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아마 광장이 나를 걱정했다고 말한 거겠지.
물론 광장은 장소라서 감정을 느낄 수 없지만 말이다. 라이오넬이 나를 걱정했다는 것보다는 그럴싸했다.
광장에 요정이라도 깃들었나.
“그렇죠. 광장. 광장님. 요정이 깃든.”
“아직 열이 남았나……?”
메리. 혼잣말이 너무 잘 들려요.
그런데 내가 듣기에도 정신 나간 소리 같아서 할 말이 없었다.
내 이마를 손으로 짚어 열이 있는지 확인하는 메리를 내버려 둔 채 주변을 둘러봤다. 고개를 돌리자 커튼이 미풍에 흔들리는 게 보였다.
“근데 밤에 무슨 일 있었어요?”
“일이요?”
“잠결에 비명 같은 걸 들은 것 같아서요.”
“……악몽이라도 꾸셨나 봐요.”
악몽을 꾸긴 했지. 고개를 끄덕이자 메리가 몸을 돌리더니 걸어가 창문을 닫았다.
잠잠해진 커튼을 보고 있는데 메리가 뒤돌며 온화하게 미소 지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 버러지가 들어와서 좀 소동이 있었어요.”
버러지? 벌레 말하는 건가? 소동이 일어날 정도면…….
“엄청 큰 바퀴벌레라도 나타났어요?”
“뭐, 비슷해요.”
으으. 생각만 해도 싫다.
나도 모르게 몸을 떨다가 온몸이 아파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런데 너무 걱정하진 마세요. 공작님이 잡아서 병사들에게 넘기셨거든요.”
병사까지 대동될 정도면 얼마나 큰 바퀴벌레였던 거야. 자고 있어서 다행이다. 봤으면 기절했을지도 몰라.
눈을 질끈 감는데 메리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화재도 있었고 늑대도 출몰했었다고 들었어요.”
“화재요? 다친 사람은요?”
메리가 고개를 저었다.
“그, 그럼 죽은…….”
차마 말을 끝맺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메리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정말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일이람.
‘무슨 날이기에 악재가 겹쳤대. 재앙의 날? 아니면 누가 저주라도 걸었나?’
화재에, 거대 바퀴벌레에, 늑대에, 기절이라니. 거기다 근육통은 덤이다.
어제가 쉬는 날이었기에 망정이지 일하는 날이었으면 큰일, 큰일…… 큰일이다!
오늘 일하는 날인데! 반사적으로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악!”
“넬리 님!”
메리가 달려와 등을 받쳐 주었다.
온몸이 비명을 질렀지만 필사적으로 다리를 내렸다.
“어떡해. 지금 몇 시예요?”
“아마 정오는 지났을 거예요.”
지각이다. 아니, 지각이 다 뭐야. 거의 땡땡이 친 수준이잖아!
쓰러지기 전에 라이오넬에게 수로를 들켰는데.
일도 빼먹은 걸 알면 분명 날 내쫓을 거야!
다리에 힘을 주려는데 메리가 나를 다시 눕혔다.
“설마 출근하려는 건 아니죠?”
맞는데요. 긍정을 담아 어색하게 웃자 메리가 고개를 저었다.
“절대 안 돼요. 이 몸으로 무슨 출근이에요.”
앗. 생각해 보니 그건 그렇다.
비록 벼밭을 망가트리다가 몸살이 난 거긴 해도 아픈 건 아픈 거니까!
괜히 무리했다가 과로사라도 하면 큰일이지.
게다가 나는 이제 갈 곳도 있는걸. 로만 씨가 알선해 준 곳으로 가면 된다.
내가 가만히 있자 메리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출근할 생각 하는 거죠? 절대 안 보내 줄 거예요.”
그런 끔찍한 생각 안 했어요!
고개를 저으려는데 달갑지 않은 목소리가 들렸다.
“밤새 끙끙 앓던데. 출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다니, 정말 대단하군.”
라이오넬이 내 방엔 무슨 일일까?
