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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제발 좀 망하세요 (48)화 (48/130)

48화

그는 넬리의 뒤를 따르며 몇 시간 전 소피에게 보고받은 것들을 떠올렸다.

자신이 옳았다. 그는 넬리가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 영지를 떠날 거라 예상했다. 그러나 넬리 페퍼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제대로 된 첩자 하나 못 보내는 머저리들 때문에 잃기엔. 지나치게 유능한 인재지.’

지키는 건 어렵지 않다.

어차피 이주민은 받지 않고 있고, 경비는 삼엄하니 이방인은 금세 눈에 띌 터였다.

하지만 불안한 마음에 쓸 만한 기사 몇 명과 기사였던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감시가 아니니 티가 나도 상관없다. 단, 이유는 말하지 마. 목숨이 위협받는다는 걸 알면 떠날 테니.”

넬리가 영지를 떠날 수도 있다니!

기사들과 기사였던 사람들은 절대 말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정말 아무 말도 안 할 줄은 몰랐지만.’

특히 소피와 톰, 제럴드는 넬리 페퍼가 추궁하면 어영부영 말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건가?’

제법 눈치가 빠르니 그럴지도 모른다.

정확한 이유는 몰라도 주변에 사람들이 맴도는 건 알아차렸을 것이다.

라이오넬은 넬리와 제법 먼 거리를 유지하며 나란히 걸었다.

“꽈다앙이. 흠흠! 귀여운 꽈아당이.”

넬리의 발걸음은 경쾌했고, 입술로는 성을 나가면서 불렀던 이상한 노래를 계속 흥얼거리고 있었다.

누군가 제 목숨을 노릴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 하는 눈치였다.

라이오넬은 저도 모르게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나저나 저 이상한 노래는 언제까지 부를 생각이지?’

생각이 끝나기가 무섭게 넬리가 노래를 뚝 멈췄다. 그리고 별안간 고개를 홱 돌렸다.

라이오넬이 반사적으로 몸을 숨겼다.

고개를 잠깐 갸웃거린 넬리가 목초지로 들어갔다.

“꽈당아!”

넬리의 목소리를 들은 프레르가 하품을 하며 오두막 밖으로 나왔다.

“오셨어요?”

“네. 꽈당이 좀 꺼내 주세요.”

프레르가 짧게 대답하고 몸을 돌렸다.

순간, 프레르의 시선이 라이오넬이 숨어 있는 곳을 스쳤다.

눈이 마주쳤나? 라이오넬이 확인하기도 전에 프레르의 시선은 그대로 흘러 넬리에게로 향했다.

딱히 기척을 숨기고 있는 건 아니었으나 충분히 먼 거리였다.

일반인이라면 쉽게 눈치챌 리 없었다.

넬리 페퍼처럼 말이다.

‘기분 탓인가?’

라이오넬은 프레르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러나 그는 라이오넬이 숨어 있는 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마구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검은 당나귀 한 마리를 꺼내 왔다.

그가 긴 말뚝에 고삐를 묶었다.

넬리는 당나귀의 목을 쓰다듬고 사과를 한 알 주었다.

“갈 때 꽈당이를 데려가려고요.”

그 뒤로 대화가 이어졌다. 무슨 내용인지는 잘 들리지 않았다.

조금 더 다가가기 위해 움직이자 인기척을 느낀 당나귀가 고개를 돌렸다. 라이오넬이 있는 쪽이었다.

그는 몸을 숨기고 숨을 죽였다. 당나귀가 움직였으니 자신이 숨어 있는 곳을 프레르도 눈치채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정 반대쪽으로 흘렀다.

어둠 속을 빤히 응시하던 프레르가 넬리에게 말을 걸었다.

“참, 넬리 님. 저 계약 연장했다고 말씀드렸나요?”

“진짜요?”

“네.”

“얼마나 연장했어요? 10년? 100년? 어떻게 연장했어요?”

