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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제발 좀 망하세요 (50)화 (50/130)

50화

“별것 아니니까.”

“진짜 방으로 돌아가면 거울 좀 봐요. 유령도 라이오넬 몰골 보면 도망갈 것 같으니까.”

라이오넬이 가볍게 웃자 피가 울컥 터졌다.

“웃지 마요! 피 나잖아요.”

한참을 압박하자 슬슬 피가 멎는 것 같았다.

깨끗하게 씻었던 손이 다시 붉게 변했다. 반쯤 포기하고 그냥 연고 통을 열었다.

보기만 해도 아픈 상처에 얼굴을 있는 대로 찌푸리며 연고를 발랐다.

이마에 새빨간 시선이 달라붙었다.

“그러는 그대는 왜 신경 쓰지?”

나도 모르게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라이오넬이 반쯤 감긴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를 싫어하는 게 아니었나?”

싫다는 말이 바로 나올 줄 알았는데, 말문이 턱 막혔다.

이건……. 상관 면전에다가 욕을 할 수 없기 때문이야. 그래서 말문이 막힌 거야.

연고를 더 떠서 상처에 바르며 입을 한 번 꾹 다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데요?”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알 텐데.”

“전혀요.”

진짜 짐작 가는 곳이 없다.

복수하려는 걸 안 들키려고 잘 대해 줬던 것 같은데.

같이 밥도 먹고 말도 탔잖아!

물론 가끔 흘겨보고, 말대꾸하고, 다가오면 경계하고, 같이 있으면 좀 불편해하긴 했지만…….

그, 근데 이건 다른 사람한테도……!

아니구나. 다른 사람은 그렇게 대한 적이 없다.

아무래도 나는 라이오넬을 싫어하고 있는 게 맞았던 모양이다.

‘귀신같네. 하긴 예민하니까 의심도 많겠지.’

속으로 툴툴거리며 붕대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라이오넬이 먼저 붕대 위를 손으로 덮었다.

내 손끝이 그의 손등에 얼핏 닿았다.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불에 덴 사람처럼 손을 떼어 내고 말았다.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황급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하지만 붉은 잔상이 눈앞에 일렁이는 듯했다.

숨을 내쉬자 심장이 흥분한 당나귀처럼 날뛰는 게 느껴졌다.

‘갑자기 왜 이런담? 너무 긴장했나?’

주먹으로 가슴을 가볍게 내리치는데 라이오넬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여 나와 시선을 맞췄다.

“아직 대답을 못 들었는데.”

“무슨, 무, 무슨 대답이요.”

“왜 내가 다친 걸 신경 쓰는지.”

“사람이 다쳤는데 그럼 신경을 쓰지, 안 쓰나…….”

몸을 틀어 시선을 피하고 붕대를 가린 라이오넬의 손을 치워 냈다.

라이오넬은 여전히 고개를 기울인 채 나를 보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이 부드러워 보였다. 그 아래로 그린 듯 완벽한 모양의 눈썹이 보였다.

숱이 많은 속눈썹은 차양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그 그늘에 반쯤 가려진 눈동자는 마치 말라붙은 피처럼 짙은 색을 띠고 있었다.

곧고 완벽한 콧대 밑에 있는 입술은 좀 더 생기 있는 색감이었다.

마치 목에서 흐르는 피처럼…….

“으악! 피 나잖아요. 진짜 가만히 좀 있어요!”

그의 머리를 붙잡아 세우고 피를 닦아 냈다.

아까 지혈한 효과가 있는지 다행히 피가 많이 나진 않았다.

연고를 다시 바르고 그가 움직이기 전에 바로 붕대를 들어 둘둘 감았다.

“부러진 게 아니라 붕대는 필요 없는데.”

“이렇게 안 해 두면 또 요리조리 돌리다가 피 볼 거잖아요.”

조용하게 투덜거리고 붕대 하나를 더 들었다.

움직이지 못하도록 두껍게 둘러놓을 거야. 나무 껍데기처럼!

