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눈이 마주치자 라이오넬이 맘에 안 든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옅게 숨을 내쉬었다.
“싫으면 말고. 통돼지 구이 안에 뿔닭을 넣어서…….”
“싫다고는 안 했어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라이오넬이 작게 웃고는 몸을 돌렸다.
통돼지 구이라니.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게다가 뿔닭은 귀족들도 구하기 힘든 귀한 식자재였다.
그런 건 왕족들이나 먹는 건 줄 알았는데!
맞다. 라이오넬도 왕족이지!
‘그래도 먹는 거로 사치하는 건 본 적 없는데.’
향신료를 많이 쓰긴 하지만 그거야 뭐 다른 귀족들도 다 그러니까.
그가 평소 먹는 음식들을 떠올리자 점점 더 수상해졌다.
‘괜히 먹겠다고 했나?’
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나는 이미 식탁에 앉아 있었다.
지금이라도 갈까? 고민하는 와중에 하인이 커다란 트레이를 끌고 들어왔다.
장정 세 사람이 달려들어 은으로 된 접시를 만찬용 식탁 한가운데에 올려놨다.
뚜껑을 열자 놀라운 자태의 돼지고기가 나타났다.
“세상에.”
놀라서 입을 벌리고 있는데 갑자기 하인이 다가와 내 접시를 가져갔다.
뭐야. 돌려줘요.
손을 뻗으려는데 하인이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공작님께서 자리를 옮기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맞은편에 앉은 라이오넬을 봤다.
정확히 말하면 보려고 했다.
그러나 그와 나 사이에는 아주 긴 식탁과 산처럼 커다란 돼지 통구이가 있었다.
사실 라이오넬의 앞머리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얼굴 안 보고 먹는 게 내 정신건강에 더 도움이 될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옮기라니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인이 라이오넬의 왼쪽 자리에 접시를 내려놓았다. 내 오른쪽이 라이오넬이라니.
안 좋은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자리 배치다.
앉기 싫어서 가만히 서 있는데 라이오넬의 목소리가 들렸다.
“접시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
“네?”
“노려보기에.”
뚱한 얼굴로 쳐다보자 라이오넬이 고개를 돌려 물을 마셨다.
민망해하기는. 물론 그가 민망해한다고 농담에 웃어 줄 생각은 없지만!
“반대쪽에 앉을래요.”
“편한 대로.”
라이오넬이 눈짓하자마자 하인이 접시를 들고 긴 식탁을 빙 둘러 가기 시작했다.
나도 하인의 뒤를 따라가려는데 라이오넬이 붙잡았다.
“뒤로 가.”
뒤로 누가 지나다니는 거 안 좋아하면서 무슨 바람이래.
수상하다는 듯 쳐다보자 그가 왼쪽 눈썹을 까딱였다.
“돌아오다가 기절이라도 하면 식사를 망칠 테니.”
“그 정도 걸었다고 기절하진 않아요.”
소심하게 투덜거리면서도 멀리 돌아가는 게 싫어서 라이오넬의 말에 따랐다.
자리에 앉아 좀 기다리자 하인이 내 앞에 접시를 놓아 주었다.
“그런데 통구이가 너무 멀리 있지 않아요?”
“해체는 요리사가 할 거야. 그동안 전채 요리를 먹으며 기다리면 돼.”
해체라니! 뽀얀 김이 피어오르는 돼지를 멍하니 보는데 하인이 전채 요리를 가져다주었다.
동시에 요리사가 나와 우아하게 인사했다.
그 뒤로 식기인지 공구인지 모를 것들을 실은 트레이가 따라왔다.
“공작님. 분부하신 대로 기력을 회복할 수 있는 최고급 요리를 준비했습니다. 이 요리로 말할 것 같으면 조리 시간에만 32시간이 걸리…….”
뭐가 얼마나 걸린다고? 놀란 눈으로 돼지구이를 보자 요리사가 흐뭇한 얼굴로 가슴을 쫙 폈다.
그러더니 설명을 끝내자마자 거대한 식칼을 들었다.
