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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제발 좀 망하세요 (43)화 (43/130)

43화

눈만 깜빡이는데 라이오넬이 말을 이었다.

“확실히. 보고를 안 한 건 혼날 만한 게 맞지. 하지만 액상 비료를 만들어 냈으니 없던 일로 하겠다.”

대화를 못 따라가겠어!

같은 공간에서 같은 나라 말을 쓰고 있는데 왜 하나도 이해가 안 되는 거야!

혹시 다른 사람 이야기하고 있나?

여기에 보이지 않는 제3의 인물이라도 있나?

……그럴 리가 없지. 일단 어떻게 돼 가는 건지 모르겠으니까 가만히 있어야겠다.

“신기하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지?”

“네?”

“홍차 찌꺼기를 비료로 쓰긴 하지만 우려낸 물도 효과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저는 홍차 찌꺼기를 비료로 쓴다는 것도 몰랐는데요.

비료는 그냥 배설물을 삭힌 거 아니었나? 그리고 리지가 화분에 뿌렸을 땐 분명 식물이 죽었었는데?

“달걀 껍데기도. 빻아서 가루로 만들려면 시간이 오래 걸렸었는데 그대 덕에 한결 수월해지겠어.”

달걀 껍데기도 리지가 화분에 버렸을 땐 식물을 죽였는데!

다 식물에 좋은 것들이었다고?

그럼 도대체 화분은 왜 죽은 거야?

리지가 파괴의 손이라서 그런 거야? 그런 거냐고!

리지가 앞에 있었다면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고, 비법을 전수해 달라고 짤짤 흔들었을 것이다.

아니야. 근육통 때문에 그러지 못하겠구나.

그럼 상상 속에서라도 흔들자.

상상으로 리지의 어깨를 잡아 흔들고 있는데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서류를 보던 라이오넬이 마치 자기 방처럼 자연스럽게 출입을 허락했다.

문이 열리고 가방을 든 프레르가 안으로 들어왔다.

“프레르!”

반갑게 소리치자 프레르가 맹한 얼굴로 다가왔다.

“어? 일어나셨네요.”

그러고는 라이오넬에게 꾸벅 인사했다.

라이오넬이 서류를 정리해 옆에 가져다 둔 간이 탁자에 올려놓고 턱 끝으로 나를 가리켰다.

프레르가 다가오더니 내게 연고와 물약 같은 것을 하나 내밀었다.

“근육통이 심한 데에 바르세요. 그건 드시고요.”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일으켰다.

비명이 나올 것 같아서 이를 악무는데 라이오넬의 큰 손이 내 등을 단단히 받쳐 일으켜 주었다.

어색하다. 어색해!

‘갑자기 왜 이렇게 친절해진 거야!’

죽기 전에도 이랬나?

……비슷하긴 했지. 그래도 이렇게 친절해지는 데 2년 반 정도 걸렸던 것 같은데?

라이오넬에게 시선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약병을 땄다. 마시려는데 옆에서 지켜보던 라이오넬의 손이 끼어들었다.

“뭐로 만든 약이지?”

“라카라리스로 만들었습니다.”

“그건 마비 독 아닌가?”

“예, 그렇긴 한데요.”

뭐? 독이라고?

약병의 뚜껑을 슬쩍 닫으며 눈을 가늘게 뜨고 프레르를 노려봤다.

“많이 희석해서 괜찮습니다. 그 정도 농도는 진통제로 쓰여요.”

“다 마셔야 효과가 있나?”

“아니요. 절반씩 나눠 마셔도 됩니다.”

프레르가 머리를 긁적거리며 대답했다.

라이오넬이 내 손에서 약병을 가져가 프레르에게 내밀었다.

“마셔 봐.”

“네.”

프레르가 약병을 받아 들었다.

아니, 뭘 저렇게까지 한담? 나는 당황해 손을 뻗었다.

“괜찮아요. 프레르가 저한테 독을 먹일 이유가 없잖아요.”

