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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제발 좀 망하세요 (49)화 (49/130)

49화

라이오넬과 프레르는 말장난을 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

알려 주기 싫어서 저렇게 물어본 건가? 아니. 대답하기 싫었으면 차라리 무시했을 것이다.

프레르는 일단 평소처럼 맹한 표정으로 느물거렸다.

“잘 대답하면 고기라도 하사해 주시나요? 그럼 열심히 대답하겠습니다.”

라이오넬이 재미있다는 듯 설핏 웃었다.

“그래. 열심히 대답하는 게 좋을 거야.”

프레르는 순진한 얼굴로 눈을 깜빡이며 생각했다.

‘괜히 기어 나왔네.’

무슨 정보라도 얻을까 싶었는데 오히려 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지금이라도 들어갈까?

고민하는 그에게 라이오넬이 먼저 말을 걸었다.

“이름은 프레르가 다인가?”

“아, 네. 평민이라서 성은 없습니다.”

“아버지가 목장지기였다고.”

“예.”

사실이건만 괜히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 프레르가 힐끗 라이오넬을 보았다.

그는 가주의 반지를 엄지로 쓰다듬고 있었다.

시선을 내리깐 데다가 주위가 어두워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계약을 10년 연장해 준다는 건 왜 거절했지?”

라이오넬은 넬리가 쓰러져 있을 때 프레르에게 계약을 10년 연장해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프레르는 1년만 연장했다.

원래 계약했던 기간은 끝이 났다. 그가 새로 맡은 임무는 넬리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는 것이었다.

‘아니지, 동물과 행복하게 뒹굴고 있는 거였던가?’

어찌 되었건 곧 아델하르트 왕자가 직접 올 예정이기에 알터우드 공작령에 10년이나 머물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그건 첩자로서의 이유고, 목장지기로서는 떠날 이유가 하등 없었다.

넬리에게는 아버지가 아프시다는 핑계를 댔으나 그게 라이오넬에게도 먹힐지는 미지수였다.

하지만 마땅한 변명도 없었다.

“아버지가 아프셔서요.”

“그럼 당장 귀향하는 게 낫지 않나?”

“아직 그렇게 심하시진 않고, 알터우드령 사람들하고 정도 들었고…….”

그는 반사적으로 불쌍한 척을 하다가 아차 싶었다.

넬리를 처음 만났을 때도 의심을 거두기 위해 불쌍한 척을 하다가 일이 꼬이지 않았던가!

하지만 아버지가 아파 정든 곳을 떠나야 하는 마당에 생글생글 웃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프레르는 계속 시무룩한 척을 했다.

라이오넬은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 프레르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수상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본능은 여전히 프레르에게 날을 세우고 있었다.

“아까 나를 보았나?”

“네.”

“누가 숨어 있다는 것도 알았고?”

“네.”

“넬리 페퍼는 왜 피신시켰지?”

“위험해 보이는 사람이 밖에 둘이나 있는데 관리인님을 밖에 둘 순 없으니까요.”

“어두운데 잘도 기척을 느꼈군.”

“재규어 같은 맹수를 피하려면 그 정도는 기본이죠.”

대답이 거침없다. 뭔가를 숨기는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석연치 않은 구석은 있었다.

“왜 밖에 위험한 사람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지?”

라이오넬이 암살자의 존재에 대해 넬리 페퍼에게 함구하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건 기사거나 기사였던 사람에게만 떨어진 명령이었다. 일반 주민은 몰라야 하는 것이나 프레르는 꾸준한 첩보 활동을 통해 알고 있었다.

넬리가 알터우드 공작령을 떠나면 프레르 역시 난감해지는 건 마찬가지라 반사적으로 명령을 따른 게 화근이었다.

“관리인님이 겁먹을 것 같아서 그랬어요.”

“안전하게 성으로 돌아가려면 겁먹는 편이 나았을 텐데. 그래야 경계를 할 테니.”