왜 메리는 나에게 윙크를 하는 걸까?
왜 입 모양으로 ‘집사님께 다 들었어요.’라고 속삭이고는 자리를 비켜 주는 걸까?
그리고 라이오넬은 왜 침대로 다가오는 거지?
혼란스러워하다가 몸을 일으키려는데 라이오넬이 검지로 내 이마를 꾹 눌렀다.
“으악!”
버티려다가 뒤로 넘어가고 말았다.
라이오넬이 코로 짧게 웃으며 침대 옆에 있는 간이 의자에 앉았다.
“몸은 좀 어떻지?”
“다섯 사람한테 한 시간 동안 얻어맞은 느낌이에요.”
라이오넬의 얼굴에 작은 감탄이 떠올랐다.
“의외로 정확하군.”
“뭐가요?”
“전 목장지기의 진단. 아, 이제는 그냥 목장지기인가?”
저건 또 무슨 말일까?
고작 하루 정도 잠들어 있었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말을 하나도 못 알아듣겠지?
사실 한 1년 정도 잠들어 있던 거 아닐까?
“프레르 씨 말씀하시는 거 맞죠?”
“그래.”
“프레르 씨가 왜 목장지기가 됐어요? 로만 씨는 어쩌고요?”
라이오넬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그리고 나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네.”
“로만은 첩자였다.”
숨을 크게 들이켜며 놀라다가 로만 씨가 날려 보낸 전서구를 떠올렸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 그것 봐요. 제 말이 맞죠?”
눈을 부릅뜨고 쳐다봤는데 라이오넬은 불쾌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오히려 미소 비스름한 것을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왜 저러지? 평소라면 눈빛이 불손하다고 뭐라고 했어야 하는데.
“그래. 그대 말이 맞아서 포상을 내릴까 하는데.”
돈인가? 돈이면 좋겠다.
“벡시아드리아 라렐리우스를 자주 데리고 다닌다지.”
왜 만나는 사람마다 꽈당이를 저런 이름으로 부르는 걸까…….
“네. 제 제일 친한 친구예요.”
“그대에게 주지. 앞으로는 허락 없이 써도 돼.”
원래도 허락 없이 쓰고 있어서, 이걸 포상이라고 봐야 하나?
눈만 깜빡이자 라이오넬이 왼쪽 눈썹을 까딱였다.
“마음에 안 드나?”
“아니, 마음에 안 든다기보다는 실감이 안 나서요. 그럼 제가 만약 영지를 떠나게 되면 데려가도 되는 거죠?”
“……떠날 생각인가?”
대화가 또 이상한 곳으로 튄다.
물론 떠날 생각이 있긴 했지만……. 잠깐. 로만 씨가 첩자랬지? 그리고 지금은 잘렸고!
그럼 내 직장은 어떻게 되는 거지?
여기서 잘리면 갈 곳 없어지는 거잖아.
“아니요! 제가 어딜 가겠어요. 그냥, 제가 한 일이 있으니까 쫓겨날 수도 있고…….”
슬쩍 운을 띄며 라이오넬의 눈치를 보았다.
“한 일? 수로를 말하는 건가?”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오넬이 다리를 꼬고 깍지 낀 손을 무릎 위에 올려 뒀다. 그러고는 묘한 비음을 흘리며 나를 보았다.
제발. 자른다는 말만 아니어라.
난 아직 해야 할 복수도 많이 남았고, 뜯어내지 못한 돈도 많아요!
“알고 한 것, 아니었나?”
“네?”
“벼는 물에 친화적이고 군락을 이뤄야 잘 자란다.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몰랐다. 하지만 진실을 말할 순 없었다.
모른 척하다가 벼가 무럭무럭 시들면 실수인 척 넘어갈 생각이었지만 지금은 들켜 버렸으니까.
여왕님은 무서운 분이다. 즉위식 때 반대파의 반을 직접 척살한 것으로 유명했다. 덕분에 한동안 피의 군주라 불리며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 여왕님이 맡긴 작물이다. 고의로 죽이려 했다는 게 밝혀지면……. 목이 뎅강…….
