만든 건데.”

라이오넬이 놀란 눈으로 나와 딸기 주스를 번갈아 봤다. 주스를 간 건 내가 아니지만 약은 내가 탔기에 당당하게 고개를 들었다.

라이오넬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는 나른한 눈으로 나를 빤히 보더니 그제야 딸기 주스를 마셨다.

반 잔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나쁘지 않군.”

서툰 칭찬이었다. 괜히 양심이 찔려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 * *

예상대로 나에게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잠이 안 오는 약을 먹은 탓인지 가끔 느끼는 식곤증마저 사라졌다.

오히려 묘한 활력이 도는 것 같았다. 정신도 전보다 또렷하고, 몸도 가벼웠다.

‘사실 항상 졸린 상태였나?’

4명이 하던 일을 9명이 하니까 좀 살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일이 버거웠나?

고개를 기울이다가 제럴드가 장부와 보고서를 가져와 생각이 뚝 끊겼다.

나는 서류를 훑어보며 남은 술의 재고를 파악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축제 때 마실 맥주가 부족해서 한 소리 들은 적이 있었지.

“주조량하고 소비량에 신경 좀 써야겠어요. 몇 달 뒤에 있을 축제에 맥주가 부족하면 안 되잖아요.”

“예, 넬리 님.”

여왕 폐하께서 오신다고 했으니 손님 접대용 와인은 따로 구매하는 게 좋겠네.

넬리는 장부와 보고서를 다 읽고 그것을 짧게 정리했다.

그리고 메모지에 ‘맥주 물량이 부족해질 경우 주변 도시에서 미리 구매해 둘 것, 와인 구매처 알아보기’라고 적었다.

제럴드가 나가는 것을 보고 다른 일을 시작했다.

오후에는 꽈당이를 타고 직접 경작지를 돌아다녔다.

그것도 평소보다 넓은 곳을, 마차도 없이!

날이 제법 더워져 마차를 타고 돌아다녀도 숨이 턱턱 막혔었는데. 물론 지금도 숨이 막히긴 하지만 다른 날보다는 양호한 편이었다.

‘오늘은 몸 상태가 좋네.’

관리소로 돌아와 흥얼거리면서 퇴근하기 위해 책상을 정리했다.

열린 문 너머로 톰과 제럴드, 소피가 나를 힐끔거리는 게 느껴졌다. 평소였으면 또 왜 저러나 경계부터 했을 테지만, 오늘은 기분이 좋아서인지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책상을 다 정리하고 나가려는데 소피가 안으로 들어왔다.

“퇴근하세요?”

“네. 내일 봐요, 소피.”

“네!”

소피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아차 한 얼굴로 내 뒤를 따라왔다.

“넬리 님!”

“네?”

“저, 오늘 시간 괜찮으시면 같이 한잔하러 가실래요?”

같이 술을 마시러 가자는 건가?

고개를 돌리자 톰과 제럴드와 눈이 마주쳤다. 그들이 기다렸다는 듯 다가왔다.

“파우트 씨도 선술집으로 온대요.”

“넬리 님이 오시면 좋아할 겁니다.”

갑작스러운 제안에 당혹스러웠다. 죽기 전에는 한 번도 그들과 사적인 자리를 가진 적이 없었다.

세 사람이 꾸준히 어울렸는지는 잘 모르겠다. 바빠서 신경 쓸 겨를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한 가지 정확한 건, 나에게 저런 제안을 한 적은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동료애가 없는 건 아니었다. 서로를 안쓰러워하며 생긴, 딱 그 정도의 동료애였다. 기사 생활을 함께해 끈끈한 그들과는 달랐다.

‘괜히 끼면 어색할 것 같은데.’

망설이고 있자 소피의 어깨가 축 처졌다.

“너무 갑작스럽나요?”

“그것도 그런데…….”

순간 프레르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피곤해지는 약을 먹고 술을 마셨다가 죽은 사람들의 이야기 말이다.

물론 내가 마신 건 피곤해지는 약이 아니긴 하지만!

약 먹고 술 마셔도 괜찮을까?

……아니야. 위험한 짓은 안 하는 게 낫지.

“오늘은 사정이 있어서요.”

그래. 불편할까 봐 피하는 게 아니라 사정이 있어서 그런 거야.

맞는 말인데 괜히 거짓말을 한 것처럼 양심이 쑤셨다.

소피가 아쉬운 표정을 짓고 있어서 그런가?

“어쩔 수 없죠. 그럼 다음에 어울려 주세요.”

소피가 미소로 아쉬운 기색을 감추며 톰과 제럴드에게로 갔다. 꾸벅 인사하는 그들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먼저 자리를 떠났다.

꽈당이를 타고 성으로 향하며 라이오넬이 어쩌고 있을지 상상했다.

분명 피로 때문에 일도 제대로 못 했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방문을 열었는데,

“일찍 왔군.”

라이오넬이 내 방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주인 없는 방에 마음대로 들어와도 되는 거야? 뚱한 얼굴로 그의 표정을 살폈다.

이상하게 피곤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너무 피곤하면 약을 먹어도 잔다더니, 좀 잤나?’

가만히 서서 생각하는데 라이오넬이 크고 우아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적당한 거리에서 꼿꼿하게 선 그가 나를 내려다봤다. 내가 한 짓 때문인지 새빨간 눈을 마주하자 괜히 목이 탔다.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다가 한 발자국 더 다가왔다.

“넬리.”

“네, 네?”

“내게 뭘 먹였지?”

심장이 쿵 떨어졌다.

나도 모르게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무슨 말씀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그럼 알기 쉽게 물어봐 주지.”