“아항. 생각해 보니 그렇네요.”

프레르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 감탄했다.

“흐음…….”

라이오넬의 감이 프레르가 수상하다고 소리쳤다. 하지만 만약 정말로 프레르가 수상한 사람이라면 넬리가 먼저 알아차렸을 것이다.

프레르와 가장 가깝게 지냈고 의외로 눈치도 빠르니까.

반쯤 농담이었지만 넬리는 이미 프레르를 한 번 의심한 적이 있었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라이오넬은 의심을 반쯤 거두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지. 하지만 만일 수상한 점이 발견된다면.”

라이오넬이 말을 멈추고 프레르를 응시했다.

빛이 깃든 눈동자가 평소보다 몇 배는 더 붉게 빛났다.

“그대는 손가락으로 끝나지 않을 거야.”

프레르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나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평소처럼 머리를 긁적였다.

“무서워서라도 절대 허튼수작 부리면 안 되겠네요.”

라이오넬은 대답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프레르는 라이오넬이 완전히 목초지를 떠나고 나서야 숨을 내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조금 괜찮아졌던 편지 감시가 다시 심해지기 전에 펜을 들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안부 편지를 쓰는 척 아델하르트 왕자에게 암호문을 적어 보냈다.

[저 들킬 것 같은데 어떡하죠?]

그러나 돌아온 답은 냉담했다.

[안 들키면 되지.]

이상하게 글자가 뺀질거리며 웃고 있는 것 같아, 프레르는 답장을 불태워 버렸다.

* * *

“꽈당아 봐 봐. 여기가 서쪽 탑이고, 저쪽이 본성, 그 너머가 동쪽 탑이야. 여기는 정원이고. 마구간도 알려 줄게.”

간혹 마주치는 기사님들에게 인사를 하며 마구간으로 향했다.

꽈당이한테 성을 알려 준다고 돌아다니면서 느낀 건데, 오늘따라 유난히 기사님들이 많다.

‘설마 나를 감시하려고 풀어 둔 건 아니겠지?’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너무 억측 같아 떨쳐 내고 마구간으로 갔다.

“자유롭게 돌아다녀도 되는데 잠은 꼭 여기서 자야 해. 알겠지?”

프레르 말로는 마구간이 집이라는 걸 계속 알려 주어야 한다고 했다.

내일 몇 번 더 산책하기로 한 뒤 꽈당이에게 인사하고 몸을 돌렸다.

늘어지게 하품하며 서쪽 탑을 향해 걸었다. 막 정원을 지나려는데 라이오넬이 서쪽 탑을 향해 서 있는 게 보였다.

걸음을 멈추자 기척을 느꼈는지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공작, 으아악! 피!”

“피?”

그가 고개를 기울이자 목에서 울컥 피가 흘렀다. 셔츠는 이미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매스껍고, 온몸에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당장 달려가 라이오넬의 목을 양손으로 막았다.

“지금 내 목을 조르는 건가?”

“농담할 때에요?!”

버럭 소리치자 라이오넬이 입을 다물었다.

“어떡해. 피, 피가, 너무 많이 나잖아요!”

어쩔 줄 몰라 두리번거리는데 비명을 들었는지 기사님들이 달려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라이오넬이 별일 아니라는 듯 가 보라고 턱짓했다.

기사님들은 새빨갛게 변한 그의 셔츠를 보고서도 걱정하는 기색 없이 꾸벅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렸다.

‘뭐야. 진짜 가? 이대로 간다고? 모시는 분이 피를 철철 흘리는데?’

당황해 굳어 있자 라이오넬이 내 손을 떼어 냈다.

“그냥 스친 거니까 호들갑 떨지 않아도 돼.”

“뭐에 스쳤는데 피가 이렇게 많이 나요!”

“글쎄. 칼?”

농담인가? 진짠가?

피가 많이 나는 걸 보면 진짠 거 같은데!