“들어가서 이야기해 드릴게요.”

프레르가 넬리와 함께 오두막 안으로 들어갔다.

라이오넬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아는 사람이라지만 목초지는 마을과 제법 떨어져 있었다. 게다가 짐승이 많아 무슨 일이 생겨 비명을 질러도 묻힐 가능성이 컸다.

‘그런데 아무런 의심도 없이 들어가다니.’

긴장감이 없어도 너무 없다.

라이오넬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천천히 오두막을 향해 다가갔다.

넬리가 꽈당이라고 부르는 검은 당나귀가 푸르릉 소리를 내다가 귀를 젖히고 머리를 숙였다.

말과 동물들의 전형적인 공격 자세였다.

‘그나마 제일 믿음직스럽군.’

꽈당이와 눈을 맞추기 위해 라이오넬이 자세를 낮추려 할 때였다.

당나귀 귀가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라이오넬 역시 그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 반대편에서 오두막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손에는 단검이 들려 있었고, 얼굴은 검은 천으로 가린 채였다.

로만이 넬리의 방에 침입했을 때처럼 말이다.

‘뻔하긴.’

꽈당이가 푸르릉거리며 앞으로 달려 나가려 했다. 그러나 말뚝에 묶인 고삐 때문에 자꾸만 뒤로 딸려 갔다.

라이오넬은 흥분한 듯 서성이는 꽈당이의 시야를 가로막고 속삭였다.

“내가 처리할 테니 조용히 있어.”

그러고는 푸르릉거리는 꽈당이를 뒤로한 채 기척을 죽여 움직였다.

남자는 숨을 죽인 채 문 옆에 붙어 있었다.

넬리가 나오면 조용한 곳까지 미행하다가 공격할 생각인 것 같았다.

라이오넬은 커튼이 쳐진 창문을 힐끗 보고 검을 뽑았다.

그 소리에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남자가 황급히 몸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라이오넬은 남자를 천천히 쫓으며 그가 오두막에서 충분히 멀어지길 기다렸다.

그러다 남자가 나무가 우거진 숲으로 들어섰을 때, 검을 힘껏 던졌다. 무거운 검이 공기를 날카롭게 꿰뚫었다.

쇄도하는 소리에 남자가 숨을 급하게 들이켜며 주저앉았다.

“헉!”

남자의 머리가 있었던 자리를 가르며 지나간 검이 나무에 깊게 박혔다.

남자가 두려움에 질린 사이, 라이오넬이 단검을 꺼내며 성큼성큼 다가갔다.

정신을 차린 남자가 나무를 향해 달렸다. 그리고 검 자루를 움켜쥐었다.

하지만 깊게 박힌 검은 아무리 힘을 줘도 쉽게 뽑히지 않았다.

그사이 라이오넬은 부쩍 가까워졌다.

남자는 검을 포기하고 단검을 뽑아 내질렀다.

라이오넬이 남자의 팔을 옆으로 강하게 쳐서 치워 냈다. 동시에 남자가 다리를 걸어왔다.

라이오넬은 다리를 빼내며 남자의 팔을 잡아 엎어 쳤다.

“컥!”

남자가 짧게 비명을 지를 때였다.

오두막 문이 열리며 넬리가 밖으로 나왔다.

라이오넬이 그녀에게 한눈을 판 사이 남자가 몸을 틀었다. 단검을 왼손으로 바꿔 든 그가 라이오넬의 목을 노렸다.

반사적으로 피하긴 했으나 스쳤는지 목이 따끔거렸다.

‘지하 감옥에 있는 놈보다는 실력이 낫군.’

장검을 뽑아서 쓰려고 한 것도, 단검을 찌르는 실력도 제법이다.

검을 많이 잡아 본 솜씨라고 생각하며 라이오넬은 남자의 팔뚝을 짓밟았다. 동시에 말발굽 소리가 라이오넬의 귀를 사로잡았다.

