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순간 머릿속에서 수십 가지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아레트가 라이오넬에게 내가 찾는 약초를 보고하고, 나는 그에게 끌려가서 추궁당하는 장면 말이다.
‘다행히 내 목소리는 못 들은 것 같아.’
지금이 기회다. 도망쳐야지!
꽈당이의 머리를 숲 쪽으로 향하게 한 뒤, 몸을 숙여 목을 끌어안았다.
“꽈당아, 달려!”
작게 소리치자 꽈당이가 땅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거센 바람이 볼을 스쳤다. 눈을 질끈 감았다. 속도가 너무 빨라 조금 무서웠다.
동시에 안심이 되어 실눈을 뜨고 천천히 고개를 뒤로 돌렸다.
‘말을 탄 게 아니면 따라오기 힘들…… 으악! 무서워!’
아레트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엄청난 속도로 따라오고 있었다.
심지어 거의 다 따라잡았어!
하지만 당나귀의 속도를 이길 순 없었는지 격차가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숲에 들어와 있었다. 따돌리기 위해 계속 달리다가는 숲을 벗어날 것이다.
나는 일단 꽈당이를 멈췄다.
아레트는 기어이 우리를 따라잡고 자리에서 멈춰 섰다.
“무슨, 허억! 사람이, 그렇게, 허억! 빨라요!”
꽈당이 위에만 매달려 있던 나도 숨이 차 죽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아레트는 오래 헉헉대지 않고 순식간에 호흡을 갈무리했다. 이마에 난 땀을 손등으로 훔치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훈련했습니다.”
나도 훈련하면 저렇게 될 수 있나?
약간 기대를 담아 쳐다봤다. 그러자 아레트가 냉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약골은 죽습니다.”
아레트 놈이 나에게 은근히 약골이라고 했다.
……근데 맞는 말이라 부정할 수가 없다.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일단 꽈당이 위에서 내렸다.
그의 눈빛이 나에게 숲에 온 이유를 묻고 있었다. 여기까지 쫓아온 걸 보면 따라다닐 생각이겠지? 그러면 거짓말을 해도 금방 들통날 것이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순순히 자백했다.
“제가 약초 찾는 거 공작님한테 비밀로 해 달라고 하면, 비밀로 해 주실래요?”
아레트는 대답이 없었다.
“안 해 주실래요?”
“예.”
그럴 줄 알았다.
‘따돌리면 무슨 약초를 찾는 건지는 숨길 수 있을 것 같은데…….’
여유롭게 풀을 뜯고 있는 꽈당이를 힐끗 보았다. 그러자 아레트가 발목을 돌리며 풀었다.
지옥 끝까지 따라올 기세였다.
아레트 놈에게서 벗어나느니 라이오넬에게 댈 변명을 찾는 게 빠를 것 같았다.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품에서 종이를 꺼냈다.
‘어디 보자. 빨간 열매는 금방 찾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다른 풀떼기들은 어떻게 찾지?’
주변을 쓱 훑어봤다. 감자 잎과 고구마 잎도 구분하지 못하는 내 눈에는 주변에 난 풀들이 다 똑같아 보였다.
‘아레트에게 물어보면 알려나?’
전쟁터에서는 약초를 많이 다루니까 나보다는 잘 알지 않을까? 어차피 날 쫓아다닐 생각인 것 같은데 써먹어야겠다.
“저기 아레트 님. 혹시 이 약초 아시나요?”
그는 종이를 유심히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찾아오겠습니다.”
내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는 종이를 가져가더니 순식간에 나무 사이로 들어갔다.
그러더니 어디선가 그림과 똑같은 풀떼기와 뿌리들을 한가득 안고 왔다.
그는 내게 가져온 것을 전부 넘겨주고 손가락으로 한 방향을 가리켰다.
“저기서 붉은 열매를 봤습니다.”
몸을 돌리자 아레트가 앞장섰다. 꽈당이를 끌고 그의 뒤를 따랐다.
조금 걷다가 아레트가 걸음을 멈췄다.
그가 검을 빼 들어 가시가 달린 풀들을 베어 냈다. 그러자 빨간 열매가 달린 조그만 나무가 보였다.
‘진짜 있네!’