바쁘게 움직이는 와중에도 라이오넬의 시선이 꾸준하게 따라붙는 게 느껴졌다.

생각해 보면 그는 좀 집요한 구석이 있었다. 대답 안 해 주면 쫓아낼 때까지 저러고 쳐다볼 것 같았다.

“저는 집게벌레가 뒤집혀 있어도 나뭇가지로 도와준다고요!”

“집게벌레는 싫어하나?”

“다리 6개 이상 달린 건 다 싫어요. 징그럽잖아요.”

“나는 다리가 2개인데도 싫고?”

그래! 싫다, 싫어! 아주 지긋지긋하다! 이제 속이 시원하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를 노려봤다. 그러나 라이오넬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목에 감긴 붕대를 매만졌다.

“나를 왜 싫어하지?”

이유를 대라면 삼 일 밤낮을 샐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건 모두 죽기 전의 일이었다. 물론 과거로 돌아오고 나서도 딱히 잘해 주지는…….

“제법 잘 대해 준 것 같은데.”

생각 사이로 라이오넬의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래. 솔직히 말하면 죽기 전보다는 조금, 아주 조오금 낫긴 했다.

하지만 본질적인 건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의심하고, 나를 시험하려 든다. 로만을 고발한 나한테 감시도 붙였으면서!

나아진 게 하나도 없잖아.

“글쎄요.”

평소의 라이오넬처럼 모호하게 대답하며 거리를 벌렸다.

“치료 끝났어요.”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자신을 왜 싫어하는지 집요하게 물어볼 거로 생각했는데, 라이오넬은 의외로 조용히 일어났다.

“가세요.”

라이오넬은 할 말이 많은 얼굴로 나를 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리고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

고맙다는 말도 없지. 하여간 예쁜 구석이 없어요.

툴툴거리며 몸을 돌렸다.

탁자 위에 피 묻은 천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방 안에 불쾌한 쇠 비린내가 감돌았다.

‘저걸 두고 자면 꿈자리가 뒤숭숭하겠지?’

주섬주섬 천을 들어 올리는데 라이오넬의 상처가 떠올랐다.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다칠 거면 들키지나 말지. 복수하는 사람 심란하게 말이야.

한숨을 푹 내쉬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혹시 라이오넬이 고맙다는 말이라도 하려고 돌아온 건가 싶었다.

그러나 문을 열자 보인 것은 메리였다.

“역시. 아직 깨어 계셨네요.”

“네. 치우고 자야 속이 편할 것 같아서요.”

“그러실 것 같았어요.”

그녀는 내 품에 있던 피 묻은 천을 가져갔다.

그리고 그것을 바구니에 몽땅 넣은 뒤, 걸레로 능숙하게 핏자국을 정리했다.

나는 옆에서 우물쭈물 도우며 물었다.

“메리는 안 놀라네요.”

“뭘요?”

“공작님이 크게 다치셨잖아요. 기사님들도 그렇게 놀란 눈치도 아니더라고요.”

“아. 그거요.”

메리가 걸레질을 마무리하고 몸을 일으켰다.

“원래는 더 심했어요.”

더 심하다니, 뭐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다가 일단 그녀의 손을 잡고 소파에 앉았다.

메리가 소파에 묻은 핏자국을 보더니 슬쩍 물러나 앉았다.

“2년 전부터 암살자들 때문에 크게 다치셨거든요. 한꺼번에 여러 명이 침입해서 생사를 오간 적도 더러 있었죠.”

2년 전이면 라이오넬이 막 전쟁터에서 돌아왔을 때였다.

그런 사람을 공격할 이유가 있나?

“도대체 누가…….”

말끝을 흐리자 메리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생명이 위험하셨던 적도 있어서 다들 저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넘기는 편이에요. 공작님도 별로 신경 안 쓰시고요.”

정말 말도 안 된다. 생명의 위협을 꾸준히 받고 있었다니.

게다가 저 정도 다친 걸 아무렇지 않게 여길 정도면 그전에는 얼마나 심하게 다쳤던 거야?

“저는 몰랐어요.”

