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돌아가서 씻고 옷 갈아입는 시간까지 합치면 나는 한 시간 후에나 잠들 수 있었다.
반면에 라이오넬은 쿨쿨 자고 있겠지!
배알이 꼬인다.
‘그래. 왜 금전적인 손해만 입히려고 했을까? 괴롭히는 거에는 물리적인 게 최고인데!’
가서 잠을 방해해야지.
비요인지에 관해서 상의할 게 있다고 해야겠다.
입을 한번 앙 물고 본성 안으로 들어갔다.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가다가 잠깐 걸음을 멈췄다.
‘그런데 라이오넬은 일 중독자에 영지성애자잖아. 이 시간에 찾아가면 좋아하는 거 아니야?’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어떤 미친놈이 새벽 3시에 찾아가는 걸 좋아하겠어. 누구나 방해받고 싶지 않은 시간은 있기 마련이다.
특히 그게 새벽이라면!
그게 잠든 직후라면!
장담하는데 약속도 없이 찾아온 방문자를 달가워할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다시 당당하게 걸어 라이오넬의 방문을 두드렸다.
“공작님! 주무시나요?”
잔다는 걸 알고 온 거지만 예의상 한번 물어봤다. 그리고 문에 귀를 가져다 댔다.
안에서는 역시나 인기척이 들리지 않…….
않아야 하는데?
왜 걸어오는 소리가 들리는 걸까?
‘너무 일찍 올라왔나?’
침대에 편하게 누워서 딱 잠들려고 할 때 문을 두드렸어야 하는데!
아쉬움이 밀려왔지만 어쩔 수 없지.
시간이 많이 늦은 것에 위안을 삼으며 방문에서 한 발자국 떨어졌다. 곧 문이 열리며 라이오넬이 모습을 드러냈다.
벌어진 가운 사이로 드러난 복근에 램프 불빛이 일렁였다. 완벽한 모양으로 갈라진 근육들을 보고 넋을 놓고 말았다.
나도 모르게 시선을 점점 아래로 내리다가 라이오넬이 말을 걸어 고개를 치켜들었다.
“무슨 일이지?”
밤이라 그런지 목소리도 평소보다 훨씬 낮았다. 사람을 홀리는 음색이었다. 나는 몽롱해지려는 정신을 다잡기 위해 괜히 속으로 핀잔을 주었다.
‘왜 저러고 나온 거람!’
그러고도 얼굴이 달아올라 황급하게 몸을 돌렸다.
“상, 상의할 게 있어서요!”
홀리지 마, 넬리 페퍼!
저건 라이오넬이다. 휴가도 주지 않고 삼 일 밤낮을 부려 먹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던 악마야!
죽을 때의 고통을 떠올리자 이성이 돌아왔다.
“가운 좀 여며 주세요.”
“아.”
나른한 감탄사와 함께 천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괜찮다. 나는 괜찮다, 넬리 페퍼.
속으로 기도문을 외우고 몸을 돌렸다.
라이오넬은 비웃음인지 뭔지 모를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나는 당당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비어에 관해서 상의하려고요!”
“비어가 아니라, 벼.”
“뵤? 비요?”
“벼.”
“뼈? 삐, 빼!”
“……들어와.”
자기 발음 좋다고 자랑하는 거야 뭐야.
속으로 툴툴거리며 라이오넬을 따라 들어갔다.
완전히 잠들지 않은 게 맞는지 침대 근처 촛대가 타오르고 있었다.
다음에는 타이밍을 더 잘 맞춰야겠다. 다짐하는데 라이오넬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시간에 영지 경영에 관해 상의하러 오다니. 이렇게 열정적인 관리인은 처음이군.”
비꼬는 건가? 비꼬는 거였으면 좋겠다!
“과찬의 말씀이세요.”
소파까지 다가간 라이오넬이 몸을 돌렸다. 그러더니 다시 나에게 다가왔다.
서서 이야기하려는 건가? 잠을 깨운 사람에게 권할 자리는 없다는 뜻인가?