고기가 예쁘게 썰리는 걸 넋 놓고 보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공작님.”
전채 요리를 먹던 라이오넬이 왜 부르냐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32시간이면 제가 막 정신을 차렸을 때 같은데…….”
“맞아.”
“기력이 많이 달리셨나요? 아니면 공작님도 저처럼 쓰러질까 봐 걱정되셨어요?”
그가 식기를 내려놓고 이마를 짚었다.
미간을 문지르며 새빨간 눈동자로 나를 쳐다봤다. 내가 제정신인가를 가늠하는 것 같았다.
“……목장지기가.”
프레르? 프레르 이름이 여기서 왜 나오지?
고개를 기울이고 가만히 쳐다보자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웃기지. 됐으니 먹기나 해.”
일단 전채 요리를 입에 넣었다.
관자의 부드러움과 라임의 적당한 산미가 입맛을 돋웠다.
본 메뉴는 어떤 맛일지 벌써 궁금하다. 썰린 고기가 트레이를 타고 다가오는 걸 뚫어지게 보는데 라이오넬이 말을 걸었다.
“방을 바꾸도록.”
“……갑자기요? 어디로요?”
“본성.”
인간의 본성으로 들어가서 살아라, 그런 뜻일까?
아니면 다른, 다른 본성이 있나?
사실 성이 두 채였나?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데 라이오넬이 내 생각을 뚝 잘라 냈다.
“현실 도피하지 마.”
그 본성이 맞나 보다. 라이오넬의 방이 있는, 바로 이 성 말이다.
“저는 제 방이 좋아요.”
“원래 쓰던 방과 똑같이 꾸며 주지.”
“서쪽 탑이 좋은 건데요.”
“거기는 폐쇄할 예정이다.”
“……왜요?”
라이오넬이 입을 다물었다.
나는 물끄러미 응시하며 일단 전채 요리를 먹었다.
다 씹어 삼키고 나자 라이오넬이 대답했다.
“벌레가 많이 나와.”
“그건 어디나 그렇잖아요.”
“쥐새끼도 나오고.”
“쥐 없는 곳이 어딨어요.”
“……유령도 나온다더군.”
아, 그건 좀…….
유령은 싫은데.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다 이상함을 느끼고 입을 열었다.
“저는 비명 소리 하나 못 들어 봤는데요? 진짜 유령이 나온대요?”
“정말 비명을 못 들었나?”
라이오넬이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었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 잠결에 비명을 들은 것 같기도 하다.
그, 그렇지만 그건 벌레였다며!
혹시 벌레랑 유령이 동시에 나왔나? 아니면 내가 무서워할까 봐 메리가 선의의 거짓말이라도 했나?
혼란스러운 눈으로 가만히 있는데 하인이 요리사가 해체한 통돼지 구이를 가져왔다.
라이오넬이 우아하게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어쨌든 서쪽 탑은 당분간 폐쇄할 예정이다. 어차피 하녀 몇 명과 그대밖에 없으니.”
“그럼 방은 언제 옮겨요?”
“내일.”
생각보다 이른데?
근데 진짜 유령이 나오는 게 맞긴 할까?
직접 본 것도 아니고, 방 옮기는 것도 귀찮고, 그냥 서쪽 탑에 계속 있어도 될 것 같은데.
물론 본성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본성은 식당과 멀었다.
라이오넬과 함께 아침을 먹는 방법도 있지만 허락해 줄지 모르겠다.
사실 허락해 준다고 해도 내가 싫었다.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이군.”
“네, 뭐…….”
“그럼 혼자 서쪽 탑을 쓰도록.”
“정말 그래도 돼요?”
나도 모르게 반색하자 라이오넬이 짐짓 사악한 미소를 입에 물었다.
“유령과 단둘이 폐쇄된 탑에 있는 게 그대 취향이라면. 말릴 수야 없지.”
“……옮길게요.”
“현명하군.”
라이오넬이 감흥 없는 목소리로 칭찬인지 비꼬는 것인지 모를 말을 남겼다.