그가 아니었으면 혼자 한참을 헤맬 뻔했다.
이제 이것만 프레르에게 가져다주면 라이오넬을 못 자게 할 수 있어!
“흐흐흐.”
신나게 웃고 열매를 최대한 많이 따서 가방에 넣었다.
“이제 돌아가요!”
아레트가 별다른 말 없이 몸을 돌렸다.
꽈당이 위에 올라타자 꽈당이가 알아서 아레트를 따라갔다.
채집한 거로 뭘 만들 건지 물어보면 어쩌지?
머릿속으로 아레트의 질문에 대비해 수십 가지 대답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목초지에 도착하자마자 고개를 가볍게 까딱여 인사하고는 돌아가 버렸다.
‘뭐야. 저게 다야? 정말?’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가 몸을 돌렸다.
멀리서 풀 뜯는 양들이 보였다. 프레르는 양이 무리를 이탈하지 않도록 지켜보며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프레르!”
눈이 마주쳤다. 그에게 가방을 흔들어 보였다.
“벌써 다 찾았어요?”
“아레트 님이 도와줬어요. 약 만드는 데에는 얼마나 걸려요?”
“그냥 빻아서 섞기만 하면 돼요. 근데 맛이 좀 끔찍할 텐데.”
왜 프레르는 맛이 끔찍한 약밖에 못 만드는 걸까?
진통제 맛이 떠오르자 얼굴이 저절로 구겨졌다.
……라이오넬에게 먹일 수 있을까? 아니, 먹여도 되는 걸까? 생각만 해도 헛구역질이 날 것 같은데!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가리자 프레르가 지팡이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 정도는 아닌데.”
“프레르 미각은 믿을 만한 게 못 돼요.”
단호하게 말하자 프레르가 불퉁한 표정을 지으며 내가 들고 있는 가방을 가져갔다.
그가 먼저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나는 문을 닫고 의자에 앉으며 분주하게 움직이는 프레르를 구경했다.
그는 손절구에 재료 하나를 넣고 빻은 뒤 즙을 짜냈다. 그리고 나무 그릇에 즙을 옮겨 담았다.
그 행동을 세 번 정도 반복했다. 그러자 끔찍한 색의 액체 두 그릇과 빨간 액체 한 그릇이 나왔다.
프레르가 계량스푼으로 정확한 양을 덜어 섞었다.
그리고 그 약을 병에 담아 나에게 내밀었다. 나는 착잡한 눈으로 유리병을 바라보았다. 색이 역시나 끔찍하다.
“이거 먹어도 안 죽죠? 독극물처럼 생겼는데…….”
“생긴 건 이래도 독은 없어요. 약효도 그렇게 강하지 않아서 몸에 무리도 안 가고, 엄청 피곤하면 마셔도 잠들긴 할걸요. 푹 자진 못하겠지만.”
그건 좀 다행이다. 나는 라이오넬을 괴롭히고 싶은 거지 독살하고 싶은 게 아니니까! 하지만 영 손에 쥐고 싶은 색이 아닌데.
받지 않고 망설이자 프레르가 코르크로 된 유리병 마개를 땄다.
“의심스러우면 제가 마셔 볼까요?”
고개를 저었다. 라이오넬에게 먹일 방법을 생각해 보기 위해서는 직접 맛을 보는 게 나았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스푼에 따라 입에 넣었다.
저번처럼 토 나오는 맛은 아니고…… 그냥 토에 가까운 맛이었다.
본질적으로는 다르지 않은 것 같지만, 어쨌든 먹을 수는 있었다.
“으음…….”
“적어도 반병은 마셔야 효과가 있어요.”
“좀, 괜찮게 마실 방법 없을까요?”
“현지에서는 신 과일에 섞어 먹더라고요.”
“현지?”
“아. 이 약물은 어떤 부족이 마시던 거를 개량한 거거든요.”
“직접이요?”
프레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개량할 정도면 정말 약초학이나 의학을 대충 배운 건 아닌가 보네.
프레르를 빤히 바라보자 그가 약병 2개를 건네며 물었다.
“왜 그렇게 보세요?”
“도제식 교육을 못 받았을 것 같은데 제법 조예가 깊다 싶어서요.”
“……아항.”
프레르가 반 박자 늦게 맹한 감탄을 터트렸다.