그런 거면 정말 좋겠다.
그만큼 기분이 나쁘다는 뜻이니까!
기대감 어린 눈으로 그를 보는데 어째 점점 거리가 가까워졌다.
“왜요?”
지척에 선 그가 내 얼굴을 빤히 보았다.
“어딜 다녀온 거지?”
라이오넬이 손을 뻗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빼 피했다. 하지만 그의 손끝은 물러나지 않고 내 이마에 닿았다.
“흙이 묻었는데.”
진짜였다. 그의 손에는 모래 알갱이가 묻어 있었다.
보면 강변에 있는 모래라는 걸 알 텐데!
나는 화들짝 놀라 그의 손목을 잡고 손에 묻은 모래를 털어 냈다. 모래 알갱이가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라이오넬이 아래를 보았다.
일부러 램프를 조금 높이 들며 이마를 빠르게 털었다. 그리고 발을 휘휘 저어 바닥에 떨어진 모래를 흐트러트렸다.
“밭에 다녀왔어요! 비요들이 잘 있나 궁금해서요.”
“당나귀를 타고 다녀왔나 보군.”
“어, 어떻게 아셨어요?”
역시 감시를 붙여 놨었나?
경계하며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나자 라이오넬이 손가락으로 내 옷을 가리켰다.
“당나귀 털이 잔뜩 붙어 있으니까.”
“아, 저는 또 아레트 씨가 저를 쫓아다니는 줄 알았어요.”
“그대는 나를…….”
눈이 마주치자 라이오넬이 말을 멈췄다.
그는 긴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내 탓…… 뭐라고 할…… 도 없군.”
라이오넬이 너무 작게 중얼거린 탓에 제대로 듣지 못했다. 고개를 기울이며 되물어 봤으나 그는 손을 내저었다.
“됐어. 자리에 앉아서 이야기나 하지. 상의할 게 뭐지?”
“그게…….”
생각 안 해 봤다. 모르겠다. 일단 아무거나 뱉어 봐야지!
“비요 말이에요. 이국의 작물이니까 혹시 기후가 맞지 않아서 잘 안 자라나 싶어서요.”
“흠……. 그럴 수도 있겠군.”
“그, 원산지의 기후를 알아보면 어떨까요?”
“워낙 멀고 정보가 없는 작은 국가라. 힘들 것 같군.”
“책을 뒤져 보면 뭐가 나오지 않을까요?”
“그렇게 먼 나라에 관한 책은 소설에 가까워. 허황된 말뿐이라 안 보느니만 못하지.”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고 나자 대화가 끊겼다.
“할 말은 그게 다인가?”
그렇다. 끝이다. 애당초 할 말이 없는 상태에서 왔으니까. 하나라도 꺼낸 게 어딘가.
하지만 왠지 모르게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꺼내 놓아야 할 것 같았다. 일단 생각나는 문제점 몇 가지를 꺼냈다.
라이오넬은 귀찮아하는 기색 없이 전부 들어 주었다.
문제는 전혀 피곤한 기색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죽겠는데!
‘괜히 오기가 생기네.’
저 잘난 얼굴에 힘들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바뀌는 걸 보고 가야겠어!
나는 죽기 전에 3년 동안 개선되었던 것들을 떠올렸다.
“참, 그러고 보니 도로도 포장하면 좋을 것 같아요. 지금 길은 너무 울퉁불퉁해서 짐마차가 오가기 불편해요.”
“좋은 생각이군.”
“그리고 돼지나 닭을 개인이 키우잖아요? 그걸 한데 모아서 관리하는 게 어떨까요?”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있죠! 지금은 거의 집 안에서 가축을 기르는데 냄새도 많이 나고 위생상 좋지도 않잖아요.”
“축사를 만들자는 뜻인가?”
“네. 모아서 키우면 관리하기도 쉽고, 세금 매기기도 쉽고, 번식도 쉬울 거예요.”
“확실히. 수도는 그렇게 바뀌는 추세더군. 생각해 보도록 하지.”