이건 알고 한 짓이어야 한다. 몰랐어도 알고 있었다고 해야 해. 절대 고의로 벌인 짓이라는 걸 들키면 안 돼!
“그럼요. 책에서 봤어요.”
“그래도 확신이 없었나 보군.”
조금 다른 의미의 확신은 있었다. 반드시 죽을 거라는 확신 같은…… 아니야. 생각하지 말자.
입을 꾹 다물고 있는데 라이오넬이 입을 열었다.
“그런 것치고는 파격적이던데. 수로를 만들어서 밭에 물을 댈 생각을 하다니.”
“그으, 렇죠.”
“혹시 벼를 다른 곳에서 본 적이 있나?”
“없어요.”
“흐음.”
라이오넬의 짧은 비음을 끝으로 대화가 끊겼다.
침묵이 이어졌다.
불편해. 더 할 말도 없는 것 같은데 라이오넬은 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걸까?
안 바쁘나? 바쁠 텐데.
눈치만 보고 있는데 방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소리치자 문이 열리고 레반스가 들어왔다.
“각하. 결재 서류입니다.”
그러니까 결재 서류를 왜 여기로 가져다주시는데요!
“두고 가.”
라이오넬은 왜 또 두고 가라고 하는 거야!
뭐야. 신종 괴롭힘인가?
당황해 레반스와 라이오넬을 번갈아 보고 있는데 레반스와 눈이 마주쳤다.
누워 있는 게 민망해 일어나려는데 라이오넬이 한 손으로 내 어깨를 눌렀다.
“쉬어.”
“맞습니다, 넬리 님. 아프신데 쉬셔야죠.”
둘이 여기서 일하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쉬냐고!
울고 싶은 것을 참으며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레반스가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며 웃었다.
“일하고 싶어도 나을 때까지만 참으세요.”
왜 다들 다 나가 달라는 눈빛을 일하고 싶어 하는 눈빛이라고 착각하는 걸까?
“저는 쉬고 싶어요.”
“네. 좋습니다. 바람직한 태도예요.”
안 믿는 눈치다. 진짜 쉬고 싶어서 다 나가 줬으면 좋겠는데.
다행히 레반스는 결재 서류만 받아 다시 방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라이오넬은 여전히 침대 옆에 앉아 있었다.
“안 가세요?”
“그래.”
“왜요?”
“이유를 알려 주면 도망갈 것 같은데.”
다시 침묵이 흘렀다.
혼자 열심히 머리를 굴려 봤지만 생각나는 건 내가 주기적으로 살포한 식물용 독밖에 없었다.
설마 그것마저도 들키진 않았겠지.
“그런데 수로를 만들기 전에 밭에 살포한 건 뭐지?”
들켰잖아!
“그걸, 어떻, 어떻게…….”
“그렇게 요란스럽게 다니는데 모를 리가.”
“저는 비밀 통로로 조용히 다녔는데요?”
“그 통로를 열어 준 게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지?”
그때 문을 열어 준 기사님 이름이 뭐였더라?
“조셉 씨…… 요?”
“그가 누구의 사람이지?”
조셉 씨가 나를 속였다.
분명 비밀로 해야 한다고 분명히 말했는데!
어쩐지 그다음에 만났을 때 순순히 비밀 통로를 알려 주더라.
그러면 라이오넬이 다 알면서도 내버려 뒀다는 건가? 나 이렇게 누워 있어도 괜찮은 거야?
내가 버린 식물 독 때문에 잔디가 죽은 걸 라이오넬도 알 거 아니야!
사색이 되어 굳어 있는데 라이오넬이 내 쪽으로 몸을 틀어 앉았다.
“안색이 안 좋군. 좀 더 자도록 해.”
“저……. 안 혼내세요?”
라이오넬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잠시 그러고 있던 라이오넬이 알겠다는 듯 작게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가도 없이 비료를 뿌려서 혼날 거라고 생각했나?”
비료라니? 나는 독을 뿌렸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