나는 괴상한 초록색으로 변한 액체를 불빛에 비춰 흔들어 봤다.
라이오넬의 숙면을 방해하려는 이유는 그가 피곤해지길 바라서였다.
하지만 라이오넬은 괴물 같은 체력을 가졌으니 이번 계획도 실패할 수 있었다.
“혹시 피로를 느끼게 하는 약도 있어요?”
남은 약초와 절구를 정리하던 프레르가 고개를 돌렸다.
“그건 왜요?”
“어…….”
임기응변 실력이 도망가기라도 했는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고민해 봐도 ‘사실 제가 피곤한 느낌을 즐겨요.’ 이딴 것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생각해 내, 넬리 페퍼! 아니, 근데 솔직히 피로감을 느껴야 할 이유가 없는데!
침묵이 길어질수록 프레르의 눈이 가늘어졌다.
“설마…….”
그가 말끝을 길게 끌며 용의자를 보는 눈을 했다.
그 눈빛이 양심에 날아와 쿡 꽂혔다.
“뭐, 뭐가 설마예요?”
“꾀병 부리려고?”
“네!”
“농땡이 피우려는 거면서 굉장히 당차게 대답하시네요.”
어색하게 웃고 잠깐 딴청을 피우다가 원래의 화제로 돌아왔다.
“그래서 피로함을 느끼는 약도 있어요?”
“있긴 한데, 그냥 연기하시는 게 편할걸요.”
“왜요?”
“피로를 느끼게 하는 약물들은 대부분 몸에 무리가 가거든요.”
“먹으면 죽어요?”
“그 정도는 아니고……. 음, 맞나?”
프레르가 멍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감질나게 입을 딱 다물어 버렸다.
뭐야, 알려 줘요!
열렬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프레르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다가 ‘뭐 별일이야 있겠어.’ 이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보통 아그튬반의 뿌리 즙을 쓰는데 술하고 먹으면 즉사할 수도 있어요.”
나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그러자 프레르가 작게 웃다가 작정하고 겁을 주려는 듯 음산하게 말을 이었다.
“갑자기 극심한 피로를 느끼다가 아주, 아주, 아주 고통스럽게 죽는대요. 그러니까 절대, 쓰려고 하지 마세요.”
상상하기도 싫다. 특히 저 극심한 피로를 느낀다는 부분이 제일 끔찍하다.
몸을 부르르 떨다가 문득 프레르의 말에 이상함을 느꼈다.
“‘보통’ 아그타, 어…….”
“아그튬반이요.”
“그래요! 그 식물의 뿌리 즙을 쓴다는 건 그 약이 대중적인 건가 봐요?”
“귀족들 사이에선 많이 쓰여요.”
“꾀병 부리는 사람이 많아요?”
“꾀병보다는, 시험이나 후계자 싸움에서 상대방을 이기기 위해서 많이 쓰…… 였을 걸요? 아마.”
말 중간이 묘하게 늘어났다가 황급하게 마무리되었다.
목장지기로 떠돌아다니던 사람이 귀족 사회에서 많이 안다 싶었는데, 그냥 추측한 건가 보다.
“그럼 먹으면 죽는 수밖에 없어요?”
“술을 조금 먹으면 즉사하진 않아요. 게다가 해독제도 생각보다 만들기 쉬워서 약초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 있으면 살 수 있겠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프레르는 설명을 이어 갔다.
“어쨌든 자기가 먹은 줄 모르고 술을 마셨다가 죽은 사람이 많았거든요. 그래서 독성이 알려지게 됐어요. 술하고 같이 먹지 않아도 간에 안 좋고요.”
“그럼 절대 쓰면 안 되겠네요. 이건 그런 주의사항 없어요? 뭐랑 같이 먹으면 안 된다거나.”
“없어요. 사실 약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해서.”
“잘됐네요! 오늘 도와줘서 고마워요. 물론 이 대화는 비밀이고요.”
고개를 끄덕이는 프레르에게 인사를 한 뒤 밖으로 나왔다.
약병을 주머니에 넣고 입구를 꽉 닫은 다음 허리에 매달았다. 그리고 목초지에서 뛰어놀고 있는 꽈당이를 불러서 공작성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