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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제발 좀 망하세요 (54)화 (54/130)

54화

* * *

라이오넬은 펜을 내려놓고 깍지 낀 손을 무릎 위에 올렸다.

넬리가 약초를 구해 프레르에게 가져갔다는 말을 아레트에게서 전해 들었다. 라이오넬의 손에는 아레트가 몰래 빼돌린 종이가 들려 있었다.

‘각성과 피로 회복에 도움이 되는 약초들이군.’

하지만 빨간 열매만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레반스.”

“예, 각하.”

“빨간 것, 알아 와.”

레반스가 고개를 숙이고 종이를 받아 밖으로 나갔다.

혼자가 된 라이오넬은 눈을 감았다. 넬리를 의심하는 건 아니다. 뇌리에 깊이 박힌 불신이 아우성치는 듯했으나 흔들릴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걱정스러웠다. 라이오넬은 프레르에게 직접적인 경고를 했다. 의심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만일 그가 첩자라면 넬리의 신뢰를 이용해 그녀를 쉽게 속일 수도 있었다.

‘독살하려고 할지도 모르지. 의심 없이 마실 테니.’

레반스가 한참 뒤에야 도감 하나와 함께 돌아왔다.

“각성 성분이 있는 열매입니다. 중독성은 없습니다.”

약초들을 보면 넬리가 뭘 부탁했는지 대충 알 것 같았다.

‘많이 피로했나?’

나름대로 일도 줄여 주고 밥도 잘 먹인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면 그녀도 밤마다 악몽을 꾸는 건가?’

라이오넬은 턱을 괴고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넬리에게 프레르가 준 것을 함부로 먹지 말라고 경고라도 해 줄 참이었다.

밖으로 나오니 마침 살금살금 계단을 올라오는 넬리가 보였다.

“목장지기에게 다녀오나?”

말을 걸자 놀란 토끼처럼 어깨를 들썩인 넬리가 몸을 홱 돌렸다. 들고 있는 주머니에서 유리병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주머니에 든 건 뭐지?”

“약이요.”

“어떤?”

“이건, 어, 피로 회복제예요.”

“흠…….”

약의 이름은 넬리가 모았다던 약초의 효능과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하지만 프레르가 다른 약초를 섞지 않았을 거란 보장이 없었다.

“이리 내.”

“왜요? 드시게요? 드셔 보세요.”

“수상한 걸 먹을 순 없지.”

넬리의 눈이 순식간에 좁아졌다. 그녀는 주머니에 달린 줄을 양옆으로 잡아당겨 입구를 콱 조였다.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으나 저건 프레르를 비호하는 행동이었다. 프레르가 저에게 이상한 걸 주지 않았을 거라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맞아요. 사실 맛도 끔찍하거든요. 저 혼자 먹을…….”

“벌써 먹었나?”

라이오넬은 순간 속이 꼬였다. 하지만 그것보다 걱정이 앞섰다.

그는 넬리에게 다가가 양어깨를 감싸고 고개를 숙여 얼굴을 살폈다. 아픈 기색 없이 쌩쌩한 눈동자가 라이오넬에게로 향했다.

“마신 지 얼마나 됐지?”

“몇 시간은 됐을걸요.”

“몸에 이상은 없나?”

“전혀요.”

그는 넬리의 몸을 한 차례 더 살폈다. 그러다 다시 맑은 초록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묘한 갈증이 입안을 마르게 했다. 낯선 감각에 인상을 찌푸리고 몸을 세우자 넬리의 눈빛이 흔들렸다.

“정말 왜 그러시는데요.”

라이오넬은 한숨을 내쉬고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신경 쓰지 마.”

그리고 답지 않게 도망치듯 자리를 피했다.

* * *

나는 멍하니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가는 라이오넬을 바라봤다.

뭐야. 아레트에게 보고도 받았을 텐데 왜 저런 반응이람. 사람 찝찝하게.

‘진짜 독이라도 들었나?’