혹시 누가 라이오넬을 암살하려고 하나? 그래서 갑자기 기사들이 늘어난 건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다. 어쩌면 지금처럼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서 내가 몰랐던 것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어떡하지? 어쩌면 좋지?

발만 동동 구르는데 머리 위에서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놀란 다람쥐 같군.”

웃음? 다람쥐? 피를 이렇게 철철 흘리면서, 시답지 않은 소리를 한다고?

기함한 얼굴로 쳐다보자 라이오넬이 웃음기를 거두고 몸을 돌렸다.

“늦었으니 돌아가서 자도록 해.”

“잠깐만요!”

나는 본성으로 가려는 라이오넬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프레르한테 가요.”

“됐어.”

“되긴 뭐가 돼요! 아니면, 아니면 의사…….”

말을 하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라이오넬은 의심병 말기 환자답게 의사를 들이지 않았다.

자신을 손쉽게 죽일 수 있는 자리에 사람을 두고 싶지 않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 때문이었다.

‘지금 보면 말도 안 되는 이유는 아니었던 것 같지만…….’

어찌 됐든 성에 의사가 생긴 건 2년 뒤쯤이었다. 무슨 바람이 불어 의사를 들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연고라도 발라요!”

“별것 아니래도.”

영 말을 들을 것 같지 않았다.

놓아주면 대충 옷이나 갈아입고 잠이나 자겠지. 침대에서! 피를 철철 흘리면서!

어떡할까? 집사님한테 부탁해야 하나? 아니면 레반스? 아레트?

그런데 왜 세 사람 다 별로 신경을 안 쓸 것 같지?

고민하는데 라이오넬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는 게 보였다.

피를 많이 흘려서 어지러운 게 분명했다. 그때, 방에 받아 두었던 연고가 떠올랐다.

‘손가락을 베였을 때 받아 둔 건데, 이렇게 큰 상처에도 효과가 있으려나?’

있겠지. 있어야지.

나는 그의 옷자락을 붙잡고 무작정 서쪽 탑으로 향했다.

들어가다 메리와 마주쳤다. 비명이라도 지를 줄 알았는데 그녀는 의외로 침착했다.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으나 그뿐이었다.

“깨끗한 천을 준비해 드릴까요?”

오히려 내가 더 당황하고 말았다. 더듬으며 그렇게 해 달라고 대답한 뒤 방으로 들어왔다.

일단 라이오넬을 소파에 앉혀 놓고 서랍으로 달려가 연고를 꺼냈다.

서랍장에 손가락 모양으로 붉은 자국이 찍혔다. 라이오넬의 상처를 막았을 때 손에 묻었던 피가 서랍장에도 묻은 것이었다.

섬뜩한 광경에 잠시 굳었다가 고개를 저어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라이오넬에게 다가갔다.

그는 머리를 젖히고 소파 등받이에 기대 있었다.

“그러고 있으면 상처 벌어지잖아요!”

라이오넬이 자세를 바로 했다.

나는 그의 옆에 앉아 상처를 들여다봤다. 상처 주변에 말라붙은 핏자국이 보였다.

“으으.”

아프겠다. 인상을 찌푸리며 연고를 열려다가 새빨갛게 변한 손바닥을 발견했다.

“기다려 봐요. 손 씻고 올게요.”

손을 씻고 나오자 소파 테이블 위에 못 보던 바구니가 있었다.

메리가 두고 간 것인지, 바구니 안은 깨끗한 천과 붕대로 가득했다.

나는 다시 라이오넬의 옆에 앉았다.

“이거 연고로 될까요?”

“필요 없어.”

라이오넬이 눈을 감고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어지러워요?”

“피곤하군.”

허세야, 진심이야? 그의 얼굴을 빤히 보다가 일단 하얀 천으로 상처를 지혈했다.

“공작님이 다쳤는데 왜 아무도 신경을 안 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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