라이오넬이 손을 들었다.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의 움직임을 쫓아갔다.

그가 들고 있는 게 내가 프레르에게 부탁해 만든 약이라는 걸 깨닫자마자 숨이 턱 막혔다.

시선을 맞춘 라이오넬이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딸기 주스에 탄 게 이건가?”

* * *

“뭐야. 관리인님은?”

파우트가 선술집으로 들어오며 물었다.

톰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파우트가 인상을 쓰며 소피와 톰 사이에 털썩 앉았다.

“나 온다고 말했어?”

“말했습니다. 제가요.”

톰이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그러자 파우트가 그럴 리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아는데 왜 안 오셨지?”

“사정이 있으시대요.”

소피가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파우트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들어 술을 시켰다.

“그럼 진짜 사정이 있으시겠지. 너희들하고는 어색한 사이겠지만 나랑은 친하니까.”

그러고는 고개를 젖히며 커다란 웃음을 토해 냈다. 제럴드가 분하다는 듯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거짓말 아닙니까?”

“거짓말은! 나랑은 따로 술도 마셨는데.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도 나눴다니까? 막 말도 놓고 말이야.”

제럴드와 소피는 넬리와 비슷한 나이였다. 그런 그들에게도 넬리는 말을 놓지 않았다.

그런데 파우트에게 말을 놓다니!

그저 반말을 쓰는 게 술버릇인 걸 모르는 세 사람은 믿을 수가 없었다. 소피가 파우트를 흘겨보다가 며칠 전 일을 떠올렸다.

“저번에 보니까 파우트 씨한테 말 높이시던데요.”

“그거야 공적인 자리니까.”

“점심 산책 때 마주친 게 공적인 자립니까.”

파우트가 종업원이 내려놓은 맥주를 들며 투덜거렸다.

“거, 참. 빡빡하게 굴기는.”

그러면서도 맥주잔을 톰, 제럴드, 소피에게 나눠 주었다.

“관리인님하고 친해지고 싶다고 해서 내 이름까지 팔 수 있도록 해 줬는데.”

“그러니까, 효과가 없었다니까요.”

톰이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파우트는 그의 등을 퍽퍽 내리치며 술잔을 들었다.

“뭐, 지난 일은 어쩔 수 없으니 술이나 마시고 털자고!”

톰과 제럴드, 소피가 힘없이 술잔을 들어 올렸다.

허공에 떠 있는 세 개의 잔에 파우트가 잔을 부딪쳤다. 대충 건배한 것 같은 소리가 나자 그가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제럴드가 술을 한 모금 마시며 소피에게 말했다.

“다음에는 네가 말해서 리지라도 데려오는 게 어때? 우리는 다 기사였으니까 끼기 애매하다고 느끼셨을 수도 있잖아.”

제법 정확한 판단이었다. 그러나 소피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안 끼실걸. 리지하고도 약간 선을 긋는 것 같았어.”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뒷 테이블에 앉아 있던 주민이 불쑥 끼어들었다.

“맞아. 저번에 방앗간하고 화덕 이용료를 조정해 준 게 고마워서 식사에 초대했는데 거절하시더라니까.”

“프레르하고는 잘 어울리는 것 같던데.”

“나는 일하실 때 빼고는 얼굴도 본 적 없어. 일할 때 빼면 마을에 거의 안 내려오시잖아.”

“뭘 챙겨 드리려고 해도 다 거절하시고. 서운하게.”

여기저기서 목소리를 더했다.

감독관으로 일하는 세 사람은 내심 놀랐다. 그들 역시 넬리가 일은 열심히 하지만 사람들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꼈다.

일부러 거리를 두는 것처럼 말이다.

그들은 리지가 넬리에게 떠나지 말라고 매달리는 것을 봐서 그런 느낌이 드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다른 주민들도 그렇게 느끼고 있던 모양이었다.

“일부러 정을 안 붙이시려는 거 같지?”

제럴드가 숨을 크게 내쉬고 맥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정을 안 붙이려고 하시는 건 반대로 말하면 정에 약하다는 뜻이지.”

톰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에 언젠가는 떠날 거라고 하셨잖아요.”

“어쩌면 생각보다 빨리 떠나실 수도 있겠어.”

그들의 대화를 흘려들으며 맥주를 시키던 파우트의 귀에 ‘떠난다’는 단어가 콱 들어박혔다.

“뭐?! 관리인님이 떠난다고?”

“파우트 씨 조용히 좀 하세요.”

소피가 인상을 찌푸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하지만 파우트의 목청은 파급력이 엄청났고, 선술집에 있는 사람들 대다수가 넬리가 떠난다는 소리를 들은 뒤였다.

떠들썩하던 술집이 조용해졌다.

그들의 머릿속에 하나둘씩 예전 관리인들의 만행이 떠올랐다.

거들먹거리고, 게으르거나, 몰래 세금을 올려 돈을 빼돌릴 생각을 하다가 쫓겨난 이들 말이다.

톰, 제럴드, 소피도 비슷한 과거를 떠올렸다.

감독관들의 간단한 이름조차 외우지 못하던 관리인들도 더러 있었다. 그나마 괜찮은 사람들은 업무 강도에 짓눌려 도망가 버리고 말았다.

넬리 다음에 오는 관리인이 안 그러리라는 법은 없었다. 소피는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잡아야 해.”

“정들게 하면 될 것 같은데.”

제럴드의 말에 톰이 탁자를 내리치며 벌떡 일어났다.

“정 중의 정은 사랑이죠!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정착하지 않으실까요?”

선술집 안이 다시 시끌시끌해졌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연애하도록 다리를 놓아 드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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