다시 병을 가져오려는데 프레르가 병에 입을 안 대고 반 정도 먹었다. 그리고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라이오넬은 날카로운 눈으로 프레르를 유심히 살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진짜 독인가 싶었는데, 프레르가 멀쩡해진 얼굴로 나한테 약병을 내밀었다.

“죽을 정도로 맛없긴 한데, 죽진 않아요.”

죽을 정도로 맛없다니. 그런 거 먹기 싫은데.

받아 들지 않고 가만히 있자 프레르가 약병을 더 들이밀었다.

“잠깐 맛없으면 몇 시간은 안 아플 거예요.”

망설이는데 라이오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잠시 밖으로 나갔다가 금세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유리로 된 사탕 상자가 들려 있었다.

“마시면 주지.”

내가 앤 줄 아나 봐. 하지만 사탕은 싫지 않기에 프레르에게서 약병을 받아 들었다.

“그렇게 안 하셔도 마시려고 했어요.”

조금 길게 망설이긴 했겠지만 아픈 건 싫으니까.

눈을 질끈 감고 한입에 털어 넣자 끔찍한 냄새가 올라왔다.

“욱!”

헛구역질이 아니다. 진짜 토할 뻔했다.

잔디에 진흙을 넣고 섞은 것처럼 엄청난 풋내와 흙냄새가 난다. 거기에 맛은 묵혀 둔 생선처럼 비렸다.

인상을 찌푸리고 뭐라고 하려는데 입안으로 사탕이 들어왔다.

“사탕 맛이 끔찍해졌어요.”

약 맛이 전혀 중화되지 않잖아!

오히려 단맛까지 섞여 더 역겨웠다. 거의 울면서 값비싼 사탕을 마구 입에 넣었다.

입안이 가득 차고 나자 역겨운 냄새와 맛이 좀 가셨다.

“으으.”

이걸 먹고 어떻게 멀쩡하지?

경악과 존경을 담아 프레르를 바라보자 그가 슬쩍 사탕 쪽으로 손을 뻗었다.

찰싹 쳐 낼까 하다가 불쌍해서 그냥 내버려 두었다.

그가 사탕 하나를 입에 쏙 넣고 우물거렸다.

우리를 본 라이오넬도 손을 뻗어 빨간색 사탕을 하나 가져갔다.

다라락, 다라락.

한동안 방 안에 사탕이 이에 부딪히며 굴러가는 소리만 들렸다.

그 소리를 들으며 멍하니 있는데 빈 약병이 눈에 띄었다.

“여근 을므나…….”

“네?”

사탕 때문에 발음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혀로 사탕을 밀어 양쪽 볼에 치워 놓고 다시 입을 열려는데 옆에서 코웃음 소리가 들렸다.

“다람쥐 같군.”

볼이 빵빵한 게 느껴지니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냥 뚱한 얼굴로 조금 노려보다가 다시 프레르에게 물었다.

“약은 얼마나 더 먹어야 해요?”

“주무시고 일어나서 견딜 만하다 싶으면 연고만 바르시고요, 아프면 한 번 더 드셔야죠. 아, 약 기운 때문에 좀 졸릴 거예요.”

“……안 아파 볼게요.”

“네. 수고하세요.”

프레르가 응원하는 건지 놀리는 건지 모를 말을 하고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라이오넬에게 꾸벅 인사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라이오넬이 고개를 끄덕였다.

프레르가 가고 나자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누우려는데 등 뒤에 커다란 손이 닿았다.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가 라이오넬과 눈이 마주쳤다.

“도와주지.”

“괜찮아요.”

“약효가 돌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다.”

이상하다. 이상하고, 민망해!

라이오넬 덕분에 안정적으로 눕긴 했는데 붉은 눈은 아직 지척에 있었다.

너무 민망해서인지 심장이 크게 뛰고 볼이 달아올랐다.

나는 그를 슬쩍 밀어낸 뒤 등지고 누웠다.

