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네, 니요! 아니요.”
무슨 말이냐고 묻지도 않네. 역시 라이오넬이 감시하라고 시킨 게 분명해.
미안해하는 소피를 보니까 뭐라고 추궁할 수도 없었다.
‘그래. 라이오넬이 시켰는데 어쩌겠어.’
위에서 까라면 까고 기라면 기어야지. 그리고 어쩌면 소피도 누군가에게 감시당하고 있을지 모른다.
정확하진 않지만, 라이오넬의 의심병이 극에 달했을 때 서로를 감시하게 했던 것 같으니까.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로 돌아갔다. 소피가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넬리 님.”
“네?”
“만약에, 아주 만약에 누가 자기 목숨을 위협한다면…….”
“고, 공작님이 저 죽이래요?”
“아니요! 그게 무슨 무서운 말씀입니까.”
그렇지. 의심병 말기이긴 하지만 라이오넬은 죄 없는 사람을 죽이라고 하진 않으니까!
쓸데없는 생각을 털어 내는데 소피가 중얼거리는 게 어렴풋이 들렸다.
“오히려 그 반대…….”
“네?”
잘 안 들려 되묻자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누가 자기 목숨을 위협하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도망쳐야겠죠?”
“역시…….”
소피가 심각하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에 관한 게 아니면 소피 본인 이야기인가? 누가 목숨을 위협하나?
걱정스러운 마음에 의자를 끌고 가 소피의 손을 붙잡았다.
“소피. 혹시 누가 위협하면 꼭 주변에 알려요. 알겠죠?”
소피가 부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망설인 뒤에 한 가지를 더 질문했다.
“만약 알터우드 공작령을 떠나야 안전해진다면, 떠나서 안 돌아오시겠, 오는 게 낫겠죠?”
많이 무서웠는지 말도 더듬는다.
나는 그녀의 손을 힘주어 잡으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당연하죠! 일할 곳이 알터우드 공작령만 있는 것도 아니고. 안전이 우선이에요!”
“주변 사람들이 지켜 준다고 해도 그럴까요?”
말하는 걸 들으면 다른 사람 이야기인 것 같기도 하고.
고개를 기울이다가 일단 답했다.
“그럼요. 24시간 붙어 다니면서 지켜 줄 순 없을 거 아니에요.”
“그럴 수 있으면요?!”
소피가 내 손을 꽉 잡고 내 쪽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뺐다.
“그건, 그거 나름대로 싫지 않아요?”
“싫으시구나…….”
“근데 중요한 건 제가 아니라 소피니까요!”
소피가 고개를 기울였다.
“저요?”
“누가 목숨을 위협한다면서요.”
“아! 그거. 그, 그거는 아는 사람 얘깁니다! 여기 사는 사람도 아니고…….”
그녀가 손을 내저었다. 나는 대화를 되짚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아까 알터우드 공작령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건 예시였어요!”
고개를 끄덕이자 소피가 갑자기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나는 생각에 잠긴 것 같은 그녀를 두고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퇴근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퇴근이 달갑지 않은 건 처음이야.’
원래는 30분 전부터 설레는데.
라이오넬을 만나러 간다고 하니 30분만 더 앉아 있고 싶다.
괜히 다 정리한 서류를 들춰 보고 있는데 소피가 책상을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넬리 님. 퇴근 안 하세요?”
“네. 먼저 가세요. 일이 좀 남아서요.”
소피가 힐끗 창밖을 보더니 끄덕였다.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위험하니까 너무 늦게까지 하지 마세요.”
“네. 내일 봬요!”
소피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환하게 열린 문 너머로 톰과 제럴드가 보였다.
왜 문을 열어 놓고 갔담?
누워서 빈둥거릴 요량으로 문을 닫기 위해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기가 무섭게 제럴드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퇴근하십니까?”
“해야죠, 퇴근…….”
근데 하기 싫다. 정말 하기 싫어!
뭉그적거리는데 톰과 제럴드의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한숨을 삼키며 책상을 정리했다.
그래.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미루면 뭐 해! 어차피 라이오넬은 봐야 하는걸.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분도 퇴근하셔야죠.”
“마침 저희도 다 끝났습니다. 그렇지, 톰?”
“예!”
톰이 빛의 속도로 서랍에 서류를 다 처박은 뒤 벌떡 일어났다. 그들이 내 뒤를 바짝 따라 나왔다.
부담스럽게 왜 이러지?
슬쩍 눈치를 보자 톰과 제럴드가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럼 들어가세요.”
인사를 하고 마차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마차에 오를 때까지도 조셉 씨는 보이지 않았다.
퇴근했나 보다. 좀 편한 마음으로 의자에 기대는데 톰하고 제럴드가 마차로 다가왔다.
할 말이 있나 싶어 창문을 열자 톰이 제럴드를 힐끗 보았다가 목을 가다듬었다.
“흠. 저, 넬리 님.”
“네?”
“마차 좀 빌려 탈 수 있을까요?”
“그럼요!”
문을 열어 주자 제럴드와 톰이 안으로 들어왔다.
“저희가 원래 걸어 다니는데, 오늘은 다리가 아파서요.”
“걸어 다니신다고요?”
“예.”
말은 어쩌고 걸어 다니냐고 물어보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하긴. 이제 기사도 아닌데 말은 당연히 처분했겠지. 비싸고 유지비도 많이 드니까.
“그럼 관할구역 보러 갈 때도 걸어가는 거예요?”
톰과 제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오래 걸리더라.