라이오넬이 아무 이유도 없이 내 상태를 살필 사람은 아닌데. 아무래도 약효를 정확하게 확인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프레르가 과일 주스에 섞어 먹는댔지? 기왕 실험하는 거 같은 조건으로 하는 게 좋겠어.’

주방으로 돌아 들어가자 하인 한 명이 나를 발견하고 인사를 했다.

그의 인사를 받아 주고 웃는 얼굴로 부탁했다.

“목이 말라서 그런데 혹시 주스 남은 거 있나요?”

“어떤 주스로 드릴까요?”

“상큼한 거면 아무거나 상관없어요.”

“마침 딸기 주스가 좀 남았는데 가져오겠습니다.”

하필 남아도 딸기 주스야.

딸기 하면 자동으로 떠오르는 얼굴을 지워 내고 고개를 끄덕였다.

곧 하인이 커다란 유리컵 가득히 딸기 주스를 담아 왔다.

다시 인적이 드문 복도로 와서 딸기 주스에 약을 쏟아붓고 잘 섞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쥐를 잡기 위해 설치해 놓은 덫이 드문드문 보였다.

그러고 보니 메리가 저번에 한숨 쉬며 말한 적이 있었다.

쥐들이 똑똑해졌는지 음식만 쏙 빼먹고 좀처럼 잡히지 않는다고 말이다.

‘저기다 쏟아 보면 되겠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덫을 향해 갔다.

그리고 쥐를 유인하기 위해 놓아둔 음식 위로 약을 조금 뿌렸다.

‘이러면 내일쯤 어떻게 됐는지 알 수 있겠지.’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딸기 주스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관찰했다.

일단 색깔은 그냥 조금 진한 딸기 주스였다.

보고 있으니 정말 그 끔찍한 맛이 가려졌을지 궁금해졌다.

‘아까 한 숟가락 먹었을 때도 괜찮았으니까 조금 더 먹어 봐도 되겠지?’

막대기로 콕 찍어 맛을 봤다.

그리고 새삼스러운 눈으로 딸기 주스를 보았다.

조금 더 새콤해지고 끝 맛이 쌉싸름했다.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깔끔하게 느껴졌다.

약을 탔다는 걸 모르고 마시면 눈치채지 못할 수준이었다.

좋아. 이 정도면 라이오넬도 모를 거야.

“흐흐흐.”

다음 날, 나는 일어나자마자 방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두리번거리다가 메리를 발견했다.

“메리!”

다가가자 그녀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평소와 달리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넬리 님. 일찍 일어나셨네요.”

“네. 눈이 빨리 떠져서요. 메리는 잠을 설쳤나 봐요?”

메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쥐 때문에요. 원래는 몇 시간 돌아다니다가 잠잠해지곤 했는데 어제는 무슨 일인지 밤새 뛰어다니더라고요. 덕분에 한숨도 못 잤어요.”

역시 독이 없었어! 게다가 효과도 정확한 것 같았다.

나는 나 때문에 잠을 설친 메리에게 사탕을 쥐여 주었다.

“제 방은 아직 깨끗하니까, 오늘은 청소 안 해도 돼요. 그 시간에 제 침대에서 눈 좀 붙이세요.”

“감사해요, 넬리 님.”

곧 출근할 시간이라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관리소에 도착해 종일 정신없이 일했다. 시간이 날 때 여왕 폐하께서 맡기신 이국의 작물 밭에도 들렸다.

작물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것을 보며 눈물을 삼키고 성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아침보다는 조금 상태가 괜찮아진 메리에게 물었다.

“메리. 쥐 사체가 나왔다는 말 들은 거 있어요?”

“아니요.”

메리의 표정은 정말 유감스러워 보였다.

죽은 쥐가 없다는 걸 한 번 더 확인하고 난 뒤에야 마음이 편안해졌다. 방으로 돌아와 두 시쯤 일어날 생각으로 일찍 잠을 청했다.