고개를 끄덕이다가 나도 모르게 꾸벅 졸고 말았다.
머리가 뚝 떨어지는 느낌에 몸에 힘을 주려는데 단단한 손바닥이 느껴졌다.
라이오넬이 탁자에 부딪히려는 내 머리를 한 손으로 받은 모양이었다.
“돌아가 자는 게 좋겠군.”
“아직 괜찮아요.”
“이 정도면 충분히 도움이 되었다. 더 할 말이 있으면 자고 다시 찾아오도록 해.”
세상에. 라이오넬이 내 잠을 다 걱정해 주다니.
내 몰골이 말이 아니긴 한가 보다.
눈을 크게 깜빡이고 있는데 묘한 비음이 들렸다.
“소피에게 듣기로는 며칠 전에 로만이 찾아왔었다는데.”
“아, 맞아요.”
잘 움직이지 않는 혀를 굴리며 대답했다.
“무슨 이야기를 했지?”
“그냥. 연애 상담.”
“그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나?”
“원래 안 친한 사람한테 상담하는 게 더 편할 때도 있는 법이에요.”
말이 늘어진다. 몸도 늘어진다.
거의 본능적으로 누우려는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탁자 건너편에서 놀란 라이오넬의 얼굴이 보였다.
라이오넬이 힘들어하는 걸 보고 가려고 했는데, 이러다가는 내가 먼저 힘들어질 것 같았다.
허벅지를 꼬집자 그나마 정신이 조금 돌아왔다.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졸려서 가 볼게요. 안녕히 주무세요.”
“……그래.”
비틀비틀 걸어가는데 언뜻 한숨 소리 같은 게 들렸다.
그러나 뒤돌아 무슨 일이냐고 물을 정신은 없었다. 그대로 방으로 돌아와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 * *
로만은 다리를 떨며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넬리 페퍼를 포섭하지 못하면 죽여라.]
그런 명령이 있었으나 사실 로만은 어지간하면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넬리 페퍼를 포섭하기 위해 갔는데, 대답이 애매했다.
‘차후를 약속받긴 했는데…….’
이걸 포섭에 성공했다고 봐야 하나?
비밀을 지켜 주겠다고 했으니까 이 정도면 대충 성공했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게다가 넬리 페퍼가 제 입으로 공작과 사이가 안 좋다고 했으니까.
로만은 고민하다가 넬리와 나눈 대화를 보고했다.
그리고 몇 주 뒤에 편지가 왔다.
로만은 평범한 안부 인사 같은 암호문을 해독했다.
[아직 안 죽였나?
그녀의 말을 믿는 건가?
당장 포섭되지 않으면 계획에 방해만 될 뿐.]
여러 필체로 쓰인 글자가 짜증을 내는 것 같았다.
로만은 한숨을 내쉬며 팔뚝에 단검을 고정하고 소매로 가렸다.
* * *
점점 피로가 쌓이는 게 느껴진다. 그래도 상류의 수로는 대충 다 만들어 뒀다.
이제 밭에서 물을 빼낼 수 있는 길만 만들면 되는데. 왜 이렇게 졸리지.
왜 졸리긴 벌써 이 주 째 잠을 제대로 못 자서 그렇지.
땅을 파다 말고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별안간 꽈당이가 커다란 귀를 펄럭였다.
당나귀는 청각이 예민한 동물이라 아주 작은 소리도 잘 듣는다.
‘혹시 들짐승이라도 나타났나?’
온몸에 핏기가 가시는 것 같아 램프를 들고 몸을 홱 돌렸다. 강 근처라 그런지 어슴푸레한 안개가 옅게 깔려 있었다.
그 너머로 검은 실루엣이 보였다.
램프의 붉은 불빛이 정체 모를 인물의 손끝에 맺혔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든 어떤 물건에 맺힌 것이었다.
‘빛날 만한 게 뭐가 있지?’
생각하면서도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뒤꿈치에 돌들이 걸렸다.
검은 실루엣이 내 쪽으로 서서히 다가왔다.