멍하니 중얼거리자 메리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긍정했다.

“당연하죠. 한 일 년 반 정도 그러다가 암살 기도가 뚝 끊겼거든요.”

“완전히요?”

메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1년 전에 끊겼으면 내가 영지에 오기 전이다.

‘내가 그래서 몰랐나 봐. 그럼 이번 사건은 역시 로만 때문인가?’

로만이 첩자인 걸 보면 내가 죽기 전에도 계속 첩자는 있었던 모양이다. 그걸 아무도 몰랐을 뿐이지.

그런데 이번엔 내가 로만의 정체를 들쑤셨다.

어쩌면 그것 때문에 다시 노골적인 암살 기도가 시작된 것일 수도 있었다.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작게 한숨을 내쉬자 메리가 위로하듯 내 손등을 다독였다.

“관리인님은 처음 봐서 놀라셨겠어요.”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라이오넬의 태도가 떠올랐다.

“그전에 났던 상처는 제대로 치료받으셨대요?”

“……아마 아닐걸요?”

“이것보다 더 큰 상처였는데도 치료를 안 받았다고요?”

“다들 전쟁터에 계셨던 분들이라 무덤덤하셔서요. 저도 정확히는 몰라요.”

……치료는 받았겠지. 받았으니까 살아 있겠지.

그렇게 마음을 추스르려 했으나 자꾸만 목 줄기를 타고 흐르던 새빨간 피가 떠올랐다.

메리는 내 복잡한 심경을 눈치챘는지 손등을 몇 번 더 다독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만 쉬세요. 참. 내일 탑이 폐쇄되니까 일하고 계실 때 하인들이 짐을 전부 옮겨 놓을 거예요.”

“네. 고마워요, 메리.”

그녀는 가볍게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고 방을 나갔다.

고개를 들었다가 소파에 묻은 핏자국을 발견했다.

‘복수는 좀 미뤄 둘까? 라이오넬이 다 나을 때까지만이라도.’

그래. 그러자. 내 복수 때문에 상처가 덧나서 죽어 버리기라도 하면 어떡해!

괜히 나 때문에 죽은 거 같아서 찝찝할 거 아니야.

과로로 죽은 원한을 갚고 싶은 거지 살인자가 되고 싶은 건 아니니까.

‘저 피 묻은 연고도 라이오넬 줘야지.’

이건 절대 라이오넬을 위한 게 아니다.

그가 빨리 나아야 내가 빨리 복수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절대로 라이오넬이 걱정되는 게 아니야.

누가 뭐라고 해도, 어쨌든 아니다.

* * *

라이오넬은 집무실로 돌아왔다.

연고를 어떻게 발라 놓은 것인지 목덜미와 빗장뼈까지 끈적거렸다.

게다가 붕대는 또 얼마나 두껍게 둘러 뒀는지 움직이기도 힘들었다.

“……이게 무슨 몰골이십니까?”

레반스의 반응이 저럴 정도면 말 다 한 것이다.

라이오넬은 자리에 앉아 펜을 들었다. 레반스는 잠시 망설이다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목이 반절 정도 잘리셨습니까?”

“레반스 다니오.”

라이오넬이 가볍게 경고했다.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던 레반스는 조금 억울했으나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붕대가 지나치게 하얗다는 것을 깨달았다. 비록 셔츠가 붉은색으로 변하긴 했지만 그렇게 많이 다친 건 아니구나 싶었다.

“그것보다, 각하.”

“뭐.”

“옷부터 갈아입고 오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서류에 피가 묻어서요.”

라이오넬이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가볍게 샤워한 뒤 셔츠를 갈아입고 돌아왔다.

어떻게 씻은 것인지 붕대는 여전히 보송했다.

“불편해 보이시는데 다시 감아 드릴까요?”

“됐어.”

그가 다시 펜을 들었다가 한숨을 내쉬며 내려놓았다.

그 소리에 레반스가 고개를 들었다.

“무슨 근심이라도…….”

“나를 싫어하면서도 여기 있는 이유가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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