그는 자세를 낮추며 소리가 들리는 쪽을 보았다. 기사 두 명이 말을 타고 목초지로 올라오다가 넬리와 마주쳤다.

“관리인님?”

“기사님들이 목초지엔 웬일이세요?”

꽈당이에게 올라탄 넬리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그들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성벽을 넘어 들어온 괴한을 놓쳐 달려온 것이지만 그들은 전혀 다른 대답을 내놓았다.

“그냥 순찰 중이었습니다.”

“맞습니다. 공작님께서 첩자 일로 순찰을 강화하라고 하셨습니다.”

넬리는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수고하세요.”

그녀가 꾸벅 인사하고 지나치려 하자 기사 한 명이 따라나섰다.

“밤이 늦었으니 동행해 드리겠습니다.”

“괜찮은데…….”

“가시죠.”

넬리는 얼떨결에 호위를 받으며 목초지를 떠났다.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마자 라이오넬이 몸을 일으켰다. 그는 남자의 단검을 뺏어 멀리 내던졌다.

금속이 돌에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기사가 고개를 돌렸다.

라이오넬은 남자를 제압한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남자를 기사의 발치까지 끌고 가 던지듯 밀었다.

기사가 황급히 말에서 내려 남자를 줄로 묶었다.

라이오넬이 그 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분명 경비를 강화하라고 했을 텐데.”

차가운 목소리에 기사가 움찔 몸을 떨었다.

“죄송합니다.”

라이오넬이 새빨간 눈동자로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검사인가?”

고압적인 태도에 남자가 몸을 움찔거렸다.

남자는 아무런 목소리도 내지 않았으나 표정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목숨은 살려 줄 테니 가서 네 주인에게 전해.”

몸부림을 멈춘 남자가 잠시 눈을 굴리는가 싶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관리인 하나 때문에 실패할 계획이라면, 그게 뭐가 됐든 차라리 하지 않는 게 나을 거라고.”

살벌하게 운을 띄운 것치고는 제법 온건한 내용이었다.

남자가 미약한 의문을 품고 라이오넬을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새빨간 눈동자가 여유롭게 휘어졌다.

“그러니 한 번만 더 내 관리인을 건들면 핏줄이라고 자비를 베푸는 일은 없을 거야.”

별 감흥 없는 어조였으나 두 눈에는 시뻘건 살기가 흘렀다.

남자는 떨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오넬이 시선을 들어 기사를 보았다.

저를 향한 살기가 아님에도 기사는 목이 바싹 말랐다. 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라이오넬이 눈짓으로 남자를 가리켰다.

“양쪽 엄지를 잘라서 영지 밖으로 내보내.”

“죽이지 않아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엄지를 자르면 평생 검을 잡긴 어려울 것이다. 검사에게 그것보다 더 비참한 일은 없다.

“내보내.”

기사가 명령에 복종하겠다는 의미로 깊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남자의 목뒤를 내리쳐 기절시켰다.

남자를 들어 말 위에 엎어 놓은 기사가 라이오넬에게 깍듯하게 인사한 뒤 자리를 떠났다.

기사의 모습이 눈에 보이지 않을 즈음 등 뒤에서 맹하고 긴장감 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와. 살벌하네요.”

문 열리는 소리를 들었기에 라이오넬은 놀란 기색 없이 몸을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프레르가 지팡이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누군데 저래요? 도둑? 아니면 강도? 혹시 저를 노린 겁니까?”

라이오넬은 프레르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그는 분명 넬리 페퍼를 오두막으로 데리고 들어가기 전, 남자가 숨어 있던 어둠 속을 빤히 보았다.

그래 놓고 모르는 척하는 게 영 수상했다.

“글쎄. 누구일 것 같나?”

되돌아온 질문에 프레르가 다시 한번 지팡이로 머리를 긁적였다. 프레르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그러나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흘러내렸다.

‘저 질문은 무슨 의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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