눈을 떠 보니 새벽 네 시였다. 깨어나려고 마음먹었던 것보다 늦은 시간이었다.

라이오넬이 깨어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딸기 주스를 손에 들고 밖으로 나왔다.

복도를 따라 한참 걷자 라이오넬 방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이 보였다. 곧장 방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한참 뒤에 문 너머에서 갈라진 목소리가 들렸다. 괜히 마음이 약해졌다.

‘그냥 돌아갈까?’

순식간에 스친 망설임에 답을 내릴 새도 없이, 문이 열렸다.

고개를 들자 라이오넬이 문틀에 삐딱하게 기대어 서 있는 게 보였다.

답지 않게 눈매가 풀려 있었다.

“주무시고 계셨어요?”

“아니.”

그의 옆으로 안이 들여다보였다. 일하고 있었던 건 아닌지 책상 위가 깔끔했다.

그럼 도대체 왜 이 시간까지 깨어 있던 거지?

고개를 기울이는데 라이오넬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건 뭐지?”

“딸기 주스요.”

라이오넬이 주스를 빤히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상의할 게 있어서 온 건가?”

“아니요. 그냥 주스나 드시라고……?”

“뜬금없군.”

이럴 줄 알았으면 새벽에 찾아올 때마다 마실 거라도 들고 올걸.

잠깐 후회했으나 위축되면 의심만 살 것 같아 당당하게 라이오넬을 쳐다봤다.

그러자 그가 문을 활짝 열어 두고 몸을 돌렸다.

“들어와.”

“저는 조금 있다가 출근해야 해서요.”

라이오넬이 걸음을 멈추고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아직 네 시간은 남은 거로 아는데.”

그의 옆으로 보이는 커다란 벽시계는 여전히 네 시 언저리를 가리키고 있었다.

우물쭈물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라이오넬도 소파로 갔다.

그가 피곤한 듯 손바닥으로 눈두덩이를 문질렀다. 나는 주스를 탁자 위에 내려놓고 은근슬쩍 그의 앞으로 밀며 물었다.

“왜 안 주무시고 계셨어요?”

“그러는 그대는 왜 이 시간에 깨어 있지?”

질문이 질문으로 돌아왔다. 화제를 돌리는 걸 보니 답해 주기 싫은 모양이었다.

그게 또 괜히 서운하다, 고 생각하다가 화들짝 놀랐다.

서운하기는! 정신 차려, 넬리 페퍼!

양손으로 볼을 가볍게 두드리고 대답했다.

“저는 자고 일어난 거예요.”

“이 시간에?”

“네.”

“부지런하군.”

라이오넬이 팔걸이에 기댄 채 손바닥으로 옆 이마를 받쳤다. 눈은 완전히 감은 채였다. 입가에는 드물지만 희미하게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저 미소를 보니 내 사인이 과로사인 걸 알아도 일하다 죽었다며 흐뭇해했을 것 같았다.

‘상상하니까 속이 뒤집히네.’

가만히 라이오넬을 노려보고 있는데 그가 눈을 떴다. 그러고는 몸을 바로 세우고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표정.”

“불손하다고요.”

“아는군.”

잠시 침묵이 흘렀다. 라이오넬은 말없이 나를 응시했다. 그 시선에 괜히 마음이 불편해졌다. 빨리 라이오넬에게 주스를 먹이고 돌아가야겠다.

‘내가 독이라도 탔을까 봐 안 마시나?’

라이오넬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다.

어차피 나는 잠을 자고 왔기 때문에 이 약을 먹어도 아무런 변화가 없을 것이다. 프레르가 했던 것처럼 반쯤 마시고 라이오넬에게 줘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손을 뻗는데 라이오넬이 딸기 주스를 들어 올렸다.

“내게 주려고 가져온 거 아니었나?”

“맞아요. 제가 반 마시고 드릴게요. 그래야 안심하실 거죠?”

딸기 주스를 건네주려던 라이오넬이 인상을 찌푸리고 다시 주스를 가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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