괜히 얄미워 흘겨보다가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고기를 썰어 입에 넣는데, 거짓말이 아니라 혀에 닿자마자 녹았다. 놀란 눈으로 요리사를 보았다가 고기에 집중했다.
기력을 회복하는 음식이라더니 진짜 먹자마자 힘이 나는 것 같아!
하지만 배가 부르다 못해 터질 때까지 먹은 뒤에도 음식은 줄어들지 않았다.
“남은 건 어떡하죠?”
“기사와 하인들에게 나눠 줘.”
하인들이 음식을 치우고 나자 디저트가 나왔다. 제철 과일을 얹은 타르트였다.
한 입 크기의 타르트를 입에 넣고 씹는데 접시가 쓱 다가왔다.
라이오넬이 제 디저트 접시를 나에게 밀어 준 것이었다.
뭐야. 진짜 왜 이런담.
딸기가 아니라 크게 관심이 없나?
아닌데. 원래 단 건 뭐든 잘 먹었는데! 유달리 딸기를 좋아해서 그렇지.
“공작님.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어디가 아픈 거래요.”
라이오넬이 ‘어쩌라는 거지’라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보란 듯이 그가 양보해 준 타르트를 한입에 넣었다. 우물거리자 그가 안 하던 짓이 뭔지 알겠다는 듯 작게 감탄했다.
“단 걸 먹으면 기운이 난다더군.”
이번엔 내가 ‘어쩌라는 거지’ 표정으로 라이오넬을 보았다.
사이 좋게 떨떠름한 표정을 한 번씩 주고받고 나자 침묵이 내려앉았다.
물로 입가심을 하는 사이 라이오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를 따라 나가며 퇴근하면서 떠올린 걸 말했다.
“참! 관리소 옆에 간이 마구간을 뒀으면 해요. 보니까 톰하고 제럴드가 계속 걸어 다녔더라고요. 아마 소피도 그랬을 것 같아요.”
“그놈들은 튼튼하니 상관없어.”
“이제 날도 더워질 텐데…….”
“그대에게 힘들다고 징징거리던가?”
“아니요! 그냥 걸어 다니면 시간이 두 배로 걸려서 그렇죠. 말을 못 타는 것도 아니고, 효율이 떨어지잖아요.”
“흐음…….”
“저도 마차를 상시 대기해 놓는 것보다 꽈당이를 타고 다니면 훨씬 편할 것 같고요.”
“레반스에게 말해 두도록 하지.”
어쩐 일로 허락이 쉽게 떨어졌다.
역시 라이오넬에게는 효율을 들먹이는 게 최고인가 봐.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계단이 보였다.
“그럼, 공작님. 들어가세요. 오늘 식사 감사했습니다.”
라이오넬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계단에 발을 올렸다. 나도 현관을 향해 갔다.
아직 시간이 늦지 않았으니까 꽈당이나 보고 올까?
흥얼거리는데 라이오넬이 나를 불렀다.
“넬리 페퍼.”
“네?”
“당나귀 보러 갈 생각하지 말고 방으로 돌아가.”
“……혹시 제 생각이 들리세요?”
라이오넬이 한숨과 함께 골치 아프다는 듯 고개를 젓고 계단 위로 올라갔다.
나는 그가 완전히 위층으로 올라갈 때까지 서 있다가 몸을 돌렸다.
꽈당이 보러 가야지!
* * *
라이오넬은 창가에 섰다.
정원에 난 길을 따라 희미한 램프 불이 움직이고 있었다. 불빛이 위아래로 흔들리는 것을 보아 폴짝폴짝 뛰듯이 걷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에 비해 속도는 매우 느렸다.
라이오넬은 불빛의 주인이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분명 방으로 돌아가라고 말했는데.”
라이오넬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마를 짚는 그에게 집사가 따뜻한 차를 따라 주었다.
“이브닝 티입니다, 주인님. 넬리 양에게 호위를 붙이라고 할까요?”
라이오넬은 그러라고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직접 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