“저는 좀 잘게요.”

“그래.”

“……안 나가세요?”

“안 나가.”

“왜요?”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몸을 움직이자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그래도 조금 참을 만해 이를 악물고 돌아누웠다.

라이오넬은 서류를 보는 중이었다. 시선을 느꼈는지 그가 입을 열었다.

“간병이라고 생각해.”

간병은 아니라는 뜻이다.

도무지 여기 있으려는 이유를 모르겠네.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는데 라이오넬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더니 보지도 않고 손을 뻗어 이불을 잡았다. 그리고 내 정수리를 다 덮도록 끌어 올렸다. 시체를 가려 주듯이 말이다.

이건 죽여 버리기 전에 조용히 하라는 무언의 협박인가?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조용히 있어야겠다.

‘가만히 있으니까 확실히 덜 아프네.’

자고 일어나면 다 낫겠지?

나아야 하는데. 그 약을 또 먹긴 싫었다. 희석한 게 그 정도면 원액은 도대체 얼마나 끔찍한 거야.

입에 머금기만 해도 충격으로 사망할 것 같아.

“헉!”

알겠다! 실패한 이유를 알겠어!

충격에 빠져 있는데 라이오넬이 이불을 걷었다.

“왜 그러지? 아픈가?”

“물…….”

라이오넬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지만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아주 중요한 사실을 깨달은 탓이었다.

‘물 때문이었어!’

식물용 독 원액에 물을 타서 그런 거였어. 비료가 된 거야. 독을 희석하면 약이 되는 것처럼!

“물을 타는 게 아니었어. 물을 타는 게…….”

중얼거리다 보니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물을 가지고 들어오던 메리가 움찔거리며 걸음을 멈췄다.

“넬리 님, 괜찮으신 거 맞죠?”

“……네.”

“공작님께서 물을 가져다주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잠깐 본성에 들렀다 오신대요.”

안 돌아와도 되는데요.

그것보다 진짜 왜 자꾸 옆에 있는 거람?

쫓아낼 방법 없나?

고민하는데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떼어 놨던 종을 다시 설치하라고 명령하실 건가 봐요.”

“그건 왜요?”

“넬리 님 몸이 안 좋으시잖아요. 울리면 제가 올 거예요.”

“없어도 괜찮은데…….”

발음이 조금 뭉개진다. 일단 자야겠다.

몸에 힘을 빼는데 라이오넬이 들어오는 게 보였다. 괜히 보면 민망해지기만 할까 봐 그냥 눈을 감았다.

그리고 진짜 잠이 들었다.

* * *

“오셨습니까, 왕자님.”

아델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외투를 벗었다. 집사가 그의 옷을 받아 하인에게 건넸다.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나가실 때보다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아아…….”

아델하르트가 감탄하다 말고 웃음을 터트렸다.

“나갔다가 재밌는 걸 봤거든.”

넬리가 소매치기를 잡기 위해 광장을 뛰어다닐 때, 아델하르트도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러다 넬리가 소매치기를 따라 골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물론 아델하르트는 정의의 사도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위험할 게 뻔한 사람을 보고도 모른 척할 정도로 비겁하지도 않았다.

구해 준 뒤 약간의 장난으로 경각심을 심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지름길을 이용해 넬리를 따라갔다.

그런데 그 자리에 예기치 못한 인물, 라이오넬 알터우드가 나타났다.

“뭐를 보셨는지 궁금하군요.”

집사의 말에 돈주머니를 낚아채 달아나던 넬리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몇 발자국 가지도 못한 채 라이오넬에게 뒷덜미를 잡혔었지. 질질 끌려가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해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하하!”

집사는 배까지 부여잡으며 소파에 앉는 아델하르트를 보았다.

한참을 그 상태로 보고만 있자 웃음을 멈춘 아델하르트가 깊게 숨을 내쉬었다.

“라이오넬 알터우드가 여자를 따라 뎀스에 왔었어.”

“알터우드 공작이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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