관리소 옆에 마구간을 하나 둬서 일 때문에 나갈 때 타고 다닐 수 있도록 건의해 봐야겠다.
생각하다 보니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달라져 있었다.
멍하니 풍경과 톰, 제럴드를 보다가 번뜩 생각이 났다.
“앗, 잠깐만요! 제럴드 씨 집 지나친 것 같은데요. 톰 씨 집은 여기서 왼쪽으로 꺾어야 하지 않아요?”
“저희가 어디 사는지까지 기억해 주시고 계셨군요!”
“크흡!”
“아니, 지금 감동할 때가 아닌데……. 집을 지나쳤다니까요?”
이대로 성으로 들어가면 또 한참 걸어서 나와야 할 터였다. 나는 당장 마차를 세우기 위해 창문을 열었다.
그러자 제럴드가 창문을 닫았다.
“괜찮습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오랜만에 기사단 놈들하고 술이나 한잔해야겠습니다. 하하하.”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마차가 멈춰 섰다.
톰과 제럴드와 인사를 나눈 뒤 본성으로 들어갔다.
집무실로 가기 위해 위층으로 올라가는데 내려오던 소피와 마주쳤다.
“어? 소피?”
“넬리 님.”
퇴근한다더니 왜 본성에 있지?
고개를 기울이고 쳐다보자 그녀가 난처하고 모호한 미소를 지었다.
“저는…….”
나는 그녀가 온 곳을 봤다. 라이오넬의 집무실이 있는 방향이었다.
라이오넬에게 감시한 거 보고하러 온 거구나.
나는 소피가 더 곤란해하기 전에 그녀에게 활짝 웃어 보였다.
“아까 톰하고 제럴드가 다른 기사분들하고 한잔한다고 하더라고요. 소피도 거기 가려고 온 거예요?”
“아, 네. 그랬죠. 맞습니다.”
“과음하고 지각하면 안 돼요!”
미안해 죽겠다는 얼굴로 웃는 소피를 뒤로하고 계단을 마저 올라갔다.
집무실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었다.
이 모든 일의 원흉, 라이오넬이 서류를 보고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보자 그가 깃펜을 내려놓고 고개를 기울였다.
“또 눈빛이 불손해졌군. 무슨 일 있었나?”
“아니요.”
의자 하나를 아무렇게나 끌고 터덜터덜 걸어 들어갔다.
라이오넬과 마주 앉아 팔짱을 꼈다.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하지만 눈길도 주지 않고 빈 종이와 펜을 끌어왔다.
‘서로 믿고 도와도 모자랄 판에 감시나 하게 만들고!’
정말 마음에 안 든다. 빨리 액상 비료 배합법만 적어 주고 가서 밥이나 먹어야지.
일단 제일 위에 깨끗하게 씻은 달걀 껍데기를 썼다. 그러다 문득 좋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냥 아무렇게나 적어 줘 버릴까?’
그러다 식물이 죽으면 좋고, 아니어도 그만이고!
복수는 실패했어도 라이오넬이 잘되는 건 막고 싶다. 들어가는 재료는 이미 다 알 테니 용량을 다르게 적어 주면…….
“폐하께서 관심이 많으시더군.”
“네?”
생각하다 말고 놀라 고개를 들었다.
턱을 괸 채 종이를 보던 라이오넬이 그대로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대의 액상 비료에 관심이 많으셔. 보고했더니 폐하께서도 정원에 뿌려 그 효과를 직접 보고 싶다고 하시더군.”
아니, 왜! 왜 거기까지 말했어요!
이러면 아무렇게나 쓰지도 못하잖아.
여왕 폐하의 꽃이 죽기라도 해 봐! 꽃잎이 떨어지는 순간 내 모가지도 떨어진다.
괜히 목덜미가 서늘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하하. 그래요.”
손바닥에 땀이 배어 나왔다. 치마에 한 번 쓱 닦아 보송하게 만들고 다시 펜을 쥐었다.
아무렇게나 쓸 수 없게 됐어. 하나도 틀리면 안 돼. 순서까지 정확하게 적자.
깊게 숨을 내쉬는데 라이오넬이 다시 말을 걸었다.
“식사는 했나?”
“저녁이요?”
“그래.”
“적어 드리고 가서 먹으려고요.”
“흐음…….”
다시 숨을 고르고 기억을 더듬는데 라이오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액상 비료 만드는 법을 적었다.
홍차를 몇 분 우렸는지, 달걀 껍데기 몇 개를 식초 몇 밀리리터에 며칠이나 담가 두었는지까지 세세하게 썼다.
생수가 가득 찬 오크 통에 원액을 섞는 것까지 쓰고 나자 라이오넬이 말을 걸었다.
“다 됐나?”
“네! 그럼 저는 이만.”
“식사하러 가지.”
라이오넬이 내 말끝을 가로챘다.
뉘앙스가 묘하다.
“그럴 생각이긴 했는데…….”
설마 같이 먹자는 뜻은 아니겠지?
“저녁을 준비해 두라고 일렀으니 먹고 가.”
맞나 보다.
“단둘이요?”
“여기에 누가 더 있지?”
이건 또 무슨 속셈인 걸까?
아침에는 잘해 주고, 안 보일 때는 감시하다가 저녁에는 맛있는 걸 먹이다니.
도대체 무슨 짓이람!
단순한 호의는 아니다. 소피에게 감시를 시키고 따로 불러서 보고도 받았으니까.
설마 소스 대신 독을 뿌렸나? 음료 대신 자백제라도 따라 주려는 건가?
의심 가득한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